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박경철</B><bR>의사
머물러도 좋을 자리에서 시도되는 변신은 늘 아름다운 것이다. 그런데 필자는 이 사람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탤런트, 배우로서의 이미지보다 어느 신문에 난 한 줄짜리 인터뷰 기사가 먼저 떠오른다. 기사 말미에 이런 문답이 오갔다.
기자 : 책을 참 좋아하신다고 들었어요.
김수미 : 취미를 넘어 중독된 거지. 최근 일본의 하이쿠 모음집인 ‘한 줄도 너무 길다’란 책을 보고 있거든, 읽을 때마다 소름이 끼쳐. ‘내가 죽으면 술통 밑에 묻어줘, 운이 좋으면 밑동이 샐지도 몰라’란 구절이랑 ‘죽이지 마소, 파리가 저렇게 빌잖소’라는 걸 봐. 관찰, 함축…. 전율을 느끼게 된다니까.
김수미 씨가 거론한 ‘한 줄도 너무 길다’(이레 펴냄)는 좀 많은 설명이 필요한 책이다. 먼저 언어라는 것에 대한 얘기가 선행돼야 한다. 사람의 말은 기본적으로 수식이 필요하고, 사람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려면 말의 포장이 필요하다. 원래 말이란 ‘개념괴(槪念塊)’다. 그래서 말의 맛은 촌철살인에 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거절당했을 때 구구절절 하소연을 하면 필경 만회의 기회가 없지만, 말 한마디 없이 상대를 바라보다가 “기다릴게요” 하고 일어서면 다음 기약이라도 생기는 법. 그래서 옛사람들은 이런 절제와 함축의 맛을 시가와 운율로 표현했고, 불립문자(不立文字)를 주창하는 불가(佛家)에 이르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법(法)이 무엇입니까?”라고 묻는 제자가 있다 치자. 하수라면 “법이란 아상(我相)을 버리고 어쩌고저쩌고…” 주절주절하지만, 고수는 가만히 쳐다보다 벼락처럼 “할(喝)”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는 주장자로 어깻죽지를 내려치면 그만이다.
이때 깜짝 놀란 ‘이 순간’, 그 무념의 세계가 바로 자신이 애타게 찾던 것임을 알아차린 제자는 나중에라도 정법을 찾을 것이고, “아이고, 놀래라” 하고는 어리석게 또 다음 ‘말씀’을 기다리는 제자는 평생 선방에 드나들다 허무한 일생을 마치고 말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일본에는 그들의 축소지향적인 성격과 어울리는 압축 형식의 글이 발달했는데, 그중 대표격이 ‘하이쿠(俳句)’라는 운문이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시조 같은 것인데 여기에는 몇 가지 규칙이 있다.
사계(四季)를 상징하는 ‘기고(季語)’라는 구절을 반드시 넣어야 하고 영원, 피안 등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주제를 담되 그것을 표현할 때는 시정에서 쓰는 평범한 말이나 익살스러운 단어를 택한다는 것. 그 결과 하이쿠 형식을 빌린 글은 평이한 단어의 연속이지만, 말과 말이 불협화음을 이루거나 말이 연결되는 형식에서 의외성이 도드라져 최종적으로는 역설과 해학이 난무하는 글이 된다.
예의 김수미 씨가 말한 “죽이지 마소. 파리가 저렇게 빌잖소” 같은 ‘절창(絶唱)’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평범한 말과 말이 이어져 하이쿠가 되고 그 글은 어떤 언설로도 표현할 수 없는, 깊은 사색을 이끌어내는 무엇이 된다.
하이쿠를 다룬 책은 국내에 몇 종이 있지만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문제는 책의 하이쿠 모두가 쓸 만한(?) 구절을 담고 있지는 않다는 점. 하지만 일부 유명 하이쿠는 비록 일본 사람이 쓴 시가지만, 한 번 들으면 머릿속을 맴도는 마력이 있다.
일본의 하이쿠 애호가가 수백만명에 이르는 이유가 거기 있다. 김수미 씨가 말한 구절은 고바야시 잇사(1763~1872)의 ‘팔번일기(八番日記)’에 나오는 구절을 류시화가 변역(變譯)한 것이고, 원문에 따르면 “죽이지 마라, 파리가 손으로 빌고 발로 빈다”라고 하는 것이 정확하다. 이 하이쿠에서 계절을 상징하는 ‘기고’는 여름이다. 파리는 여름벌레, 즉 하충(夏蟲).
따라서 이 구절의 기고는 파리이며, 이는 하이쿠가 요구하는 유일한 형식인 셈이다. 어쨌거나 파리가 손을 비비는 것을 “살려달라고 싹싹 빈다”는 식의 익살로 풀어낸 것은 놀라운 해학인데, 여기서 한발 나아가면 우리가 사물을 볼 때도 관찰하기에 따라서, 그것을 받아들이기에 따라서 얼마나 다른 장면이 만들어지는지를 알 수 있다.
좀더 거창하게 생각하면 미물일망정 생명을 귀히 여기는 마음과 연결된다. 이것이 하이쿠의 매력이고, 바쁜 연예활동 중에도 하이쿠를 암송하는 김수미가 더 매력적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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