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안후이(安徽)성 린취안(臨泉)에서 광복군에 편입된 일본군 탈출병 일행이 접한 광복군 신병교육은 매우 실망스러웠던 듯하다. 총도 없고 “형식적인 도수제식 교련이 고작”이었다. 이 훈련과정은 “졸업할 적까지 되풀이되었다”. 이는 광복군 자체의 지리멸렬함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중국 서주(徐州·현 산둥성 동남부와 창강 북부 장쑤성 일대 옛 행정구역)에서 일본군을 탈출한 장준하 일행이 린취안을 거쳐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정)에 도착했을 때는 그 수가 50명가량으로 불어나 있었다. 일본군 탈출부터 충칭까지 과정에서 이미 이들은 임정 내 세력다툼을 감지하고 있었다. 라오허커우(老河口)의 김원봉 계열 부대에서 세력 확장을 위해 탈출병 50명을 붙잡아 두려는 시도가 있었던 것이다. 여러 사정 끝에 충칭 임정에 도착한 일행의 소감을 장준하는 “기대와는 다른 현실에 대한 실망”이라고 기록했다. 임정 상황이 초라하기 이를 데 없었던 것이다.
우익 민족주의자로서 확고한 사명의식을 갖고 있던 장준하가 해방 직전 벌인 흥미로운 사건 하나가 기록으로 남아 있다. 당시 충칭 임정은 파벌이 난립해 연립정부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상하이를 떠난 후 임정은 파벌별로 흩어져 있다 중국 정부의 요청으로 겨우 ‘모양만의’ 통합을 이룬 상태였다. 파벌들은 각기 정당을 만들어 활동했다. 김구·조소앙의 한국독립당, 김규식·김원봉의 조선민족혁명당, 신익희의 한국혁명당, 그 외에도 서너 개 정당이 난립하고 있었다.
폭탄 발언과 임정 난입 사건
조직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이름뿐인 정당들이었으므로 ‘50명이나 되는’ 장준하 일행에 반색할 수밖에 없었다. 각 파벌이 장준하 일행에 대해 자파 포섭 공작을 벌이는 상황이 벌어졌고, 이때 장준하·김준엽 등의 ‘돌발’ 행동이 일어났다. 장준하가 충칭시 교포 모임에서 임정의 분열상과 졸렬함을 지적하며 “다시 일본군으로 돌아가 항공대에 지원, 충칭 임정 청사를 폭격하고 싶다”는, 말 그대로 ‘폭탄’ 발언을 해 물의를 일으킨 것이다. 이에 그치지 않고, 또 하나의 임정 내 정당을 만들기 위한 경비 조달용 댄스파티에 각목과 화약을 들고 들어가 파티를 무산시키는가 하면, 장준하 일행 일부를 자신들의 파벌로 포섭하려는 신익희 내무부장에게 폭력을 행사하고자 ‘몽둥이’를 든 일행 20여 명을 이끌고 임정 청사에 직접 난입하는 사태를 일으키기도 했다.
김준엽의 ‘장정’에는 임정 청사 난입사건의 사정이 좀 더 정확하게 설명돼 있다. 이범석을 따라 시안(西安)으로 가게 된 장준하와 김준엽 등 19명이 충칭으로의 길을 함께 했던 대원들 사이 단결을 깨뜨린 신익희 내무부장을 ‘규탄’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이범석의 만류로 복귀했지만 일종의 폭력 행사라고 할 수 있었다. 이후 이들은 이범석을 따라 시안의 광복군 제2지대로 가게 된다.
장준하와 김준엽 등이 벌인 임정 난입 사건의 장면들은 매우 흥미로우면서도 몇 가지 의문을 갖게 한다. 먼저, 일제강점기 말 임정이 50명 정도 인원에도 동요하고 우왕좌왕할 만큼 이름뿐인 조직이었는지, 그리고 한국 독립운동사와 정치사에 남아 있는 쟁쟁한 명사들이 아무런 경력도 없는 젊은 청년들에게 왜 이렇게 ‘꼼짝하지’ 못했는가 하는 점이다. 확실한 것은, 이들이 ‘보통 청년’이 아니라 ‘학병’, 즉 젊은 엘리트였다는 사실이다. 특히 ‘우익 학병’은 궤멸에 가까운 일제강점기 말 우익 민족주의 독립운동의 상황에서 상당히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존재였다.
