1969년 우드스탁 페스티벌. [SOUND MEDIA]
1969년 미국 뉴욕주 시골에서 열린 행사이자 현대 록페스티벌의 시원이며 페스티벌이 거대 산업화된 지금도 기획자와 참가자 마음 어딘가에 깃들어 있는 축제의 이상향인 우드스톡 페스티벌에 대한 회고적 기록이다. 이 책이 새삼 눈에 들어온 이유는 ‘테이킹 우드스탁’만큼 시궁창에서 천국으로 올라가는 과정을 적나라하고 진솔하게 쓴 책을 읽은 적이 없어서다. 책의 전반 대부분을 차지하는 그 비참하고 꿉꿉한 기분이, 카카오톡 메시지 목록을 가득 메운 ‘취소’와 ‘연기’의 무게와 닮았던 것이다.
많은 전설적 사건은 결과로 기억된다. 그 결과로 가는 과정은 담론이니 사회상이니 하는 거창한 틀에 의해 재구성되기 마련이다. 우드스톡 페스티벌도 마찬가지다. 저항과 자유, 사랑과 평화, 히피와 플라워운동 등 1960년대를 관통했던 정신의 총화로 우드스톡 페스티벌은 이야기된다.
대중음악의 요순시대
'테이킹 우드스탁' 표지(왼쪽). 엥리엇 티버. [문학동네 제공, Author Learning Center 유튜브 캡처화면]
포크와 블루스, 사이키델릭과 솔 등 당시 청년 문화를 대표하던 뮤지션이 모두 무대에 올랐고 그들은 음악사에 영원히 회자될 전설적인 순간을 남겼다. 아니, 우드스톡 페스티벌 그 자체가 전설이 됐다. ‘사랑과 평화의 여름’이란 이름으로. 전 평화운동과 히피운동으로 대표되는 1960년대의 정점이었다. 후대의 사람들이, 이 페스티벌을 직접 경험할 수 없던 나라의 사람들이 열광할 수밖에 없는 스펙터클과 드라마에 상상의 양념이 더해져 동양에서 태평성대를 상징하는 중국 요순시대 같은 존재가 됐다.
그런데 과연 그렇기만 할까. 우드스톡 페스티벌 이 열린 시골의 소년이었으며 이 페스티벌의 숨은 공신인 엘리엇 타이버는 ‘테이킹 우드스탁’에서 그 거대한 담론 뒤편의 이야기를 다룬다. 반드시 그런 거창한 담론만이 우드스톡 페스티벌을 가능하게 한 것은 아니었음을 이야기한다. 책은 축제의 동기를 제공하게 된 어느 가족을 따라간다. ‘막장가족’이다. 무능한 아버지, 완고하고 억척스러운 어머니, 그리고 그 부모에게 인생을 저당 잡힌 아들 엘리엇. 엘리엇은 오직 가족의 빚을 청산하려 좌초될 위기에 놓인 우드스톡 페스티벌 기획자들에게 연락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하나둘 망해가는 마을의 망해가는 모텔에 모여든다. 그 과정을 통해 뉴욕 인근에 쇠락하던 마을 벤슨허스트는 세상의 중심이 되고, 가족은 난생처음 겪는 활기에 만세를 부른다. 그리고 1969년 8월15일 우여곡절 끝에 우드스톡 페스티벌이 열린다. 모텔에서 페스티벌 뒤치다꺼리를 하던 엘리엇도 마지막 날 축제의 현장에 간다. 그것은 엘리엇에게 천국과 다름없었다. 상상할 수 없던 자유, 기대하지 않던 경험, 무엇보다 음악이 만들어낸 행복이 난데없이 시골 농장에 찾아온 것이다.
300여 쪽을 넘기다 보면 전율이 솟는다. 이 회고록은 이안 감독이 동명의 영화로도 만들었는데, 혹시 영화만 보고 이 책을 짐작하면 오산도 그런 오산이 없다. 이 책을 다시 꺼내 든 이유이기도 한, 영화에서는 묘사되지 않은 엘리엇의 배경 때문이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
1994년 우드스탁 페스티벌 공연사진 [GettyImages]
그의 삶을 통해 우드스톡 페스티벌은 담론이 아닌 실체로서 그 시절 그 장소로 우리를 이끈다. 음악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라 믿었던 1960년대의 정신이 폭발한 우드스톡 펫페스티벌. 물론 음악이 세상을 바꾸지는 못했다. 그러나 엘리엇과 그 가족의 삶을 바꾸었다. 단순히 경제적인 성공을 거뒀기 때문이 아니다. 더는 불행할 수 없을 정도의 암울한 현실에서 도피하려고만 하던 엘리엇은 우드스톡에 얽히면서 후일 극작가로 성장할 원동력, 긍정적 자아를 찾는다. 힘없는 ‘마초 꼰대’였던 아버지에게 전혀 보이지 않던 활력이 샘솟고, 죽어 있던 마을이 되살아난다.
개인과 가족의 한 시기를 통해 책은 결국 시대를 담아낸다. 20세기 대중문화가 혁명적으로 만개하던 그 시대는 비틀스와 밥 딜런이 전부가 아니었다. 모두가 새로운 음악을 꿈꾸고 동경했다. 인류가 겪지 못한 대중문화의 꽃밭을 일궈냈다. 현실과 동떨어진 상상을 실천하며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을 타진했다. 비록 그 모든 실험은 1970년대와 함께 한물간 유행처럼 돼버렸지만 1960년대라는, 그리고 우드스톡 페스티벌이라는 이상향을 후대의 기억 속에 강렬히 심어놓았다.
책장을 덮으며 지금을 생각한다.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많은 대형 페스티벌이 열린다. 록페스티벌뿐 아니라 EDM, 힙합 등 장르도 다양하다. 수만에서 수십만 인파가 몰리지만 운영은 치밀하고 상상력보다는 자본력이 압도한다. 거기에 참여하는 사람들도 혁명과 이상향을 꿈꾸기보다 소비자로 스스로를 인식한다. 누가 나오고, 뭘 먹을 수 있고, 잠은 어떻게 자고 등 이런 것들이 페스티벌을 고르는 최우선 기준이 된다. 페스티벌은 그렇게, 음악산업의 효자상품이 돼버렸다.
1994년 개최 25주년을 맞아 우드스톡 페스티벌은 다시 열렸다. 1969년만큼은 아니었어도 전 세계 음악 팬들의 주목을 끌었다. 지난해 50주년을 맞아 다시 한 번 큰 페스티벌로 그 ‘역사적 몽상’을 기념할 예정이었지만 행사를 한 달 반 남짓 앞두고 취소됐다. 스폰서도 취소되고, 장소도 구하지 못한 탓이었다. 몽상만으로는 현실의 벽을 넘어설 수 없는 세상의 반영 같았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그리고 지금 이곳의 온갖 ‘취소’와 ‘연기’ 소식을 들으며 뜬금없이 생각했다. 이제 음악은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