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흥순 감독의 ‘위로공단’은 1970~80년대 소위 ‘공순이’로 불리던 여성 공장노동자들에 주목한 다큐멘터리다. 한쪽에선 멸시와 착취가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또 한쪽에선 ‘산업역군’이라는 무의미한 수사(修辭)가 반복될 때다. 화면은 아무 그림 없이 ‘미싱’(재봉틀의 일본말) 소음만 들려주며 열린다. 이어서 수목이 우거진 산, 폐허 같은 석조건물, 불상, 그리고 시커먼 숲속에 있는 두 사람의 그림자가 스틸사진처럼 연속으로 제시된다.
‘위로공단’은 계속 이런 형식을 유지한다. 사실과 추상의 결합이다. 말하자면 사회적 사건을 다루는 리얼한 화면, 그와 관련된 노동자 인터뷰, 그리고 해석이 열려 있는 추상적인 사진이 충돌하는 식이다.
‘위로공단’은 베네치아 비엔날레 미술전에서(영화제가 아니라) 은사자상(개인이 수상할 수 있는 최고상)을 받았는데, 임 감독이 삽입한 다의적인 스틸사진이 수상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사진들은 의미를 단일하게 해석할 수 없는 불행한 과거에 대한 열린 접근이자, ‘위로’의 촉매로 기능한다. 사진의 개입은 마치 진혼 의례 같다.
예를 들어 1970년대 ‘동일방직 사태’를 보자. 노동조합 결성 문제로 여공들이 시위를 벌이자 사측으로부터 사주를 받은 남성 노동자들이 이들에게 ‘똥물’을 뿌리며 폭력을 휘두른 사건이다. 화면에는 작업복을 입은 여공들이 배설물을 뒤집어쓴 채 망연자실 서 있는 광경이 담겨 있다. 광복 70주년을 맞았고 또 경제 기적을 이룬 나라라지만,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 모습에 말을 잃게 되는 순간이다.
곧이어 오늘날 놀이터에서 두 소녀가 눈을 가린 채 가만히 마주 서 있는 모습이 제시된다. 놀이터에서 뛰노는 게 더 어울릴 것 같은 소녀들이 왜 눈을 가렸을까. 못 볼 것을 봤던, 경험했던 비극에 대한 공감의 위로일까. 혹은 그런 경험을 한 소녀들이 바로 곁에 있었는데 세상은 눈을 가린 채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회한의 성찰일까. ‘위로공단’은 이런 식으로 서사 진행을 갑자기 중단하고 해석을 열어놓은 채 관객에게 스스로 생각할 것을 조용히 호소한다. 이럴 때는 우리가 사진을 보는 게 아니라, 사진이 우리를 바라보는 것 같다.
프랑스 철학자 롤랑 바르트가 쓴 ‘카메라 루시다’에 따르면, 사진의 매력은 ‘푼크툼’(찌르는 것)에 있다. 의미를 알 수 없지만 우리 눈을 찌르는 듯한 것이 바로 사진이 가진 매력이란 얘기다. 해석할 수 없는 그 순간부터 사유의 항해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위로공단’에 삽입된 사진들은 우리나라 여성 노동자들의 역사에서 체험한 임 감독의 푼크툼 흔적 같다. 말을 잃어버리게 하는 부조리 앞에서 모든 것을 해석하기보다 황망한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는 식이다.
황망한 마음은 불행하게도 현재까지 연결된다. 멸시의 비극은 과거에 끝난 게 아니라 지금도 노동자들의 죽음을 부르는 어이없는 현실에 닿아 있다. 그러기에 ‘위로공단’에는 나이 차이 나는 두 여성, 곧 언니와 동생이, 또는 어머니와 딸이 눈을 가린 채 출구가 보이지 않는 산속을 휘청휘청 걷는 장면이 반복해 등장한다. 황망한 부조리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위로공단’은 계속 이런 형식을 유지한다. 사실과 추상의 결합이다. 말하자면 사회적 사건을 다루는 리얼한 화면, 그와 관련된 노동자 인터뷰, 그리고 해석이 열려 있는 추상적인 사진이 충돌하는 식이다.
‘위로공단’은 베네치아 비엔날레 미술전에서(영화제가 아니라) 은사자상(개인이 수상할 수 있는 최고상)을 받았는데, 임 감독이 삽입한 다의적인 스틸사진이 수상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사진들은 의미를 단일하게 해석할 수 없는 불행한 과거에 대한 열린 접근이자, ‘위로’의 촉매로 기능한다. 사진의 개입은 마치 진혼 의례 같다.
예를 들어 1970년대 ‘동일방직 사태’를 보자. 노동조합 결성 문제로 여공들이 시위를 벌이자 사측으로부터 사주를 받은 남성 노동자들이 이들에게 ‘똥물’을 뿌리며 폭력을 휘두른 사건이다. 화면에는 작업복을 입은 여공들이 배설물을 뒤집어쓴 채 망연자실 서 있는 광경이 담겨 있다. 광복 70주년을 맞았고 또 경제 기적을 이룬 나라라지만,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 모습에 말을 잃게 되는 순간이다.
곧이어 오늘날 놀이터에서 두 소녀가 눈을 가린 채 가만히 마주 서 있는 모습이 제시된다. 놀이터에서 뛰노는 게 더 어울릴 것 같은 소녀들이 왜 눈을 가렸을까. 못 볼 것을 봤던, 경험했던 비극에 대한 공감의 위로일까. 혹은 그런 경험을 한 소녀들이 바로 곁에 있었는데 세상은 눈을 가린 채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회한의 성찰일까. ‘위로공단’은 이런 식으로 서사 진행을 갑자기 중단하고 해석을 열어놓은 채 관객에게 스스로 생각할 것을 조용히 호소한다. 이럴 때는 우리가 사진을 보는 게 아니라, 사진이 우리를 바라보는 것 같다.
프랑스 철학자 롤랑 바르트가 쓴 ‘카메라 루시다’에 따르면, 사진의 매력은 ‘푼크툼’(찌르는 것)에 있다. 의미를 알 수 없지만 우리 눈을 찌르는 듯한 것이 바로 사진이 가진 매력이란 얘기다. 해석할 수 없는 그 순간부터 사유의 항해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위로공단’에 삽입된 사진들은 우리나라 여성 노동자들의 역사에서 체험한 임 감독의 푼크툼 흔적 같다. 말을 잃어버리게 하는 부조리 앞에서 모든 것을 해석하기보다 황망한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는 식이다.
황망한 마음은 불행하게도 현재까지 연결된다. 멸시의 비극은 과거에 끝난 게 아니라 지금도 노동자들의 죽음을 부르는 어이없는 현실에 닿아 있다. 그러기에 ‘위로공단’에는 나이 차이 나는 두 여성, 곧 언니와 동생이, 또는 어머니와 딸이 눈을 가린 채 출구가 보이지 않는 산속을 휘청휘청 걷는 장면이 반복해 등장한다. 황망한 부조리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