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후에도 우리 가족은 늘 조심하며 얇은 얼음장 위를 걷는 심정으로 숨죽여 살아야 했다. ‘백범 김구의 가족’이라는 사실은 때로는 크나큰 자랑이자 자부심의 원천이었지만, 늘 나와 가족의 어깨 위에 무겁게 드리워진 버거운 숙명이기도 했다.
-김신 회고록 ‘조국의 하늘을 날다’ 중에서
6월 26일 김양(62) 전 국가보훈처장이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출석했다. 해군 해상작전헬기 와일드캣(AW-159) 도입과 관련해 방위사업비리 정부합동수사단(합수단)이 기소한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알선수재가 그의 혐의였다.
영장실질심사가 열린 이날은 공교롭게도 조부인 백범 김구 선생의 66주기. 서울 용산구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추모식이 진행되는 그 시간, 쏟아지는 카메라 플래시 세례를 받는 그의 표정은 무서우리만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이튿날 새벽 1시 30분 법원은 구속영장을 발부했고, 그는 수사관들의 손에 이끌려 구치소로 향했다.
합수단에 따르면 김 전 처장은 2012년 영국산 와일드캣이 해군의 차세대 해상작전헬기로 선정되도록 힘써주는 대가로 제작사인 아구스타웨스트랜드(AW)로부터 14억여 원을 받은 혐의를 받고 있다. 6월 23일 김 전 처장을 소환해 17시간 동안 조사를 벌인 합수단은 그가 당시 해군본부 지휘부와 광범위한 접촉을 갖고 와일드캣 선정을 부탁한 것으로 판단해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영장실질심사에서 김 전 처장은 자신의 e메일 계정까지 공개하며 무죄를 강력히 주장했지만, 법원은 영장 발부를 결정했다.
한국 사회에서 ‘백범 김구’라는 넉 자가 갖는 의미를 부연할 필요가 있을까. 그의 구속 소식이 던진 파문이 ‘합수단 출범 이후 최고위직’이라는 검찰 측 설명을 훌쩍 뛰어넘는 이유다. 미국 조지워싱턴대 석사라는 학력에, 본인을 포함해 부친과 아들까지 공군 장교로 복무한 병역 명문가, 2005~2008년 중국 상하이 총영사, 2008~2011년 보훈처장 재직이라는 탄탄한 경력을 걸어왔던 그가 왜 돌연 추락한 모습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됐을까. 기억해야 할 것은, 이 해답을 찾아내는 과정이 굴곡진 한국 현대사와 그대로 맞닿아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자랑스러워하지 않았다
의문을 풀 첫 번째 단초는 공직 입문 전 김 전 처장이 10년 가까이 프랑스 항공무기제작 국영업체 아에로스파시알(Aerospatiale)의 한국 지사장으로 일했다는 사실이다. 1982년 미국에서 석사 과정을 마치고 돌아와 씨티은행과 개인용 컴퓨터(PC) 관련 기업에서 재직하다 방위산업계에 뛰어든 게 91년 무렵. 아에로스파시알이 그 무렵 불어 닥친 전 세계적 군수기업 인수합병 바람에 휩쓸린 2000년 후에는 유럽우주항공방위사업체(EADS) 수석고문으로 일했다고 공식 프로필에는 기재돼 있다. 잠시 사장으로 일했던 디케이아이 역시 방산회사. 2005년 상하이 총영사로 발탁되기 전까지 이력 대부분이 해외무기 중개사업에 쏠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인들이 말하는 가장 큰 아이러니는 이 대목에서 비롯된 두 개의 정체성이다. 개인적으로 그를 아는 이들은 절도 있고 품행이 단정한 ‘명문가 자손’이자 ‘양식 있는 고위공직자’로 기억하지만, 무기도입시장에서 비즈니스로 얽힌 이들의 평가는 허세가 심하고 인맥 과시가 주무기인 ‘거품형 로비스트’에 가깝다.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라는 게 선뜻 믿기지 않을 정도로 상반된 말들. 이 두 개의 정체성이야말로 그의 인생을 관통하는 키워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 전 처장은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71학번이다. 대학 시절 선후배들의 촌평은 ‘눈에 띄는 사람은 아니었다’는 말로 요약 가능하다. 대부분 그가 김구의 손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스스로 이를 내세우거나 과시하는 스타일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것. 대만에서 청소년기를 보내는 동안 미국계 국제학교를 다닌 덕에 영어와 중국어를 자유롭게 구사해 부러움을 샀으나, ‘절친’이라고 할 동기는 없었다는 증언도 있다. 유신반대 운동이 대학가를 휩쓸던 시기였음에도 학생운동과는 아예 인연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1990년 무기도입사업에 뛰어든 이후 평가는 완전히 다르다. 이 시기 아에로스파시알 한국지사는 이름만 거창할 뿐 실제로는 서울 용산구 한남동의 작은 사무실에 직원 2~3명이 전부인 연락사무소 정도였고, 아에로스파시알과 김 전 처장이 한국군에 판매한 실적 역시 전무하다는 게 방산업계 관계자들의 말이다. 이후 맡았다는 EADS 고문 직함과 관련해서도, 이 회사가 옛 아에로스파시알 사무실 자리를 물려받아 사용했을 뿐 김 전 처장에게 고문이라는 공식 직함을 준 적은 없다는 게 EADS 측 설명. 한마디로 무기도입시장에서 경력 자체가 상당 부분 부풀려졌다는 평가다.
