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국 맨체스터대와 공동연구… ‘하프 뫼비우스’ 구조 지닌 분자 합성

하프 뫼비우스 분자는 탄소 원자(회색)와 염소 원자(녹색)로 이뤄져 있다. 파란색과 흰색 영역은 추가된 전자의 파동함수 분포를 나타낸다. IBM 연구소·맨체스터대 공동연구진
무한대를 상징하는 뫼비우스의 띠에 과학자들이 오랫동안 매료된 까닭은 그 독특한 기하학적 구조 때문이다. 띠 한쪽을 반 바퀴(180도) 비틀어 이어 붙이면 앞뒷면 구분이 사라지고, 그 표면을 따라 이동하는 방식도 달라진다. 과학자들이 오래전부터 이 기묘한 구조를 분자 세계로 끌어오려 한 것도 이런 특성 때문이다.
분자 속 구현한 ‘하프 뫼비우스’
분자 안에서 전자는 한 지점에 고정되지 않고 파동으로 퍼져 있다. 이 파동 분포가 분자 성질을 결정하는데, 특히 고리형 분자에서는 평면적인지, 비틀려 있는지에 따라 전자 흐름이 크게 달라진다. 그래서 화학자들은 비틀린 구조를 이용해 기존과는 다른 성질을 지닌 분자를 만들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해왔다.이런 상상을 실제 분자에서 구현한 연구 결과가 3월 국제학술지 사이언스에 실렸다. IBM 공동연구진은 전자 궤도함수의 위상이 고리를 따라 90도씩 꼬이며 연결되는 ‘하프 뫼비우스’ 전자구조를 지닌 분자를 합성했다. 그 결과 겉모양만 뫼비우스 띠를 닮은 것이 아니라, 전자 상태 자체가 실제로 비틀린 연결 방식을 가진다는 점을 확인했다.
연구진은 탄소 13개와 염소 2개가 둥글게 이어진 고리형 분자 C₁₃Cl₂를 만들었다. 미리 합성한 전구체를 초고진공·극저온의 NaCl(염화나트륨) 표면에서 원자 단위로 조립하고, 주사터널링현미경(STM)과 원자힘현미경(AFM)으로 구조 및 전자 상태를 확인했다. 이어 IBM의 양자컴퓨터로 전자구조를 시뮬레이션한 뒤 그 결과를 실험 자료와 비교해 하프 뫼비우스 전자구조가 실제로 구현됐음을 검증했다.
하프 뫼비우스 분자에서는 전자 상태가 고리를 따라 퍼지며 나선형으로 꼬인 연결을 이룬다. 고리를 한 바퀴 따라갈 때마다 전자 상태 위상이 90도씩 바뀌고, 네 단계 반복 뒤에야 비로소 처음 주기성을 되찾는다. 전자가 실제로 고리 주위를 네 바퀴 돈다는 것은 아니다, 보통의 고리형 분자보다 전자 상태 반복 주기가 훨씬 길다는 의미다.
또한 연구진은 이런 전자구조가 고정된 하나의 형태가 아니라, 서로 반대 방향으로 꼬인 두 가지 상태와 평면 상태 사이를 오갈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전자 배열은 언제나 하나로 고정되지 않고, 위상적 조건에 따라 다른 상태로 바뀔 수 있다. 핵심은 분자 모양의 비틀림보다 전자 상태가 90도씩 꼬여 연결되도록 설계한 데 있다. 이로써 전자 위상이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성질이 아니라, 분자 설계를 통해 구현하고 제어할 수 있는 대상임을 보여줬다.
새로운 양자 재료 연구 실마리
화학자들은 1960년대부터 뫼비우스 띠처럼 비틀린 전자 위상을 보이는 분자를 상상해왔다. 이 과정에서 ‘뫼비우스 방향족성(Möbius aromaticity)’이라는 개념이 등장했다. 방향족성은 벤젠처럼 전자들이 하나의 결합에만 묶이지 않고 고리 전체에 퍼져 분자를 더 안정화하는 성질이다. 핵심은 고리의 비틀림이 전자 상태가 연결되는 방식까지 달라지게 할 수 있다는 점이다.이 아이디어는 최근 들어 실험으로 하나씩 구현되고 있다. 비틀린 탄소 고리 분자와 뫼비우스형 탄소 나노벨트가 차례로 합성되면서 분자 골격의 비틀림을 정밀하게 제어하는 기술이 빠르게 발전했다. 연구의 초점도 구조 구현을 넘어, 비틀린 고리형 분자가 전자 상태를 어떻게 바꾸고 새로운 전자적 성질을 만들어내는지 밝히는 쪽으로 옮겨가고 있다. 연구자들이 기대하는 다음 단계는 이런 구조를 이용해 전자 상태를 설계하고, 그에 따라 달라지는 분자 성질을 조절하는 것이다.
장기적으로는 이러한 위상적 분자 설계가 분자 전자소자나 새로운 양자 재료 연구로 이어질 수 있다. 고리의 비틀림이 전자 상태의 연결 방식 자체를 바꿀 수 있다면 전류가 흐르는 방식이나 빛에 반응하는 성질, 스핀과 관련된 양자적 특성까지 분자 단계에서 조절할 가능성도 커지기 때문이다. 다만 아직은 곧바로 실용 소자를 만들기보다, 특정한 위상 구조를 지닌 분자에서 어떤 새로운 전자적 현상이 나타나는지 확인하는 기초 연구 성격이 더 강하다.
이때 복잡한 전자 상호작용을 기존 컴퓨터 계산만으로 정확히 다루는 데는 한계가 있다. 전자 하나의 상태가 다른 전자들과 동시에 맞물려 달라지면서 계산량이 급격히 커지기 때문이다. 이번 연구에서는 IBM의 양자컴퓨터를 활용한 고정확도 시뮬레이션으로 최대 32전자 규모의 복잡한 전자 상태를 계산함으로써 하프 뫼비우스의 특이한 궤도 패턴과 형성 메커니즘을 해석할 수 있었다. 이러한 성과는 양자컴퓨터가 복잡한 분자 전자구조를 이해하는 데 실제 계산 도구로 쓰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알레산드로 쿠리오니 IBM 취리히연구소 소장은 보도자료에서 “실제로 합성 가능한 분자를 설계한 뒤 이를 구현했으며, 양자컴퓨터를 이용해 그 특이한 성질을 검증했다”면서 “이번 성과로 양자물리학을 모사할 수 있는 계산 기술에 한 걸음 다가섰으며, 물질과 그 안의 세계를 탐구하는 새로운 문을 연 것”이라고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