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항공의 퍼스트 클래스에서 기내식으로 제공되는 비빔밥.
한 끼의 식사는 이제 단순히 배를 채우는 차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스파게티와 피자를 통해 이탈리아를 친근하게 느낀다. 베트남과 멕시코는 각기 쌀국수와 나초를 통해 우리에게 다가왔다. 이처럼 하나의 음식은 한 국가를 소개하는 훌륭한 문화대사 역할을 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음식, 한국 음식은 어떨까. 해외 각국 사람들도 우리가 나초를 먹으며 멕시코를 상상하듯 불고기나 김치, 콩나물국을 먹으며 한국을 떠올릴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식은 과거에 비해 상당히 많이 알려져 있다. 일본을 비롯한 적지 않은 지역에 김치가 수출되고 있으며 비빔밥은 미국에서 건강식으로 각광받고 있다. 그러나 중국 음식이나 일본 음식에 비하면 한식이 차지하는 자리는 아직도 미미하다.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상이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처지기 때문에 음식도 덜 알려졌다고 한다면 할 말이 없다. 하지만 한국보다 후진국으로 분류되는 인도 태국 베트남 멕시코의 음식들도 세계 각지에서 인기를 얻고 있다.
인도·태국·베트남, 음식으로는 이미 ‘선진국’
대미 수출용 김치샐러드. 양념과 발효과정을 한국식과 다르게 해 자극적인 맛을 줄였다.
“뉴욕에서 먹으나 베이징에서 먹으나 맥도널드 햄버거 맛은 똑같습니다. 세계화를 위해서는 한식도 이처럼 요리법과 맛이 표준화되어야 하는 거죠. 밀을 주식으로 하고 오븐을 쓰는 서양 음식은 온도와 양을 정확하게 맞추지 않으면 조리가 되지 않고 타버립니다. 그래서 자연히 ‘쇠고기 450g, 180℃에서 20분간 가열’ 하는 식으로 정확한 요리법이 확립되어 있죠. 그러나 한식은 ‘물을 자작하게 붓고 푹 삶는다’ 하는 식으로 조리법이 모호해요. 자연히 하는 사람에 따라 맛이 달라질 수밖에 없죠. 이렇게 되면 제품의 고유 이미지를 형성시킬 수 없고 상품화할 수도 없는 겁니다.”
한교수는 한식 중에서 비빔밥을 가장 세계화할 가능성이 높은 음식으로 꼽았다. 때문에 비빔밥을 비롯한 한식의 조리법을 표준화하는 작업이 절실하다는 것. 또 샐러드에 첨가하는 소스가 여러 가지이듯 비빔밥도 고추장 하나로만 비벼 먹을 게 아니라 여러 가지 양념장을 만들어 다양한 기호에 맞추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CJ 주식회사 홍보실의 김태성 과장 역시 세계 시장에 내놓을 만한 한국 음식으로 비빔밥을 든다. “세계인의 음식이 되려면 햄버거나 피자처럼 조리하기 쉽고 어디서나 편하게 먹을 수 있는 간편한 음식이 좋습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불고기 같은 음식은 좀 복잡하게 느껴지죠. 하지만 비빔밥은 요리법을 표준화하기 쉽고 각국의 재료에 맞게 응용도 가능합니다.”
서울 중구 ‘한국의 집’에서 열린 한국 김치 담그기 행사에서 김치를 맛보는 일본인 관광객(위)과 캐나다에 수출되는 한국산 김치.
