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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중요한 것은 오늘날 능동태와 수동태의 구분에 초점을 맞춘 태라는 개념이 인도유럽어에만 있다는 것, 그리고 라틴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처럼 우리에게 익숙한 서양언어의 문법 개념이 고대 그리스어(헬라어)에서 연원했다는 데 있다.
태라는 개념이 헬라어에서 연원한 게 왜 중요할까. 첫째 하이데거가 말했듯이 ‘언어는 존재의 집’이기 때문이며, 둘째 화이트헤드의 말처럼 ‘서양철학은 플라톤 철학의 각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서양철학의 삼위일체 격인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두 헬라어로 사유했고 헬라어로 존재론(철학)의 토대를 구축했다. 따라서 그들의 사유를 따라가는 서양철학자는 모두 헬라어에 기초해 사유를 펼쳐야 한다. 그렇기에 서양철학자들은 “결국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라는 고백을 내뱉게 되는 것이다.
일본 철학자 고쿠분 고이치로의 ‘중동태의 세계’는 이런 서양철학의 흐름에 제대로 한 방을 먹인다. 첫째, 헬라어 문법체계에선 능동태-수동태의 구별 이전에 중동태-능동태의 구별이 중요했다는 것이다. 둘째, 반(反)플라톤 철학을 펼쳤다는 스피노자-니체-하이데거-데리다의 사상이 실은 플라톤 시대의 중동태적 사유로 해명 가능하다는 것이다.
명사는 동사에 선행한다
고쿠분 고이치로 (오른쪽) [사진 제공 ·동아시아]
동사가 처음 만들어질 땐 개별행위자가 중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It rains(비가 온다)나 It snows(눈이 온다)처럼 비인칭(3인칭) 표현이 먼저 생겨난다. 이런 사건 중심적 사유가 행위자 중심의 사유로 바뀌면서 1인칭과 2인칭 주어가 뒤늦게 등장하게 된다. 고쿠분은 이를 살짝 과장해 ‘사건의 사유화’라고 부른다.
프랑스 고전학자 장 콜라르의 연구에 따르면 인도유럽어의 공통기어는 현재 우크라이나 혹은 남러시아에서 살던 사람들이 1만 년 전후로 쓰던 언어였다. 그래서 인도유럽어에서 ‘바다’라는 단어의 어원은 제각기지만 ‘눈’의 어원은 공유된다. 이때 이미 명사에서 동사가 파생됐다. 그러다 늦어도 기원전 3000년 무렵부터 유럽 각지로 퍼져나갔다고 본다. 이즈음 인도유럽어에 주어와 동사의 관계맺음에 대한 관심이 형성돼 태의 개념이 탄생한다.
주어와 동사의 관계는 곧 방향성과 관련 있다. 주어로부터 동사로 표현되는 행위가 일어날 때 능동태, 거꾸로 주어가 동사로 표현되는 행위의 결과물이 될 때 수동태가 된다. 그럼 중동태란 무엇일까. 능동과 수동의 중간을 표현한 것인가.
아니다. 중동태는 오늘날의 자동사(어떤 상태가 되다)와 재귀동사(스스로에게 뭔가를 행하다), 그리고 수동태(어떤 상태로 초래되다)를 포괄하는 개념이었다. 그래서 처음엔 중동태-능동태의 대립쌍이 중요했다. 그러다 중동태의 일부인 수동태가 독립해 나가 ‘하느냐(능동)-당하느냐(수동)’의 대립쌍이 공고해지면서 중동태는 자취를 감추게 된다. 그 시점은 대략 고전라틴어가 형성되는 기원전 1세기 전후로 추정된다.
중동태-능동태의 대립쌍은 라틴어보다 역사가 깊은 산스크리트어와 헬라어에서 발견된다. 이를 심도 있게 연구한 언어학자 에밀 벤베니스트에 따르면 ‘주어가 해당 동사가 수행하는 과정의 바깥(능동)에 있느냐, 안(중동)에 있는냐’로 구분 가능하다. 예를 들어 ‘간다’의 경우는 주어가 해당 행위를 완수하면 주어가 원래 있던 자리에서 벗어나게 되기에 능동인 반면, ‘욕구하다’의 경우는 주어가 그 욕망이 추동되는 과정 속에 존재하기에 중동이 된다.
또 ‘튑토마이’라는 헬라어 중동태는 ‘내가 무엇에 타격을 받는다’는 수동의 의미와 ‘내가 타격을 받는 상태에 있다’는 경험의 의미, 그리고 ‘스스로 자신을 타격한다’는 재귀적 의미까지 포괄한다. 고쿠분은 모든 태의 선구로서 중동태가 등장한 뒤 그 대립태로서 능동태가 등장했으며, 이후 능동태와 대립태로서 수동태가 강조되면서 모든 태의 원조인 중동태가 잊히게 됐다고 분석한다.
