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문필가이사 사회사상가였던 존 러스킨(1863 · 위)과 그의 부인 에피 그레이를 그린 토마스 리치몬드의 초상화(1865·왼쪽) 그리고 러스킨이 직접 그린 그의 ‘이뤄질 수 없는 사랑’ 로즈 라 투셰의 초상화(1861). [위키미디어, 위키피디아]
오늘날 한국인에겐 데즈카가 더 유명하다. ‘우주소년 아톰’과 ‘밀림의 왕자 레오’를 모르는 중·장년 세대가 있을까. 하지만 이름의 무게로만 따지면 1980년대까지 러스킨이 더 유명했다고 봐야 한다. 명언 하면 떠오르는 영국인이 오스카 와일드나 조지 버나드 쇼라면 과거엔 단연 러스킨이었다.
‘고상하고 행복한 사람을 많이 길러내는 나라가 가장 부유한 나라다’ ‘인생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고 채워지는 것이다’ ‘자유와 절제는 빛과 그림자의 관계다’ ‘세상에 나쁜 날씨란 없다. 여러 종류의 좋은 날씨만 있을 뿐’….
사랑에 실패한 인류애자 러스킨
이 명언 제조가의 인생은 흥미롭다. 와인 수입상으로 큰돈을 번 부모의 든든한 후원을 바탕으로 풍부한 독서와 여러 차례의 유럽 여행을 통해 화가로서 자질을 닦은 그는 옥스퍼드대를 졸업한 20대 중반에 이미 예술평론가로 명성을 얻었다.영국의 걸출한 화가 윌리엄 터너(1775~1851)를 영국 미술계의 혹평으로부터 구해낸 것도, 라파엘과 미켈란젤로의 이상화된 미술을 거부하고 자연에 충실한 묘사로 돌아가자는 영국 ‘라파엘전파’의 등대가 돼준 존재도 러스킨이었다.
그의 진짜 위대함은 노동력을 상품으로만 간주한 고전경제학을 비판하며 영혼의 경제학을 전개한 점이다. 일찍 온 일꾼이든, 늦게 온 일꾼이든 똑같은 품삯을 준 포도밭 주인을 하느님에 비견한 성경 마태복음의 구절을 토대로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를 주창한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1862)가 대표적이다. 레오 톨스토이와 마하트마 간디, 조지 버나드 쇼 같은 위인들이 19세기 최고 사상가로 러스킨을 뽑은 이유도 여기 있다.
그런 그에게도 아킬레스건은 있었다. 평생 제대로 된 사랑 한번 못 해본 ‘오쟁이 진 남편’이란 점이다. 그의 아내 에피 그레이는 당시 무수한 화가의 모델이 될 정도로 아리따운 외모를 자랑했다. 열두 살의 그녀를 보고 반해 러스킨이 쓴 동화가 ‘황금강의 왕’이었고 스무 살이 되자 바로 결혼식을 올렸다. 하지만 결혼은 5년 만에 파탄이 났다. 에피가 러스킨의 후원을 받던 화가 존 에버렛 밀레이(1829~1896)와 눈이 맞아 달아나서다.
더 놀라운 점은 이혼소송 과정에서 밀레이와 사통하기 전까지 에피가 처녀였음이 밝혀진 것이다. 에피가 남긴 편지에 따르면 첫날밤 그녀의 알몸을 보고 충격을 받은 러스킨이 이후 잠자리를 거부했다고 한다. 러스킨 역시 에피의 ‘신체적 상황’에 거부감이 생겼다고 인정했다. 이 때문에 여성의 음모를 그리지 않는 서양화에 익숙해 있던 러스킨의 환상이 무너져서라는 주장과 동성애 성향 때문이라는 주장이 쏟아졌다.
