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동해부인(東海夫人), 서해부인(西海夫人), 남해부인(南海夫人)을 찾아 제주를 고망쥐처럼 드나들었지만 전복죽 맛으로 친다면 중문 성천 포구에 있는 ‘중문 해녀의 집’(064-738-9557)전복죽 맛이 단연코 일품이다. 숭숭 썰어낸 살코기가 씹히는 맛도 향긋하며 아삭거릴 정도다. 감히 ‘남해부인’이라 할 만하다.
‘먼 길 오젠 허난 속아수다’
‘마음 편히 쉬당 잘 갑서예’
중문 민속촌 씨 빌리지 102호실 거실 벽에 새겨진 문구다. ‘속아수다’는 ‘수고하셨습니다’의 방언이다. 제주 여행 3박4일 중 1박은 씨 빌리지 민속가옥에서 자고 갈 만하다. 평일에 오면 10만 원쯤에 독채를 쓸 수 있거니와 바닷가의 분위기를 한껏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씨 빌리지 바로 아래에 ‘중문 해녀의 집’이 있고 성천포구와 몽돌밭이 있다. 또 활어집 ‘이어도’(이원화, 011-739-6845)가 있어 옥돔구이나 옥돔 미역국 또는 간단한 일식을 들 수 있다.
거대한 국제회의장 건물을 짓고 있어 마음에 걸리지만, 어쨌든 중문단지 안에서는 바다로 터져 있고, 답답한 호텔촌에 있는 것보다는 바닷가를 거닐 수 있는 최고의 산책로가 있어 좋다. 해금강 절벽 같은 주상절리대의 기기묘묘한 ‘지삿개’까지는 아직도 포장하지 않은 길이 나 있다. 겨울 저녁이면 이곳 해녀의 집에 앉아 전복죽(1인분 1만 원)을 들며 송악산에 걸리는 저녁 낙조가 물드는 것을 보는 것이 너무나 좋다. 이럴 때는 죽죽녀(竹竹女)가 곁에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함을 한(恨)한다. 돌낙지 한 접시라도 해야 하는 건데 그렇지 못함을 한한다.
지는 해 좋다 / 지는 해 좋다 / 볕바른 창가에 앉은 여자 / 눈 밑에 가늘은 잔주름을 만들며 / 웃고 있다. 나태주 시인의 ‘지는 해 좋다’를 전반부만 인용한 것인데 ‘지는 해 좋다’의 반복구(句)는 어쩔 수 없이 이곳에 와서 내가 다시 얹는다. 가파도 그만, 마라도 그만, 두 개의 섬이 낙조에 젖어 화반(花盤)처럼 앉았고, 사계리 앞 바다의 형제섬이 그 화반 속에서 피어 오른 연꽃 두 송이처럼 환하다. 이곳에서야말로 맛과 멋과 정서가 어우러져 일체의 세계를 지향한다. 몽돌밭에 물발이 서고 물까마귀 같은 잠수녀들이 물구덕을 지고 올라온다. 마을 어촌계에서 공동으로 관리하는 해녀의 집 잠녀(潛女)들이다.
이 해녀의 집은 한 달 3교대로 하루 3명씩 조를 짜 주방을 도맡고 있다. 이처럼 전복을 직접 따오는 것도 상군(나이 많은 잠녀)들의 몫이다. 꿩 새기(꿩알) 같은 나 어린 비바리들의 청청한 숨비소리가 아니라 목이 쇤 물까마귀 같은 망다리 숨비소리인지라 옛날의 정서와는 사뭇 다르다. 밀집한 호텔촌의 절벽 밑에 아직도 이런 풍경이 해묵은 액자처럼 걸려 있는 건 고마운 일이다. 이 자체만으로도 전복죽 맛은 별미다.
부모가 늙어지면 모든 권리를 자식에게 넘겨주고 ‘큰 방’ 또는 ‘큰 채’를 아들에게 양보하고 작은 채, 즉 ‘모커리’라 하는 별채로 옮겨 ‘독립’을 선언하는 제주의 늙은이들 모습 또한 이 액자 같은 풍경일지라도 얼마나 아름다운 삶인지 모르겠다. 가끔은 물밑에 숨겨둔 알짜 전복도 따다가 큰 채의 아들내외에게 건네곤 하리라. 도시를 떠도는 독거(獨居) 노인들과 달리 60∼70대의 잠녀들은 아직도 ‘싱싱’하기만 하다. 따라서 제주의 고령화 인구란 있을 수 없다. 이것이 ‘삼다’(三多)에 길들여진 ㅈ·냥 정신의 아름다움이다.
여름이면 밤 11시30분까지 문을 열지만 겨울이면 아직 노을이 사위지 않은 6시30분에도 문을 닫는 곳이 해녀의 집이다. 밤샘을 해도 모자랄 판인데 세상은 또 이쯤 달라진다. 오분작을 갈아 죽을 쑤는 육지의 어느 전복죽집에 비하면 이런 정직성이 해안가의 ‘모커리’라 하는 낡은 풍경 속에 숨어 있어 아직도 훈훈한 제주 인심은 살아 있음을 느낀다.