그런데 이런 문제들을 제쳐두더라도 난감한 지점은 남는다. 장준하·김준엽 등의 물리력 행사 자체를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다. 물리력 행사와 관련해 당시 이들이 군 소속이었다는 사실에 문제가 있다. 서주에서 충칭까지 6000리(약 2350km) 길의 도보 행군은 후일 김준엽이 마오쩌둥의 ‘장정(長征)’에 비유한 것처럼 그 자체로 놀라운 의지의 소산이라 할 만하며, 그러한 의지는 임정에 대한 기대와 민족 독립운동에의 자기 사명을 보여주는 것임에 분명하다. 기대와 사명감이 컸던 만큼 실망과 분노가 작지 않았을 것임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들이 정식 군인 신분이었다는 점은 확실히 문제적이다. 이 시기 광복군은 중국군 작전권 하에 있었으며 소속과 계급상 중국 육군 소위였다. 광복군 소속은 임정 아래였지만, 실제로는 장제스의 중국군 지휘 하에 있었던 것이다. ‘정치적인 혼란과 분열이 군인들의 물리력 행사를 정당화할 수 있는가’라는 매우 예민한 문제를 안고 있다.
여러 자료를 근거로 종합해볼 때, 해방 전후 장준하는 전형적인 ‘기독교 반공 우익’에 ‘국가주의자적’인 면모를 갖고 있었다. 흔히 장준하를 백범 김구의 계보를 잇는 존재로 평가하지만, 해방과 귀국 당시 장준하는 이범석계가 분명했다. 먼저, 장준하와 ‘형제 같은’ 사이였던 김준엽이 가장 확실한 이범석계였다. 시안의 광복군 제2지대에서 김준엽은 이범석의 부관으로 근무했다. 김준엽은 언제나 가장 가까운 친구로 장준하를, 가장 존경하는 선배로 이범석을 꼽았다.
반공 국가주의자의 면모
장준하가 해방 후 김구의 비서 자격으로 환국(還國)한 것을 들어 장준하를 김구계로 분류하는 경우가 있지만(이후 장준하 스스로 계보를 자처한 면이 있다), 사실 김구와의 환국은 장준하가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 해방 직후인 1945년 8월 18일 장준하는 김준엽과 함께 이범석을 수행해 서울 여의도 비행장에 내렸다 일본군의 반발로 돌아간 일이 있었고, 김구와의 환국은 한참 후 일이다. 이범석, 장준하, 김준엽 세 사람은 해마다 8월 18일이면 ‘환국’을 기념하는 술자리를 갖곤 했다. 장준하와 김준엽은 자신들의 ‘공식’ 환국일을 이범석과 함께 시도했던 1945년 8월 18일로 하고 싶어 했다.
해방 후 장준하는 이범석의 조선민족청년단(족청)에 가담했다. 족청 연구자로 알려진 후지이 다케시에 따르면, 광복군 제2지대장이었던 이범석이 귀국 후 구상했던 것은 ‘건군(建軍)’이었다. 족청 조직도 그 일환으로 볼 수 있는데, 해방 이전 이미 이범석 휘하에 있었던 장준하가 족청의 조직과 운영에 가담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 시기 장준하의 족청 활동은 단순 가담 수준이 아니었다. 장준하는 족청 핵심기관인 중앙훈련소의 중심인물 중 하나였다(후지이 다케시의 ‘파시즘과 제3세계주의 사이에서’). 당시 족청 중앙훈련소 교무처 요원으로 근무했던 서영훈의 회고에는, 장준하가 초대 교무처장 송면수에 이어 중앙훈련소의 제2대 교무처장으로 왔다고 돼 있다. 공식문서상 기록과 다소 차이가 있지만, 조직 내 장준하의 실질적 비중이 컸음을 증언하고 있다. 해방기 장준하가 ‘민족지상 국가지상’을 최고 이념으로 하는 족청의 중앙훈련소 학생과장(교무처장)이었다는 사실은 중요하게 짚어둘 사실이다. 족청 시절 장준하에 대한 서영훈의 회고를 보자.
“훈련생들이 무기명으로 쓴 논문의 필적을 조사해 누구누구가 공산당 같다고 할 정도로 기독교 신앙과 극우익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족청의 세력 확장 과정에서 상당수 좌익이 들어오자 장준하는 족청을 이탈했다. 김준엽의 회고에는, 해방기 장준하가 이범석의 족청으로부터 이탈한 이유가 서술돼 있다.
