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 최고급 와인 중 하나인 세냐 2005.
늘 하던 대로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찾은 곳은 와인 코너. 칠레이니 자국의 와인값은 싸리라 기대하면서. 하지만 웬걸, 최고급 와인 알마비바가 우리 돈으로 14만원이다. 서울이나 다름없었다. 고급 와인에 대한 상인들의 가격 정책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슈퍼마켓의 와인 코너는 짐작대로 저렴했다.
1980년대부터 와인 태동 … 태양빛에 그을린 흙냄새 스며들어
여름의 시작은 우리와 반대로 12월. 여행 기간 낮기온이 30℃ 넘는 무더위로 온몸이 달아오른다. 해가 지는 밤 9시경이면 기온이 뚝 떨어져 밤에는 두꺼운 이불을 덮어야 한다. 이런 극심한 주야간 기온차는 포도를 익히는 데 더없이 좋은 조건이다. 사실 기온만 높다고 해서 포도가 잘되지는 않는다. 이렇듯 기후조건이 좋음에도 1980년대에야 와인산업이 태동했다고 보는 이유는 그저 심고 거두기만 한 탓이다. 제아무리 좋은 포도도 양조장 위생이 나쁘거나 양조 과정이 실수투성이라면 제대로 된 와인을 만들 수 없다.
칠레는 1979년부터 외국 와이너리들이 양조장을 변혁시켜 한 번 도약했다. 90년대엔 포도밭의 중요성을 깨닫게 돼 또 한 번 도약했다. 이제 칠레는 지역차를 인식한 양조가들에 의해 다시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여름에는 비가 전혀 내리지 않는다. 포도밭의 지표는 마를 대로 말라 차를 타고 지나노라면 뿌연 흙바람이 일어난다. 구두에 내려앉은 흙먼지는 길가에 심은 포도엔 아예 쌓인다. 비라도 오면 씻겨나갈 텐데, 결국 우리가 그 흙먼지를 먹게 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도시의 흙먼지와는 다른, 비가 오면 진흙으로 뭉쳐지는 롬(loam·양토)이다. 세냐의 와인메이커 에드가르드 카터는 “먼지가 포도알에 스트레스로 작용하기 때문에 먼지가 나지 않도록 밭길 바닥엔 가지치기한 포도나무 가지를 토막내 뿌린다”고 전한다. 칠레 와인의 향기 밑바닥엔 이런 흙냄새, 먼지냄새가 깔려 있을지 모른다.
옷가지와 가방을 햇빛 쐬려고 내놓았다 얼마 후 거두면 약간 타는 듯한 냄새가 난다. 바로 칠레 햇빛 냄새다. 태양에 그을린 흙에서 나는 냄새는 포도에도 스며들어 결국 와인의 향기로 바뀐다.
칠레 최고급 와인에 속하는 세냐(Sena) 2005는 보르도 스타일의 와인이다. 풍성하고 복합적인 향기가 잔에 가득하다. 블랙커런트, 블루베리, 바닐라, 감초가 보인다. 여러 겹에 쌓인 비단결 같은 감촉이 입 안을 어루만져 삼키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세냐는 로버트 몬다비와의 합작을 청산한 에두아르드 채드윅의 단독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