예비역 공군 원로들은 김 전 처장이 무기도입시장에 뛰어든 배경에 대해 “김구의 손자라서가 아니라 김신의 아들이었기 때문으로 봐야 한다”고 말한다. 김구의 두 아들 가운데 장남 김인 씨는 해방 전 독립운동을 하다 유명을 달리했고, 둘째였던 김신 씨가 1948년 부친의 평양 방문을 동행하는 등 가문의 적통(嫡統)을 이어받는다. 해방 이전부터 미국에서 비행사 교육을 받았던 김신 씨는 60년부터 6대 공군참모총장으로 재임했을 만큼 대한민국 공군 건설의 주역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이러한 전통을 이어받아 김 전 처장과 그 아들 역시 공군 장교로 복무했다. 공군과의 원만한 관계가 무엇보다 중요한 외국계 항공 무기회사의 눈에 충분히 ‘가치 있는 인물’로 비쳤으리라는 건 어렵지 않게 추론할 수 있다. 율곡사업 등 빠른 속도로 전력구조 현대화 프로젝트에 몰두했던 이 무렵 한국군의 분위기와 관련해, 장기 투자 차원에서 그를 ‘관리’하려 했을 공산이 크다는 게 당시 사정에 정통한 방산업계 인사들의 말이다.
정작 김 전 처장은 10년이 넘는 본인의 방산업계 활동을 그다지 자랑스러워하지 않았던 것 같다는 증언도 있다. 관련 세미나나 학술행사에서 조우하곤 했다는 한 인사는 “각 업체가 나서서 자기 홍보를 해야 하는 곳이지만, 언제나 구석에서 조용히 자리를 지키다 사라지곤 했다”고 전한다. 특히 그가 김구의 손자임을 잘 아는 사람들과 만날 때 그 같은 태도가 한층 두드러졌다는 것. 이를테면 두 개의 정체성이 충돌하는 지점이었던 셈이다.
아버지의 길, 아들의 길
쿠데타가 일어난 후 육군본부에 모이라는 연락을 받았다. 그곳에서 박정희 장군을 처음 봤다. 박정희 장군은 나를 보고 아는 척을 했다. “아 김 장군은 저를 잘 몰라도 저는 잘 압니다. ‘백범일지’를 여러 번 정독하고 깊이 감명받았습니다.” (중략) 장도영 장군은 나를 총장 사무실에 딸린 침실로 불러 의견을 구했다. “육군의 소령, 중령 등 젊은 애들이 총을 들이대려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나?” “이들은 지금 목숨 내놓고 나온 사람들입니다. 누가 말한다고 해서 쉽게 말을 들을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강제로 진압하려 하면 서울 시내가 전쟁터가 될 것입니다. 이것만큼은 피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김신 회고록 ‘조국의 하늘을 날다’ 중에서
모든 경력을 민간기업에서만 이어왔던 김 전 처장은 2005년 9월 갑자기 주상하이총영사관 총영사로 임명된다. 인사 소식을 전한 보도자료에는 ‘백범 김구의 손자’라는 사실이 강조됐다. 그러나 외국 무기업체의 국내 판매를 담당하던 인물을 재외공관장으로 발탁하는 것을 두고 당시에도 정부 내부에서 상당한 반론이 있었다는 게 노무현 정부 청와대 관계자들의 설명. 그중 한 사람의 말이다.
“중국과의 관계를 중시했던 당시 청와대로서는 김구 선생과 그 후손이 중국과 맺어온 두터운 인연이 필요했다. 더욱이 노 대통령 본인이 김구 선생에 대해 애정이 있었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 아닌가. 넓게 보면 상하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대한민국 정부의 역사적 정체성을 재정립한다는 의지도 있었을 것이다. 실무 능력이나 이전 경력보다 ‘이미지’가 가장 중요했다는 뜻이다.”