‘먼 길 오젠 허난 속아수다’
‘마음 편히 쉬당 잘 갑서예’
중문 민속촌 씨 빌리지 102호실 거실 벽에 새겨진 문구다. ‘속아수다’는 ‘수고하셨습니다’의 방언이다. 제주 여행 3박4일 중 1박은 씨 빌리지 민속가옥에서 자고 갈 만하다. 평일에 오면 10만 원쯤에 독채를 쓸 수 있거니와 바닷가의 분위기를 한껏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씨 빌리지 바로 아래에 ‘중문 해녀의 집’이 있고 성천포구와 몽돌밭이 있다. 또 활어집 ‘이어도’(이원화, 011-739-6845)가 있어 옥돔구이나 옥돔 미역국 또는 간단한 일식을 들 수 있다.
거대한 국제회의장 건물을 짓고 있어 마음에 걸리지만, 어쨌든 중문단지 안에서는 바다로 터져 있고, 답답한 호텔촌에 있는 것보다는 바닷가를 거닐 수 있는 최고의 산책로가 있어 좋다. 해금강 절벽 같은 주상절리대의 기기묘묘한 ‘지삿개’까지는 아직도 포장하지 않은 길이 나 있다. 겨울 저녁이면 이곳 해녀의 집에 앉아 전복죽(1인분 1만 원)을 들며 송악산에 걸리는 저녁 낙조가 물드는 것을 보는 것이 너무나 좋다. 이럴 때는 죽죽녀(竹竹女)가 곁에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함을 한(恨)한다. 돌낙지 한 접시라도 해야 하는 건데 그렇지 못함을 한한다.
지는 해 좋다 / 지는 해 좋다 / 볕바른 창가에 앉은 여자 / 눈 밑에 가늘은 잔주름을 만들며 / 웃고 있다. 나태주 시인의 ‘지는 해 좋다’를 전반부만 인용한 것인데 ‘지는 해 좋다’의 반복구(句)는 어쩔 수 없이 이곳에 와서 내가 다시 얹는다. 가파도 그만, 마라도 그만, 두 개의 섬이 낙조에 젖어 화반(花盤)처럼 앉았고, 사계리 앞 바다의 형제섬이 그 화반 속에서 피어 오른 연꽃 두 송이처럼 환하다. 이곳에서야말로 맛과 멋과 정서가 어우러져 일체의 세계를 지향한다. 몽돌밭에 물발이 서고 물까마귀 같은 잠수녀들이 물구덕을 지고 올라온다. 마을 어촌계에서 공동으로 관리하는 해녀의 집 잠녀(潛女)들이다.
이 해녀의 집은 한 달 3교대로 하루 3명씩 조를 짜 주방을 도맡고 있다. 이처럼 전복을 직접 따오는 것도 상군(나이 많은 잠녀)들의 몫이다. 꿩 새기(꿩알) 같은 나 어린 비바리들의 청청한 숨비소리가 아니라 목이 쇤 물까마귀 같은 망다리 숨비소리인지라 옛날의 정서와는 사뭇 다르다. 밀집한 호텔촌의 절벽 밑에 아직도 이런 풍경이 해묵은 액자처럼 걸려 있는 건 고마운 일이다. 이 자체만으로도 전복죽 맛은 별미다.
부모가 늙어지면 모든 권리를 자식에게 넘겨주고 ‘큰 방’ 또는 ‘큰 채’를 아들에게 양보하고 작은 채, 즉 ‘모커리’라 하는 별채로 옮겨 ‘독립’을 선언하는 제주의 늙은이들 모습 또한 이 액자 같은 풍경일지라도 얼마나 아름다운 삶인지 모르겠다. 가끔은 물밑에 숨겨둔 알짜 전복도 따다가 큰 채의 아들내외에게 건네곤 하리라. 도시를 떠도는 독거(獨居) 노인들과 달리 60∼70대의 잠녀들은 아직도 ‘싱싱’하기만 하다. 따라서 제주의 고령화 인구란 있을 수 없다. 이것이 ‘삼다’(三多)에 길들여진 ㅈ·냥 정신의 아름다움이다.
여름이면 밤 11시30분까지 문을 열지만 겨울이면 아직 노을이 사위지 않은 6시30분에도 문을 닫는 곳이 해녀의 집이다. 밤샘을 해도 모자랄 판인데 세상은 또 이쯤 달라진다. 오분작을 갈아 죽을 쑤는 육지의 어느 전복죽집에 비하면 이런 정직성이 해안가의 ‘모커리’라 하는 낡은 풍경 속에 숨어 있어 아직도 훈훈한 제주 인심은 살아 있음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