“청년단 내의 좌익분자들에 대한 처리 문제로 철기(이범석)와 의견이 맞지 않아 그만두었다고 하는데, 장형의 말에 의하면 좌익불순분자들에게 철기가 포위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장준하를 김구 계열로 보기 어려운 이유는 1948년 남한 단독정부 수립 과정에서도 나타난다. 장준하와 김준엽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찬성했다. 김구, 김규식의 관점, 즉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으로서 분단이 굳어진다는 논리는 찬성할 수가 없었다”.
해방 후 오랜 시간이 지나기까지 장준하는 반공 국가주의자의 일면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장준하가 우익 반공주의라는 포괄적 이념의 우산 아래에서 점차 벗어나기 시작한 것은 대략 1960년대 중반 이후 일로, 이 시기에 이르러 함석헌이나 한신(韓神·한국신학대학) 계열 인사들이 갖고 있던 생각에 조금씩 견인된 것으로 보인다.
통일 지상주의로 이동하다
확고한 우익 반공주의자의 면모를 갖고 있던 장준하가 생각의 변화를 노출한 것은 시간이 한참 흐른 후인 1970년대 들어서였다. 계기는 7·4 남북공동성명이었다.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직후 장준하는 분명한 ‘중도 통일노선’을 표명했다. 해방기 정치노선들을 평가하면서 “몽양 여운형과 우사 김규식의 합작운동(1946)은 효과적인 노력, 그 후 백범의 통일운동은 우리 민족이 가야 할 가장 순결하고 애국적인 길이었다”고 했다. 스스로를 백범 계보에 두고자 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여기에는 사후적인 성격 규정의 측면이 있다. 실제 해방기에 장준하가 이 노선에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제 확실히 변했다. 7·4 남북공동성명 직후 장준하가 남긴 다음과 같은 유명한 언급이 있다.
“모든 통일은 좋은가? 그렇다. 통일 이상의 지상명령은 없다. 통일로 갈라진 민족이 하나가 되는 것이며, 그것이 민족사의 전진이라면 당연히 모든 가치 있는 것들은 그 속에 실현될 것이다. 공산주의는 물론 민주주의, 평등, 자유, 번영, 복지 이 모든 것에 이르기까지 통일과 대립되는 개념인 동안은 진정한 실체를 획득할 수 없다. 모든 진리, 모든 도덕, 모든 선이 통일과 대립하는 것일 때는 그것은 거짓명분이지 진실이 아니다.”
민족의 통일 속에 ‘모든 가치 있는 것들’이 실현된다는 말은, 남북의 통일 자체가 지상 과제이자 최우선 과제가 됨을 의미한다. 후일 역사에서 밝혀진 것처럼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은 곧 있을 ‘10월 유신’을 정당화하기 위한 사전 장치에 불과했다. 통일이 지고지상의 과제가 된다면 한국과 북한 사회의 민주화는 차후 문제가 된다. 장준하의 생각은 말하자면 이런 것이었다. ‘일단 통일하고 볼 일이다.’ 역사학에서 ‘선(先)통일 후(後)민주론’으로 분류되는 이런 생각은, 그러나 현실적이기도 어려울뿐더러 논리 이전의 ‘정언명령’으로서 오늘의 관점에서는 수긍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럼에도 ‘모든 통일은 좋은 것’이라고 함은 ‘통일’이 ‘반공’보다 상위 가치에 놓이게 되는 셈이며, 장준하가 이 시기에 이르러 반공주의로부터 벗어났음을 보여주는 표지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5년 전인 1967년 시점만 하더라도 장준하의 생각은 달랐다. 다음의 언급과 비교해보면 그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우리는 지금 북의 공산주의와의 대결 하에 있다. 북괴의 공산독재를 공개 비판할 충분한 환경과 조건을 우리가 갖지 못한다면 우리는 공산주의를 배격할 수 있는 민족적 명분을 상실할 우려도 없는 것은 아니다. 가장 모범적인 민주주의 이념과 민주주의 체제를 분할된 채로나마 남쪽의 이 영토 위에 아름답게 구현시킴이 가장 시급한 민족적 과제이다.”
북한을 명백한 적으로 인식하고 있음은 다음으로 놓더라도,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의 과제 가운데 당연하게도 우선하는 것은 ‘한국사회의 민주화’로 제시돼 있다. 1967년이라면 장준하가 반독재 전선의 가장 첨예한 자리로 나오고 있을 때였다. 이것은 장준하의 민주화 투쟁이 좌파 민족주의와는 전혀 무관한 자리에서 전개됐음을 말해준다.
