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일요일 아침, 운동을 마치고 한국-베네수엘라 WBC 준결승전을 보기 위해 서둘러 집으로 향했습니다. 10분쯤 여유가 있기에 야구중계 보며 곁들일 군것질거리를 사러 슈퍼마켓에 들렀습니다. 불황이라선지 끼워주고 깎아주는 게 많더군요. 이것저것 담다 보니 장바구니를 금방 채웠습니다. 그래봐야 몇만원(새우깡, 양파링을 20만원어치쯤 살 리는 없으니까요), 무심하게 신용카드를 긋고 나오는데 불현듯 꼬리를 무는 생각. 내가 만약 내일 직장을 잃는다면? 그래서 다음 달 25일에 월급이 들어오지 않는다면? 그래서 27일에 신용카드 대금을 결제할 수 없다면?… 헐값에 알짜기업 전환사채를 물려줄 부모도, 재력가더러 “마음 크게 먹고 한번 도와주라”며 5억짜리 라면박스 챙겨주게 할 고향선배도 없으니 새우깡 한 봉지 앞에선들 ‘무심’할 수가 없겠지요. 실직은 그렇듯 구차하고 막막한 실존으로 다가설 겁니다.
그날 야구는 정말 재미있더군요. 날렵한 우리 청년들은 톱니바퀴 물고 돌아가듯 정교한 몸놀림으로 메이저리그 거포들을 농락했습니다. 그 놀라운 조직력에 감탄하면서 또 꼬리를 무는 생각. 내가 만약 내일 실직한다면? 그래서 너무나 익숙한 톱니바퀴 조직에서 튕겨져 나간다면? 그래서 평생 처음 ‘무소속 FA’로 내던져진다면?… 재수 않고 입학, 기말시험 직후 입대, 27개월 군복무, 복학 직후 제대, 기말시험 직후 입사, 이듬해 2월 졸업, 이후 20년간 한 직장 근무. 단 하루도 조직을 떠나서는 살아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실직, 곧 실적(失籍)은 가위눌린 듯 무기력한 진공(眞空)의 실존으로 찾아들 겁니다.

妄言多謝. ‘계절’ 탓인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