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제공 · 극단 인어]
연극 ‘빌미’는 ‘바람직한 거짓’과 ‘바람직하지 않은 진실’의 틈새에서 인간 본성을 적나라하게 파헤친다. 악행의 근원을 다루는 극사실주의 공연은 무겁고 어려울 것으로 생각되지만, ‘빌미’는 2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만큼 스산한 공포와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오가며 관객을 몰입케 한다.
막이 오르면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라는 별칭을 가진 니콜로 파가니니의 ‘라 캄파넬라’를 편곡한 피아노 선율이 무대를 둘러싼 물결과 함께 의미심장하게 흐른다. 펜션 주인 최명광 교수(한규남 분)는 오페라 투란도트의 아리아 ‘공주는 잠 못 이루고’를 부르며 오페라 속 칼리프 왕자처럼 우아하고 당당하게 부인 강순옥(송현서 분)과 함께 무대에 등장한다.
펜션을 관리하며 최 교수의 건물에서 치킨가게를 운영하는 김철수(박정순 분)와 아내 정애란(홍윤희 분)은 가게 매상이 신통치 않아 임차료도 못 내는 형편. 하지만 지금 내쫓기면 발달장애를 가진 28세 아들 하늘(이종윤 분)과 당장 오갈 데조차 없는 처지라 최 교수 부부에게 읍소한다. 하늘과 동갑인 최 교수의 고명딸 승연(조수정 분)이 유학길에 오르기 전 펜션에서 환송회가 열렸다. 그런데 승연이 결혼을 약속한 사람이라며 진성필(김철리 분)을 부모에게 소개한다. 비정규직 만년 시간강사의 초라한 경제력과 서른 살 가까운 나이 차에 최 교수 부부는 경악을 금치 못한다. 순옥은 필시 성필이 논문 표절 문제로 교수 채용이 안 되자 억하심정으로 자신들에게 복수하고자 딸 승연을 이용하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서로 악다구니하며 물고 뜯기는 상황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이를 은폐하기 위한 악행은 공갈과 회유로 시작해 끔찍한 협박으로 치닫는다. 평범한 인간이 얼마나 밑바닥까지 추락하며 파멸할 수 있는가. 급기야 이전투구로 극에 달한 두 가족의 모습에 객석은 숙연해진다.
권력을 놓지 않으려 거짓을 일삼는 인간의 부질없는 행동이 얼마나 끔찍하고 처참한 결과를 초래하는지 연출자 최원석은 간결하고 날카로운 무대언어로 선사하고 관객은 숨죽인다. 무의식적으로 사로잡힌 편견과 고정관념이야말로 모든 거짓에 빌미를 제공하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