김 전 처장의 형이자 김신 전 총장의 장남인 김진 씨가 대한주택공사(현 한국토지주택공사) 사장에 임명된 것 역시 노무현 정부 출범 직후인 2003년 6월의 일이었다. 역시 민간기업에서 주로 경력을 쌓았던 김진 씨는 김대중 정부 첫해인 1998년 대한주택공사 감사로 영입된 바 있다. 김대중 정부 시기에는 전두환·노태우·김영삼 정부를 거치는 동안 번번이 무산됐던 백범김구기념관이 서울 용산구 효창동에 건립되기도 했다.
2008년 이명박 정부가 김양 씨를 차관급 정무직인 보훈처장에 임명한 것 역시 이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당시 보도자료도 ‘백범의 손자’임을 강조하기는 마찬가지. ‘풍부한 조직관리 경험’과 ‘건전하고 원만한 인간관계’ 같은 설명이 달려 있긴 하지만, 한국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의 자손이 보훈처장을 맡는다는 상징성에 비할 바는 아니다. 2007년 대통령선거 이명박(MB) 캠프에서부터 활동했던 한 MB정부 핵심 인사는 “취임 후 첫 조각은 상당 부분 논공행상으로 이뤄지기 마련이지만, 보훈처장만큼은 ‘의의’가 중요하다고 판단했다”고 전한다.
공교롭게도 이러한 발탁 배경은 아버지 김신 전 총장의 경우와 그대로 겹친다. 김구 선생 서거 이후 암살 배후에 이승만 정부가 있다고 판단했던 김 전 총장은 이후 자유당 정권과 불편한 관계를 이어나갔다. 4·19혁명으로 민주당 정부가 들어선 후에야 공군참모총장에 오를 수 있었던 그는, 5·16군사정변 당시 사실상 쿠데타를 추인하면서 박정희 정부와 밀월관계를 맺는다.
1962년 주대만총영사관 대사, 71년 교통부 장관, 73년 유정회 국회의원 등 김 전 총장이 성공적인 커리어를 밟아나가는 동안 박정희 정부는 69년 8월 서울 남산에 동상을 건립하는 등 백범의 위상을 곧추세우는 작업을 진행했다. ‘박정희 대통령만큼 독립유공자를 위해 힘쓴 대통령은 많지 않았다’는 게 회고록에 등장하는 김 전 총장의 말. 좋게 말하면 이승만 정부 시기 뒤틀린 평가를 바로잡는 작업이지만, 비판적으로 보자면 쿠데타 정권의 부족한 정통성을 만회하려는 행보였다.
김구 가문과 오랜 인연을 맺어온 한 인사는 “김 전 처장이 상하이 총영사 자리를 제안받았을 당시 부친이나 형과 깊이 상의한 것으로 안다”고 전한다. 요컨대 개인의 결정이 아니라 가문의 결정이었던 셈. 이후 김 전 처장은 보훈처와 독립기념관 등이 진행한 중국 내 독립운동 사적 조사 및 복원 작업에 성공적으로 힘을 보탠다. 김구 가문의 눈으로 보자면 백범 재평가 작업에 공들였던 박정희 정부와 김대중·노무현·이명박 정부는 일종의 우군이었고, 이들 정부를 활용해 백범의 뜻을 후세에 전할 동력을 얻으려 했던 셈이다.
그가 탐났던 이유
그것은 언제나 사(私)보다는 공(公)을 우선시하며 어긋남 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삶의 지침 그 자체이기도 했거니와, 일거수일투족이 때로는 감시받고 때로는 크게 주목받을 수밖에 없는 굴레이기도 했다.
-김신 회고록 ‘조국의 하늘을 날다’ 중에서
기억해둘 것은 공직 재임 기간 김 전 처장에 대한 부하직원들의 평가가 상당히 긍정적이라는 점이다. 업무 추진 과정에서 무리한 결정을 하는 경우가 없었고, 직원들을 대하는 태도 역시 품위와 절도가 있었다고 한다. 특히 군 출신 인사가 임명되는 경우가 많은 보훈처의 한 관계자는 “역대 처장 중 가장 모시고 일하기 좋은, 합리적 성격이 빼어난 상사였다”고 평한다. 요컨대 ‘김구의 손자’라는 정체성에서 시작돼 그에 철저히 부합하는 자세로 이어진 공직생활이었다는 의미다.