심문의 언어 vs 자유의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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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쿠분은 이런 통찰을 철학사로 확장한다. 능동-수동의 대립쌍은 모든 행위를 누구에게 귀속시키느냐를 중시하는 사유체계를 낳는다. 사건의 사유화가 심화된 양태이자 자본주의 출현 이후 대두되는 ‘일물일주(一物一主)’의 전조 증세라 부를 만한 사유방식이다. ‘행하다’와 ‘당하다’ 중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이런 사유는 결국 의지와 책임의 문제로 귀결된다. 고쿠분은 이를 늘 행위의 귀속처를 찾고, 능동과 수동 가운데 어느 쪽인가를 선택하도록 강제한다는 점에서 ‘심문의 언어’로 규정했다.
이에 반해 중동-능동의 사유는 주어, 곧 주체의 의지와 상관없이 사건으로서 행위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춘다. 그래서 어떤 행위의 출발점으로서 의지(意志)라는 개념과 그 행위의 결과에 대한 책임의 개념으로부터 일종의 자유가 발생한다. 중동태적 사유를 했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의지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갈파한 해나(한나) 아렌트의 통찰도 이를 뒷받침한다.
데리다는 이를 ‘비(非)타동사성’이라 말했고, 들뢰즈는 ‘능동적이지도 않지만 수동적이지도 않은 존재의 방식’이라고 표현했다. 라이프니츠는 ‘사건에 선행하는 주어는 없다’는 말로 이를 대변했다. 이런 중동태적 사유의 정점은 ‘자유의지’를 부정했지만 ‘자기본성의 필연성에 입각해 행위하는 자는 자유롭다’고 갈파한 스피노자에게서 발견된다.
만물에 신성이 깃들어 있다고 본 스피노자의 세계관에서 신의 작용은 결코 신을 넘어서거나 벗어날 수 없다. 스피노자의 신이 초월적이지 않고 내재적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다. 주어의 행위가 늘 그 자신의 내부에 머무는 중동태적 세계관에 맞닿아 있다.
하지만 그 세계관은 능동과 수동도 포용한다. 신이라는 내재원인이 다양한 성질이나 형태를 띠는 변양을 통해 개물로 표현된다. 문제는 이 개물과 개물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점이다. 이를 2차 변양이라고 할 때 변양하는 물체의 본성에 충실한 경우를 능동적이라 보고, 그렇지 않은 경우를 수동적이라 봤다.
능동과 수동의 이분법을 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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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곤란에 처한 사람을 돕고자 돈을 건네는 것과 위협당해 돈을 건네는 것의 차이를 드러낸다. ‘총신으로부터는 결코 권력이 발생할 수 없다’고 주장한 아렌트에게 둘은 모두 능동적 행위로 간주된다. 하지만 스피노자에게 전자는 의로운 본질에 투철하기에 더욱 능동적이고 그래서 자유로운 행위지만, 후자는 수동성의 발현이 더 크기 때문에 강제적 행위가 된다.
고쿠분이 말하는 중동태의 세계는 현실에 더 가깝다.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선악의 이분법이 딱 부러지게 작동하지 않는 것처럼 능동과 수동의 이분법이 적용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게 존재할 뿐이다. 하지만 능동과 수동의 이분법에 취해 애매하고 모호한 중동태적 사유는 잊히고 은폐됐다.
이와 관련해 고쿠분의 ‘중동태의 세계’는 간과했지만 깊이 음미할 대목이 있다. 기원전 1세기 집필된 디오니시오스 트락스의 ‘문법의 기법(테크네 그라마티케)’을 소개한 대목이다. 가장 오래된 헬라어 문법책이자 18세기까지 유럽에서 표준문법서로 통용된 이 책은 3가지 태를 언급하고 있다. 에네르게이아, 파토스, 메소테스다. 오늘날 언어학자는 대부분 이를 능동태, 수동태, 중동태로 번역한다. 언어학자 폴 켄트 앤더슨은 이를 다른 식으로 해석했다. 에네르게이아는 뭔가를 수행하는 것, 파토스는 뭔가를 경험하는 것, 그리고 메소테스는 그 둘이 혼재하는 상태를 뜻한다고.
고대 그리스 문학작품을 읽다 보면 실제 파토스가 ‘수동’이 아니라 ‘경험’으로 해석되는 경우를 수없이 만나게 된다. 예를 들어 헬레네가 파리스와 사랑에 빠지는 것을 호메로스는 부정적으로 보지 않고 이렇게 여겼다. ‘아프로디테(사랑의 여신)의 숨결이 헬레네에게 임했다.’ 마찬가지로 아킬레스가 전쟁터에서 무용을 떨칠 때는 ‘아레스(전쟁의 신)가 아킬레스에게 깃들었다’고 봤다. 현대인이라면 어떤 분위기나 상태에서 자신의 영혼을 수동적으로 내준다고 부정적으로 인식할 만한 것을 고대 그리스인들은 신들의 부름에 대한 능동적 호응으로 간주했다. 중동태적 사유가 결코 이 책 한 권에서 끝나지 않고 좀 더 깊은 영향을 끼칠 것임을 예감케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