중국 서주(徐州·현 산둥성 동남부와 창강 북부 장쑤성 일대 옛 행정구역)에서 일본군을 탈출한 장준하 일행이 린취안을 거쳐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정)에 도착했을 때는 그 수가 50명가량으로 불어나 있었다. 일본군 탈출부터 충칭까지 과정에서 이미 이들은 임정 내 세력다툼을 감지하고 있었다. 라오허커우(老河口)의 김원봉 계열 부대에서 세력 확장을 위해 탈출병 50명을 붙잡아 두려는 시도가 있었던 것이다. 여러 사정 끝에 충칭 임정에 도착한 일행의 소감을 장준하는 “기대와는 다른 현실에 대한 실망”이라고 기록했다. 임정 상황이 초라하기 이를 데 없었던 것이다.
우익 민족주의자로서 확고한 사명의식을 갖고 있던 장준하가 해방 직전 벌인 흥미로운 사건 하나가 기록으로 남아 있다. 당시 충칭 임정은 파벌이 난립해 연립정부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상하이를 떠난 후 임정은 파벌별로 흩어져 있다 중국 정부의 요청으로 겨우 ‘모양만의’ 통합을 이룬 상태였다. 파벌들은 각기 정당을 만들어 활동했다. 김구·조소앙의 한국독립당, 김규식·김원봉의 조선민족혁명당, 신익희의 한국혁명당, 그 외에도 서너 개 정당이 난립하고 있었다.
폭탄 발언과 임정 난입 사건
조직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이름뿐인 정당들이었으므로 ‘50명이나 되는’ 장준하 일행에 반색할 수밖에 없었다. 각 파벌이 장준하 일행에 대해 자파 포섭 공작을 벌이는 상황이 벌어졌고, 이때 장준하·김준엽 등의 ‘돌발’ 행동이 일어났다. 장준하가 충칭시 교포 모임에서 임정의 분열상과 졸렬함을 지적하며 “다시 일본군으로 돌아가 항공대에 지원, 충칭 임정 청사를 폭격하고 싶다”는, 말 그대로 ‘폭탄’ 발언을 해 물의를 일으킨 것이다. 이에 그치지 않고, 또 하나의 임정 내 정당을 만들기 위한 경비 조달용 댄스파티에 각목과 화약을 들고 들어가 파티를 무산시키는가 하면, 장준하 일행 일부를 자신들의 파벌로 포섭하려는 신익희 내무부장에게 폭력을 행사하고자 ‘몽둥이’를 든 일행 20여 명을 이끌고 임정 청사에 직접 난입하는 사태를 일으키기도 했다.
김준엽의 ‘장정’에는 임정 청사 난입사건의 사정이 좀 더 정확하게 설명돼 있다. 이범석을 따라 시안(西安)으로 가게 된 장준하와 김준엽 등 19명이 충칭으로의 길을 함께 했던 대원들 사이 단결을 깨뜨린 신익희 내무부장을 ‘규탄’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이범석의 만류로 복귀했지만 일종의 폭력 행사라고 할 수 있었다. 이후 이들은 이범석을 따라 시안의 광복군 제2지대로 가게 된다.
장준하와 김준엽 등이 벌인 임정 난입 사건의 장면들은 매우 흥미로우면서도 몇 가지 의문을 갖게 한다. 먼저, 일제강점기 말 임정이 50명 정도 인원에도 동요하고 우왕좌왕할 만큼 이름뿐인 조직이었는지, 그리고 한국 독립운동사와 정치사에 남아 있는 쟁쟁한 명사들이 아무런 경력도 없는 젊은 청년들에게 왜 이렇게 ‘꼼짝하지’ 못했는가 하는 점이다. 확실한 것은, 이들이 ‘보통 청년’이 아니라 ‘학병’, 즉 젊은 엘리트였다는 사실이다. 특히 ‘우익 학병’은 궤멸에 가까운 일제강점기 말 우익 민족주의 독립운동의 상황에서 상당히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존재였다.