공직을 마무리한 2011년 2월 이후, 특히 무기도입 비즈니스와 관련해 그를 만난 업계 인사들의 평가는 정반대다. “오랜만에 보니 사람이 이상하게 변했더라. 말이 거칠고 자기가 뭐든 다 할 수 있는 것처럼 거드름이 심했다”는 평가가 대표적이다. “밖에서는 나를 이명박 정부 사람으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박근혜 정부 핵심과도 막역한 사이”라는 과시성 발언을 직접 들었다는 증언도 있다.
금화장(金華莊).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2가에 있는 김신 전 총장의 옛 집이다. 김구 선생이 서거한 뒤 경교장을 비워야 했던 그는 적산가옥으로 정부귀속재산이던 이 건물을 인수해 부친의 유품을 모셨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와 김용우 전 국방부 장관이 탐냈을 만큼 좋은 집이었다는 회고. 부동산등기부등본에 따르면, 2005년 낡은 집을 부수고 바로크풍의 4층짜리 미색 건물로 말끔하게 재건축한 인물은 김 전 총장의 사위인 김호연 전 빙그레 회장이다. 현재 이 건물은 김구재단이 사용하고 있다.
김종희 한화그룹 창업주의 아들이자 김승연 회장의 동생인 김호연 전 회장은 김 전 총장의 딸 김미 씨와 결혼한 이후 김구재단의 이사장직을 맡아 기념관 건립 등 국내외에서 진행된 다양한 김구 선생 기념사업의 재정 후원을 맡아왔다. 2010년 7월 치른 재·보궐선거에서 한나라당의 공천을 받아 충남 천안을에서 당선된 후 국회의원으로 2년간 일했다. 선거운동 과정에서는 어김없이 ‘김구의 손자사위’라는 사실이 강조됐다. 언론사에 배포한 김 전 회장의 공식 프로필 가족사항에도 ‘장조부 김구’가 가장 먼저 등장한다.
이전에도 방위산업 포트폴리오가 만만치 않았던 한화그룹이 최근 들어 무기체계 분야에 한층 공격적으로 임하고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 지난해 삼성탈레스와 삼성테크윈 등 삼성이 보유하고 있던 굴지의 방산기업들을 인수한 게 대표적이다. 업계 관계자들은 김구 가문과 한화 가문의 사돈 관계 역시 무기도입시장에서 김 전 처장의 ‘몸값’을 올린 요인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라고 말한다. 국내 방산기업과 다양한 협력 사업이 필수적인 업계 특성상, 외국업체들로서는 방산시장의 큰손으로 자리매김한 한화와 김 전 처장의 인연을 무시할 수 없었으리라는 시각이다.
여기에 3년 가까이 보훈처장으로 재임한 이력도 간과하기 어렵다. 한 업계 관계자는 “원래 보훈처장이라는 자리가 예비역 인사들에게 뭔가 ‘베풀 일’이 많은 직위 아닌가. 재향군인회 등 군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단체의 주무기관이기도 하다. 전직은 물론 현역 고위 인사들과도 관계가 좋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여전히 인맥이 중시되는 무기도입시장의 현실을 감안하면 외국업체들로서는 탐날 수밖에 없는 경력이라는 뜻이다.
김 전 처장이 AW와 자문 계약을 맺은 2011년 11월은 보훈처장에서 물러난 지 1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 공직을 벗어난 직후부터 그는 개인사무실을 열고 진행 중이던 주요 무기도입사업 자문을 여러 경로로 타진한 것으로 전해진다.
정확한 사실은 앞으로 이어질 재판 과정에서 판가름 나겠지만, 드러난 부분만 놓고 보면 그가 벌인 일은 외국업체 지사장으로 일했던 20여 년 전이었다면 크게 문제될 게 없는 사안이라는 게 방산업계 안팎의 중론. 김 전 처장으로서는 공직이 끝나고 난 뒤 원래 자신이 하던 일로 돌아갔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10년 전 이미 잉태된 비극
그러나 그가 간과한 것은 자신이 더는 ‘예전의 그 김양’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이후 그는 고위 공직에 재직했고, 전직 공직자의 ‘로비활동’은 위법 여지를 피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김구의 손자였기에 가능했던 공직 경력이 김신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시작할 수 있었던 ‘원래 직업’의 발목을 잡은 셈이다. 그 두 개의 정체성이 충돌할 때 얼마나 큰 파열음을 낼 수 있는지 미처 가늠하지 못한 것이야말로 가장 큰 실책이었을까. 이렇게 보면 비극의 화근은 외국 무기를 판매하던 인물을 공직에 입문케 한 10년 전에 이미 잉태된 것이라고 봐야 할 듯하다.