이 같은 김치의 선전에는 일본과의 ‘김치 분쟁’에서 승리한 것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2000년 2월, ‘뉴욕타임스’에 별난 기사가 하나 실렸다. ‘배추라고 다 똑같은 배추냐?’라는 제목의 이 기사는 김치 종주국 자리를 놓고 한국과 일본이 갈등을 빚고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실제로 당시 한국과 일본은 김치 종주국 자리를 놓고 물밑 분쟁을 벌이는 중이었다. 일본의 ‘기무치’는 젓갈을 넣지 않은 겉절이에 가까워 발효음식인 한국 김치와는 엄연히 차이가 있다. 김치 종주국 자리를 둘러싼 이 분쟁은 유엔 산하의 국제식품규격위원회(CODEX)가 2001년 7월 ‘Kimchi’라는 이름으로 한국의 김치를 국제 규격으로 공인해줌으로써 한국의 승리로 끝났다. 이때부터 김치 종주국임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한국 김치의 수출이 급등한 것. 김치 수출업체인 ‘종가집’ 해외마케팅팀의 박진영씨는 “월드컵 등 외부적인 요인들도 있으나 궁극적으로는 외국인들의 입맛이 김치에 길들여진 것이 김치 수출 급등의 가장 큰 요인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그러나 문제는 김치가 베트남의 쌀국수, 일본의 초밥처럼 한 끼 식사가 되는 일품요리가 아니라는 데에 있다. 김치업계가 ‘김치를 1억 달러어치 수출할 수는 있지만 2억, 3억 달러어치를 수출하기는 어렵다’고 전망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농수산물유통공사가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김치찌개, 김치볶음밥, 두부김치, 김치버거 등 다양한 ‘김치요리’를 개발하고 있지만 아직 뚜렷한 히트작이 없는 상황이다.
한국 음식의 세계화를 위해서는 비빔밥과 김치의 수출 외에도 중요한 요소가 하나 있다. 바로 된장 간장 고추장 등 장류의 보급. 이미 간장과 된장은 일본 제품이 세계시장을 점유하다시피 한 상태다. 그러나 일본도 고추장에는 아직 손을 뻗치지 못하고 있다. CJ 주식회사 김태성 과장은 “고추장을 멕시코의 타바스코나 살사 소스처럼 ‘매운 소스’로 개발하면 충분히 세계 시장에 수출할 수 있다고 본다”며 갖가지 소스로 응용할 수 있는 장류 시장이 김치나 비빔밥 등 완제품 시장보다 더 큰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전망했다.
유럽 여러 나라를 다녀보면 각 나라마다 중국음식의 맛이 조금씩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각국의 입맛에 맞춰 변형된 중국 음식인 셈. 김치업계 역시 일본에 수출할 때는 국내 소비용 김치보다 ‘덜 맵고 더 달게’ 만든다. 이처럼 한식을 해외에 보급하기 위해서는 외국인들의 입맛을 구체적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다.
요리연구가 최신애씨는 “보통 발효음식이 외국인의 입맛에 안 맞을 거라고 걱정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그렇지 않다. 서양인들은 발효음식인 태국 음식을 세계 5대 음식의 하나로 꼽을 정도로 발효음식에 익숙하다”라고 말한다.
“외국 손님에게 한식을 대접할 때는 우리 원형을 잃지 않되 외국인들의 입맛에 맞게끔 조금씩 변화를 주는 것이 좋습니다. 예를 들자면 불고기는 물을 많이 넣어 양념을 담백하게 해주고 고추장을 넣은 돼지불고기는 고추장에 케첩을 섞는 식으로 변화를 주는 거죠. 또 신맛을 내려면 식초 대신 레몬즙을 넣는 것이 좋습니다.” 최씨는 구절판 떡갈비 등 우리 음식의 맛은 충분히 경쟁력이 있지만 식기나 담아내는 방법 등에서 아이디어가 부족한 것이 한식의 이미지를 떨어뜨린다고 지적했다.
한 나라의 음식은 곧 나라의 정체성과 연결된다. 세계 어디서나 초밥은 고급음식으로 인식되어 있다. 세계인들은 비싼 음식, 아무나 못 먹는 음식인 초밥을 통해 일본이라는 국가 자체를 비싸고 고급스러운 국가로 인식하는 것이다. 음식문화의 수출을 위해 국가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한식의 수출을 위한 우리 정부의 노력은 아직 미미한 실정이다. 김치 종주국이라지만 태권도의 국기원처럼 김치를 대표할 만한 ‘김치종원’이 있는 것도 아니다. 비빔밥의 보급 역시 국가적인 마케팅과 홍보가 필요한 부분이지만 ‘비빔밥의 세계화’를 주관하는 정부기관 역시 없다. 한 음식전문가는 “우리보다 훨씬 후진국인 베트남의 쌀국수가 전 세계적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보면 가능성과 안타까움을 동시에 느낀다”고 털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