에피는 밀레이와 사이에 8명의 자녀를 낳았지만 러스킨은 여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가슴 아픈 점은 그가 불혹의 나이에 다시 사랑에 빠졌지만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상대 역시 에피와 닮은꼴이었으니 열 살 나이에 그의 데생 제자가 된 로즈 라 투셰(1848~1875)였다. 러스킨은 그녀를 모델로 엄청나게 많은 데생을 그리며 그녀에게 집착하다 열여덟 살 되던 해에 청혼했지만 거절당했다. 이후 러스킨은 발작을 일으킬 정도로 깊은 상실감에 빠졌는데, 병약하던 로즈가 스물일곱 살에 결국 숨지자 절망감에 정신질환이 재발했고 25년의 여생을 정신질환과 싸우며 외롭게 보낸다.
텐노의 비판을 받은 신, 데즈카
일본 최초의 TV 만화영화 ‘우주소년 아톰’ 제작에 몰두하고 있는 데즈카 오사무(왼쪽)와 그런의 그를 비판적으로 극복하려 했기에 대성할 수 있었던 미야자키 하야오(오른쪽). [데즈카 오사무 공식 홈페이지, 뉴시스]
의대생 신분으로 1946년 열여덟 살 때 ‘마아짱의 일기장’이라는 4컷 만화로 데뷔한 그는 1952년 의사자격시험을 통과할 무렵 레오(1950)와 아톰(1952)의 원형을 발표했다. 게다가 1963년 일본 첫 TV 만화영화로 ‘우주소년 아톰’이 방영되면서 재패니메이션의 신화가 시작될 때 그 선봉장이 됐다. 1962년 무시프로덕션을 설립하며 ‘일본의 디즈니’를 꿈꾼 그는 1973년 무시가 부도나자 다시 종이만화로 돌아가 ‘블랙잭’ ‘붓다’ ‘아돌프에게 고한다’ 같은 걸작을 발표하며 과거 명성을 되찾았다.
그는 딱 두 번 데이트한 아내와 결혼할 때도 원고 마감으로 결혼식에 지각할 만큼 사랑에 초연했다. 1989년 숨지기 직전 유언이 “부탁이니까 일하게 해줘”일 정도로 일벌레였던 점은 러스킨과 달랐다. 하지만 그의 만화가 생명 존중과 평화 애호에 충만했다는 점에선 휴머니스트였던 러스킨을 빼닮았다. 초중고 시절 제국주의 일본의 광기를 접한 데즈카는 일본이 패전한 1945년 8월 15일을 만화세계의 원점으로 삼았으며 전쟁 반대, 생명 존중, 자연보호, 과학문명에 대한 회의를 그 네 기둥으로 배치했다. 그런 데즈카에게도 약점은 존재한다. 그보다 13년 연하로 ‘재패니메이션의 텐노(天皇)’로 불리는 미야자키 하야오는 1989년 “만화가로서 데즈카는 ‘넘사벽’이었지만 애니메이터로서 데즈카를 넘어섰기에 오늘날의 내가 있었다”는 취지의 추도문을 발표했다. 그래서 애니메이터로서 데즈카의 한계를 우회적으로 비판했다는 해석이 나온다.
애니메이션 제작에는 수많은 원화가 들어가야 해 인건비 비중이 높다. 1960년대 일본 애니메이션 초창기에 이 문제가 불거졌을 때 데즈카는 초당 24프레임이 필요한 원화를 6~12프레임으로 압축하고 주변 묘사를 생략하는 ‘리미티드 기법’으로 돌파했다. 재패니메이션에 종이만화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이로 인해 애니메이션 완성도가 떨어졌고 만화가의 수입이 줄어들어 생활이 어려워지는 부작용이 발생했다.
미야자키는 완벽한 디테일을 추구하면서 데즈카를 뛰어넘어 일본적 리얼리즘을 구현하고자 고군분투한 결과 대성할 수 있었다. 미야자키는 이를 이렇게 표현했다.
“데즈카 씨에게 도전하고 그와 결별해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이야말로 데즈카 씨도 진정 바라고 있는 일 아닐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