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부터 말하면, 장로회신학대학 조철수 교수의 ‘예수 평전’(김영사 펴냄)은 최근에 만난 가장 지적인 책이다. 국내외 저작을 통틀어도 마찬가지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세계에서 11번째로 아시리아학 박사학위를 받은 저자가 궁금해진다. 그의 강의를 들은 학생들은 “현자와 대화를 나눈 기분”이라고 말한다.
책 한 권의 서평에 이 정도의 상찬은 넘치는 일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900쪽이 넘는 두꺼운 책의 한 줄, 한 글자가 모두 사료 고증과 저자가 흘린 숙고의 땀방울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면 오히려 독자로서 성의가 부족하게 느껴질 정도다. ‘예수 평전’은 ‘사해문서’의 800개 문서 중 1개에 쓰인 하나의 문장에서 출발한다. 바로 ‘하박국서’다. 저자는 하박국서의 “엣세네 공동체에 ‘진리’라고 불리는 유명한 사제가 있었는데 마음이 교만해져서 하나님을 떠났고, 그는 선동자로 몰려 산헤드린 재판에 회부, 고통 속에서 죽어갔다. 그가 새 언약의 공동체를 세운다”라는 구절에 시선을 고정한다. 의문은 진리라고 불린 사악한 사제가 누구냐는 것, 그리고 그 사악한 사제는 왜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하나님을 떠났느냐 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 진리라 불린 사제가 ‘예수’라는 논증을 이끌어낸다. 실제 예수는 ‘나는 빛이요 진리요 사랑이다’라고 말했다.
저자는 이 부분에 기둥을 세우고, 주변에 터를 고르며, 그 위에 지붕을 이었다. 그 과정은 사해문서와 유대교의 역사, 그리고 방대한 사료를 해석하고 인용하며 고증하는 지난한 작업이었을 것이다. 또한 그는 성서에서 역사와 신화, 진실과 표상을 분리하고 인간 예수와 신화 예수를 구분한다. 그렇다고 ‘만들어진 신’의 저자 도킨스나 진보적 역사학자들처럼 기독교와 예수를 발가벗기고 신의 말씀을 인간의 언어로 풀어내는 시도를 한 것은 아니다. 이 책은 기독교를 전복하려 들기는커녕 뜻밖에 예수나 기독교에 거부감을 가진 사람에게서도 경외심과 신앙에 대한 외경을 이끌어내는 힘을 지닌다.
저자는 예수의 이적이나 말씀을 부정하는 것에 바탕을 두지 않고, 예수의 말씀 혹은 행위를 기정사실화하되 그 뜻을 살피고자 했다. 즉, 목사와 신부는 예수의 말씀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를 이른바 ‘성령의 은혜’를 빌려 해석하지만, 저자는 역사와 문헌을 통해 학문적으로 ‘고증한다’. 그래서인지 저자의 견해는 기독교의 소의경전(所依經典)인 성경에 대한 해설서가 아닌, 온갖 지식과 학문의 보고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보자. ‘유다가 은 서른 개로 예수를 팔았다’는 성서 내용에 대한 해석이다. 모세의 율법에 ‘황소가 종을 받으면(죽이면) 그 (종의) 주인에게 은 삼십을 줄 것이고, 황소는 돌로 쳐 죽일 것이다’(출애굽기 21:32절) 같은 조항이 있다. 은화 30개를 받은 사람이 유다이므로 종은 예수를 뜻한다. 황소 주인은 유다가 누군가에게서 받은 은화 30개를 되돌려준 대제사장 가야바, 종을 직접 죽인 황소는 빌라도가 된다. 하지만 여기서 황소와 황소 주인의 관계가 부적절하다. 당시 예수를 사형(종의 죽음)시킬 권한은 대제사장에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다는 누구에게 돈을 받았을까. 빌라도의 주인인 로마 황제에게 받아야 한다. 하지만 로마 황제는 모세의 율법을 따르지 않는 이방인이었으므로 결국 유다는 돈을 받지 못했다.
유다는 종이 죽었는데 그 값을 받지 못한 자신의 불운을 한탄했다. 다만 예수의 깨끗한 피에 대한 대가를 자신이 짊어져야 했다. 제사장들은 유다에게 스스로 알아서 하라고 말한다(마태복음 27장 4절). 결국 유다는 자살한다. 빌라도는 예수의 십자가 판결 7~8년 후 총독의 권한을 잃고 로마로 송환된다. 그리고 이는 율법에서 황소가 죽은 것으로 은유된다. 결국 빌라도는 예수가 사형당한 십자가 위 명패에 ‘유대인의 왕’이라고 명기함으로써 ‘은 서른 개’의 값어치를 대신했다.
