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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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미자에 스코틀랜드 양조 기술 더한 문경 ‘고운달’

[명욱의 위스키 도슨트] 로컬과 글로벌의 조화… 한국 명주 만들겠다는 뚝심 담겨

  • 명욱 주류문화칼럼니스트

    입력2026-03-21 07: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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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여 년 전만 해도 전통주는 대중의 관심 밖에 머물러 있었다. ‘술은 그저 취하려고 마시는 것’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고, 마트 진열대는 저렴한 희석식 소주와 맥주가 독점했다. 아무도 우리 농산물로 빚은 술의 가치에 주목하지 않던 그 척박한 시대에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택한 이가 있다.

    서울대를 졸업하고 ‘윈저’ 등 국내 1세대 위스키를 직접 만든 전설적인 인물이자, 위스키 전문가에서 우리 술 전문가로 거듭난 이종기 제이엘(오미나라) 대표다. 평생 위스키, 코냑 등 서구 명주를 다뤄온 그는 한국산 주류가 저렴한 이미지에 갇혀 있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이 대표는 세계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는 ‘한국 명주’를 만들겠다는 꿈을 품었고, 2008년 경북 문경에 농업회사법인 제이엘을 세웠다.

    오미자로 만든 와인을 증류해 숙성시킨 고운달 오크(왼쪽)와 고운달 백자. 오미나라 제공

    오미자로 만든 와인을 증류해 숙성시킨 고운달 오크(왼쪽)와 고운달 백자. 오미나라 제공

    대체 불가능한 로컬의 힘

    이 대표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과연 전통주, 나아가 우리 술이란 무엇인가. 그가 내린 답은 명쾌했다. 전통 형식은 시대에 따라 변할 수 있지만, ‘로컬’ 가치는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 되려면 우리 농산물을 원료로 선택해야 했다. 비록 디자인과 패키지는 글로벌 스탠더드를 따를지라도, 내용물만큼은 세계 어디에서도 대체 불가능한 우리만의 오미자로 채우기로 한 것이다. 그는 서양에는 없는 다섯 가지 오묘한 맛의 조화를 가진 열매에 주목했고, 백두대간 허리인 문경새재에서 본격적으로 와이너리 역사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 대표의 여정은 전통주라는 울타리에만 갇혀 있지 않다. 위스키 본고장 스코틀랜드와 샴페인 성지 프랑스 샹파뉴에서도 연구하며 세계 최고 수준의 양조 기술을 몸소 익힌 그는 위스키나 코냑 애호가도 인정하는 독보적인 제품군을 구축했다.

    세계 최초로 오미자를 사용해 정통 샴페인 공법(병 속에서 2차 발효)으로 빚은 스파클링 와인 ‘오미로제’는 버락 오바마와 조 바이든 등 미국 전직 대통령의 방한 만찬주로 선정되며 ‘국가대표 와인’이라는 상징성을 얻었다. 오미자 와인을 증류한 후 백자 및 오크통에서 숙성시킨 최고급 증류주 ‘고운달’은 프리미엄 증류주의 대명사가 됐으며, 사과 증류주 ‘문경바람’과 함께 우리 농산물 가치를 예술 경지로 승화한 제품으로 평가받는다.



    오미나라의 성공은 품질을 넘어선 치밀한 프리미엄 전략에 있다. 대표적으로 이야기를 담은 디자인이다. 오미자 증류주 고운달은 고서를 형상화한 패키지와 조선 백자의 단아함을 살린 병 디자인이 돋보인다. 또 문경의 백두대간을 넘어서 뜨는 맑은 달을 형상화한 이미지에 고서 같은 패키지를 결합해 전통과 현대가 오묘한 조화를 이루는 브랜딩을 진행했다.

    지역 정체성도 살렸다. 오미나라 와이너리는 농림축산식품부의 ‘찾아가는 양조장’에 선정돼 술을 판매하는 장소를 넘어 체험과 교육을 통해 오미자의 가치를 알리는 공간이 됐다. 와이너리 내부에서는 프랑스 코냑 증류기인 샤랑트 증류기와 프랑스 정통 샴페인 제조 시설은 물론, 수많은 오크통에서 깊어가는 오미자 와인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전문적인 시설은 방문객에게 이곳의 술이 얼마나 엄격하고 고전적인 방식으로 만들어지는지 시각적으로 증명한다.

    술과 역사가 흐르는 힐링의 길

    광양 매실과 돌배를 사용해 만든 최초 스파클링 와인 섬진강의 별. 섬진강의봄 제공

    광양 매실과 돌배를 사용해 만든 최초 스파클링 와인 섬진강의 별. 섬진강의봄 제공

    오미나라를 방문한다면 문경의 다채로운 매력을 함께 경험하는 게 좋다. 양조장에서 차로 5분 거리인 문경새재도립공원은 필수 코스다. 과거 선비들이 장원급제를 꿈꾸며 넘어가던 이곳은 황톳길을 맨발로 걸으면서 숲의 기운을 만끽하기에 최적인 장소다. 문경 철로자전거와 백두대간 절경을 감상하는 단산 모노레일도 매력적인 체험거리다. 안전을 위해 이러한 액티비티나 나들이 일정을 모두 끝마친 뒤 마지막 코스로 와이너리를 방문하는 것이 현명한 여행법이다.

    문경의 매력은 먹거리에서 화룡점정을 찍는다. 문경 특산물인 약돌 돼지와 약돌 한우, 그리고 깊은 산세가 내준 송이버섯 전골은 이미 정평이 나 있다. 특히 오미나라 와이너리에서는 한 병을 통째로 사기에 부담스러울 수 있는 하이엔드 증류주 고운달을 잔술로 시음할 수 있다. 고급 호텔이나 바보다 훨씬 합리적인 가격에 거장의 역작을 맛볼 수 있다는 점은 브랜디 애호가에게 놓칠 수 없는 혜택이다.

    오미나라는 고객에게 다양한 제품 옵션을 제공해 선택의 즐거움을 준다. 30만 원대 하이엔드 고운달부터 2만 원대인 대중적인 프리미엄 문경바람까지, 소비자는 자신의 상황에 맞는 ‘똘똘한 한 병’을 선택할 수 있다. 

    최근 이 대표는 또 하나의 흥미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섬진강 맑은 기운을 머금은 매실과 돌배를 사용한 증류주 ‘섬진강의 봄’, 와인 ‘섬진강의 별’을 출시한 것이다. 특히 섬진강의 별은 광양 매실과 돌배를 사용한 최초 스파클링 와인으로, 문경을 넘어 한국의 다양한 로컬 자원이 세계적인 명주로 재탄생할 수 있음을 다시 한 번 증명하고 있다.

    위스키 전문가에서 우리 술 전문가로 거듭난 이 대표 사례는 우리 술의 본질을 시사한다. 가장 한국적인 원료에 세계적 수준의 기술력을 더한 제이엘의 성공은 로컬 브랜드가 어떻게 글로벌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대한민국의 지리적 중심 문경에서 시작된 오미자 향기가 전 세계인의 식탁에서 가장 빛나는 별이 될 날을 기대해본다. 

    명욱 칼럼니스트는… 주류 인문학 및 트렌드 연구가. 숙명여대 미식문화 최고위과정 주임교수를 거쳐 세종사이버대 바리스타&소믈리에학과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젊은 베르테르의 술품’과 ‘말술남녀’가 있다. 최근 술을 통해 역사와 트렌드를 바라보는 ‘술기로운 세계사’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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