그런데 이런 문제들을 제쳐두더라도 난감한 지점은 남는다. 장준하·김준엽 등의 물리력 행사 자체를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다. 물리력 행사와 관련해 당시 이들이 군 소속이었다는 사실에 문제가 있다. 서주에서 충칭까지 6000리(약 2350km) 길의 도보 행군은 후일 김준엽이 마오쩌둥의 ‘장정(長征)’에 비유한 것처럼 그 자체로 놀라운 의지의 소산이라 할 만하며, 그러한 의지는 임정에 대한 기대와 민족 독립운동에의 자기 사명을 보여주는 것임에 분명하다. 기대와 사명감이 컸던 만큼 실망과 분노가 작지 않았을 것임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들이 정식 군인 신분이었다는 점은 확실히 문제적이다. 이 시기 광복군은 중국군 작전권 하에 있었으며 소속과 계급상 중국 육군 소위였다. 광복군 소속은 임정 아래였지만, 실제로는 장제스의 중국군 지휘 하에 있었던 것이다. ‘정치적인 혼란과 분열이 군인들의 물리력 행사를 정당화할 수 있는가’라는 매우 예민한 문제를 안고 있다.
여러 자료를 근거로 종합해볼 때, 해방 전후 장준하는 전형적인 ‘기독교 반공 우익’에 ‘국가주의자적’인 면모를 갖고 있었다. 흔히 장준하를 백범 김구의 계보를 잇는 존재로 평가하지만, 해방과 귀국 당시 장준하는 이범석계가 분명했다. 먼저, 장준하와 ‘형제 같은’ 사이였던 김준엽이 가장 확실한 이범석계였다. 시안의 광복군 제2지대에서 김준엽은 이범석의 부관으로 근무했다. 김준엽은 언제나 가장 가까운 친구로 장준하를, 가장 존경하는 선배로 이범석을 꼽았다.
반공 국가주의자의 면모
장준하가 해방 후 김구의 비서 자격으로 환국(還國)한 것을 들어 장준하를 김구계로 분류하는 경우가 있지만(이후 장준하 스스로 계보를 자처한 면이 있다), 사실 김구와의 환국은 장준하가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 해방 직후인 1945년 8월 18일 장준하는 김준엽과 함께 이범석을 수행해 서울 여의도 비행장에 내렸다 일본군의 반발로 돌아간 일이 있었고, 김구와의 환국은 한참 후 일이다. 이범석, 장준하, 김준엽 세 사람은 해마다 8월 18일이면 ‘환국’을 기념하는 술자리를 갖곤 했다. 장준하와 김준엽은 자신들의 ‘공식’ 환국일을 이범석과 함께 시도했던 1945년 8월 18일로 하고 싶어 했다.
해방 후 장준하는 이범석의 조선민족청년단(족청)에 가담했다. 족청 연구자로 알려진 후지이 다케시에 따르면, 광복군 제2지대장이었던 이범석이 귀국 후 구상했던 것은 ‘건군(建軍)’이었다. 족청 조직도 그 일환으로 볼 수 있는데, 해방 이전 이미 이범석 휘하에 있었던 장준하가 족청의 조직과 운영에 가담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 시기 장준하의 족청 활동은 단순 가담 수준이 아니었다. 장준하는 족청 핵심기관인 중앙훈련소의 중심인물 중 하나였다(후지이 다케시의 ‘파시즘과 제3세계주의 사이에서’). 당시 족청 중앙훈련소 교무처 요원으로 근무했던 서영훈의 회고에는, 장준하가 초대 교무처장 송면수에 이어 중앙훈련소의 제2대 교무처장으로 왔다고 돼 있다. 공식문서상 기록과 다소 차이가 있지만, 조직 내 장준하의 실질적 비중이 컸음을 증언하고 있다. 해방기 장준하가 ‘민족지상 국가지상’을 최고 이념으로 하는 족청의 중앙훈련소 학생과장(교무처장)이었다는 사실은 중요하게 짚어둘 사실이다. 족청 시절 장준하에 대한 서영훈의 회고를 보자.
“훈련생들이 무기명으로 쓴 논문의 필적을 조사해 누구누구가 공산당 같다고 할 정도로 기독교 신앙과 극우익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족청의 세력 확장 과정에서 상당수 좌익이 들어오자 장준하는 족청을 이탈했다. 김준엽의 회고에는, 해방기 장준하가 이범석의 족청으로부터 이탈한 이유가 서술돼 있다.