책 한 권의 서평에 이 정도의 상찬은 넘치는 일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900쪽이 넘는 두꺼운 책의 한 줄, 한 글자가 모두 사료 고증과 저자가 흘린 숙고의 땀방울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면 오히려 독자로서 성의가 부족하게 느껴질 정도다. ‘예수 평전’은 ‘사해문서’의 800개 문서 중 1개에 쓰인 하나의 문장에서 출발한다. 바로 ‘하박국서’다. 저자는 하박국서의 “엣세네 공동체에 ‘진리’라고 불리는 유명한 사제가 있었는데 마음이 교만해져서 하나님을 떠났고, 그는 선동자로 몰려 산헤드린 재판에 회부, 고통 속에서 죽어갔다. 그가 새 언약의 공동체를 세운다”라는 구절에 시선을 고정한다. 의문은 진리라고 불린 사악한 사제가 누구냐는 것, 그리고 그 사악한 사제는 왜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하나님을 떠났느냐 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 진리라 불린 사제가 ‘예수’라는 논증을 이끌어낸다. 실제 예수는 ‘나는 빛이요 진리요 사랑이다’라고 말했다.
저자는 이 부분에 기둥을 세우고, 주변에 터를 고르며, 그 위에 지붕을 이었다. 그 과정은 사해문서와 유대교의 역사, 그리고 방대한 사료를 해석하고 인용하며 고증하는 지난한 작업이었을 것이다. 또한 그는 성서에서 역사와 신화, 진실과 표상을 분리하고 인간 예수와 신화 예수를 구분한다. 그렇다고 ‘만들어진 신’의 저자 도킨스나 진보적 역사학자들처럼 기독교와 예수를 발가벗기고 신의 말씀을 인간의 언어로 풀어내는 시도를 한 것은 아니다. 이 책은 기독교를 전복하려 들기는커녕 뜻밖에 예수나 기독교에 거부감을 가진 사람에게서도 경외심과 신앙에 대한 외경을 이끌어내는 힘을 지닌다.
저자는 예수의 이적이나 말씀을 부정하는 것에 바탕을 두지 않고, 예수의 말씀 혹은 행위를 기정사실화하되 그 뜻을 살피고자 했다. 즉, 목사와 신부는 예수의 말씀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를 이른바 ‘성령의 은혜’를 빌려 해석하지만, 저자는 역사와 문헌을 통해 학문적으로 ‘고증한다’. 그래서인지 저자의 견해는 기독교의 소의경전(所依經典)인 성경에 대한 해설서가 아닌, 온갖 지식과 학문의 보고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보자. ‘유다가 은 서른 개로 예수를 팔았다’는 성서 내용에 대한 해석이다. 모세의 율법에 ‘황소가 종을 받으면(죽이면) 그 (종의) 주인에게 은 삼십을 줄 것이고, 황소는 돌로 쳐 죽일 것이다’(출애굽기 21:32절) 같은 조항이 있다. 은화 30개를 받은 사람이 유다이므로 종은 예수를 뜻한다. 황소 주인은 유다가 누군가에게서 받은 은화 30개를 되돌려준 대제사장 가야바, 종을 직접 죽인 황소는 빌라도가 된다. 하지만 여기서 황소와 황소 주인의 관계가 부적절하다. 당시 예수를 사형(종의 죽음)시킬 권한은 대제사장에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다는 누구에게 돈을 받았을까. 빌라도의 주인인 로마 황제에게 받아야 한다. 하지만 로마 황제는 모세의 율법을 따르지 않는 이방인이었으므로 결국 유다는 돈을 받지 못했다.
유다는 종이 죽었는데 그 값을 받지 못한 자신의 불운을 한탄했다. 다만 예수의 깨끗한 피에 대한 대가를 자신이 짊어져야 했다. 제사장들은 유다에게 스스로 알아서 하라고 말한다(마태복음 27장 4절). 결국 유다는 자살한다. 빌라도는 예수의 십자가 판결 7~8년 후 총독의 권한을 잃고 로마로 송환된다. 그리고 이는 율법에서 황소가 죽은 것으로 은유된다. 결국 빌라도는 예수가 사형당한 십자가 위 명패에 ‘유대인의 왕’이라고 명기함으로써 ‘은 서른 개’의 값어치를 대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