“청년단 내의 좌익분자들에 대한 처리 문제로 철기(이범석)와 의견이 맞지 않아 그만두었다고 하는데, 장형의 말에 의하면 좌익불순분자들에게 철기가 포위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장준하를 김구 계열로 보기 어려운 이유는 1948년 남한 단독정부 수립 과정에서도 나타난다. 장준하와 김준엽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찬성했다. 김구, 김규식의 관점, 즉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으로서 분단이 굳어진다는 논리는 찬성할 수가 없었다”.
해방 후 오랜 시간이 지나기까지 장준하는 반공 국가주의자의 일면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장준하가 우익 반공주의라는 포괄적 이념의 우산 아래에서 점차 벗어나기 시작한 것은 대략 1960년대 중반 이후 일로, 이 시기에 이르러 함석헌이나 한신(韓神·한국신학대학) 계열 인사들이 갖고 있던 생각에 조금씩 견인된 것으로 보인다.
통일 지상주의로 이동하다
확고한 우익 반공주의자의 면모를 갖고 있던 장준하가 생각의 변화를 노출한 것은 시간이 한참 흐른 후인 1970년대 들어서였다. 계기는 7·4 남북공동성명이었다.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직후 장준하는 분명한 ‘중도 통일노선’을 표명했다. 해방기 정치노선들을 평가하면서 “몽양 여운형과 우사 김규식의 합작운동(1946)은 효과적인 노력, 그 후 백범의 통일운동은 우리 민족이 가야 할 가장 순결하고 애국적인 길이었다”고 했다. 스스로를 백범 계보에 두고자 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여기에는 사후적인 성격 규정의 측면이 있다. 실제 해방기에 장준하가 이 노선에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제 확실히 변했다. 7·4 남북공동성명 직후 장준하가 남긴 다음과 같은 유명한 언급이 있다.
“모든 통일은 좋은가? 그렇다. 통일 이상의 지상명령은 없다. 통일로 갈라진 민족이 하나가 되는 것이며, 그것이 민족사의 전진이라면 당연히 모든 가치 있는 것들은 그 속에 실현될 것이다. 공산주의는 물론 민주주의, 평등, 자유, 번영, 복지 이 모든 것에 이르기까지 통일과 대립되는 개념인 동안은 진정한 실체를 획득할 수 없다. 모든 진리, 모든 도덕, 모든 선이 통일과 대립하는 것일 때는 그것은 거짓명분이지 진실이 아니다.”
민족의 통일 속에 ‘모든 가치 있는 것들’이 실현된다는 말은, 남북의 통일 자체가 지상 과제이자 최우선 과제가 됨을 의미한다. 후일 역사에서 밝혀진 것처럼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은 곧 있을 ‘10월 유신’을 정당화하기 위한 사전 장치에 불과했다. 통일이 지고지상의 과제가 된다면 한국과 북한 사회의 민주화는 차후 문제가 된다. 장준하의 생각은 말하자면 이런 것이었다. ‘일단 통일하고 볼 일이다.’ 역사학에서 ‘선(先)통일 후(後)민주론’으로 분류되는 이런 생각은, 그러나 현실적이기도 어려울뿐더러 논리 이전의 ‘정언명령’으로서 오늘의 관점에서는 수긍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럼에도 ‘모든 통일은 좋은 것’이라고 함은 ‘통일’이 ‘반공’보다 상위 가치에 놓이게 되는 셈이며, 장준하가 이 시기에 이르러 반공주의로부터 벗어났음을 보여주는 표지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5년 전인 1967년 시점만 하더라도 장준하의 생각은 달랐다. 다음의 언급과 비교해보면 그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우리는 지금 북의 공산주의와의 대결 하에 있다. 북괴의 공산독재를 공개 비판할 충분한 환경과 조건을 우리가 갖지 못한다면 우리는 공산주의를 배격할 수 있는 민족적 명분을 상실할 우려도 없는 것은 아니다. 가장 모범적인 민주주의 이념과 민주주의 체제를 분할된 채로나마 남쪽의 이 영토 위에 아름답게 구현시킴이 가장 시급한 민족적 과제이다.”
북한을 명백한 적으로 인식하고 있음은 다음으로 놓더라도,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의 과제 가운데 당연하게도 우선하는 것은 ‘한국사회의 민주화’로 제시돼 있다. 1967년이라면 장준하가 반독재 전선의 가장 첨예한 자리로 나오고 있을 때였다. 이것은 장준하의 민주화 투쟁이 좌파 민족주의와는 전혀 무관한 자리에서 전개됐음을 말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