공교롭게도 그의 형인 김진 전 사장 역시 광고회사와 협력업체 등으로부터 억대 금품을 수수한 혐의로 1년6개월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한 바 있다. 수사가 시작된 후 김 전 처장은 가까운 지인들에게 “내가 김구 손자가 아니었어도 검찰이 나를 이렇게 캤겠나. 떠들썩한 언론보도로 성과를 과시하려는 한건주의 아니냐”며 불만을 토로한 것으로 전해진다. 어떤 식으로든 벗어날 수 없는 가문의 영광과 굴레. 김구 선생을 오랜 기간 연구해온 한 학계 전문가의 말이다.
“따지고 보면 이승만 정부로부터 홀대받은 이래 김구 가문은 역대 정권과 줄타기를 이어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구 선생의 뜻과 업적이 잊히지 않도록 세상에 널리 알릴 유일한 길은 ‘김구의 이미지’를 필요로 하는 정치권력을 활용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대한민국 광복사(史)의 가장 큰 영웅이지만, 그 유지를 따르는 정치세력이 없는 김구라는 인물의 비극과 고스란히 맞닿아 있는 행적이다.”
김우전. 1940년대 김구 선생의 비서로 일했고 2003년부터 광복회장을 지내기도 한 이 원로 독립운동가는 6월 26일 김구 선생의 66주기 추모식에도 예전처럼 참석했다. “금년 기일이 아주 힘들었다. 왜 하필 그날이었는지…. 생존해 있는 다른 임시정부 인사들은 나오지 않았다. 애통하기 짝이 없는 날이었다.” 청년 시절, 조국의 독립을 꿈꾸며 김구 선생과 풍찬노숙을 함께 했던 그의 한숨에 물기가 가득했다.
-김신 회고록 ‘조국의 하늘을 날다’ 중에서
6월 26일 김양(62) 전 국가보훈처장이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출석했다. 해군 해상작전헬기 와일드캣(AW-159) 도입과 관련해 방위사업비리 정부합동수사단(합수단)이 기소한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알선수재가 그의 혐의였다.
영장실질심사가 열린 이날은 공교롭게도 조부인 백범 김구 선생의 66주기. 서울 용산구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추모식이 진행되는 그 시간, 쏟아지는 카메라 플래시 세례를 받는 그의 표정은 무서우리만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이튿날 새벽 1시 30분 법원은 구속영장을 발부했고, 그는 수사관들의 손에 이끌려 구치소로 향했다.
합수단에 따르면 김 전 처장은 2012년 영국산 와일드캣이 해군의 차세대 해상작전헬기로 선정되도록 힘써주는 대가로 제작사인 아구스타웨스트랜드(AW)로부터 14억여 원을 받은 혐의를 받고 있다. 6월 23일 김 전 처장을 소환해 17시간 동안 조사를 벌인 합수단은 그가 당시 해군본부 지휘부와 광범위한 접촉을 갖고 와일드캣 선정을 부탁한 것으로 판단해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영장실질심사에서 김 전 처장은 자신의 e메일 계정까지 공개하며 무죄를 강력히 주장했지만, 법원은 영장 발부를 결정했다.
한국 사회에서 ‘백범 김구’라는 넉 자가 갖는 의미를 부연할 필요가 있을까. 그의 구속 소식이 던진 파문이 ‘합수단 출범 이후 최고위직’이라는 검찰 측 설명을 훌쩍 뛰어넘는 이유다. 미국 조지워싱턴대 석사라는 학력에, 본인을 포함해 부친과 아들까지 공군 장교로 복무한 병역 명문가, 2005~2008년 중국 상하이 총영사, 2008~2011년 보훈처장 재직이라는 탄탄한 경력을 걸어왔던 그가 왜 돌연 추락한 모습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됐을까. 기억해야 할 것은, 이 해답을 찾아내는 과정이 굴곡진 한국 현대사와 그대로 맞닿아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자랑스러워하지 않았다
의문을 풀 첫 번째 단초는 공직 입문 전 김 전 처장이 10년 가까이 프랑스 항공무기제작 국영업체 아에로스파시알(Aerospatiale)의 한국 지사장으로 일했다는 사실이다. 1982년 미국에서 석사 과정을 마치고 돌아와 씨티은행과 개인용 컴퓨터(PC) 관련 기업에서 재직하다 방위산업계에 뛰어든 게 91년 무렵. 아에로스파시알이 그 무렵 불어 닥친 전 세계적 군수기업 인수합병 바람에 휩쓸린 2000년 후에는 유럽우주항공방위사업체(EADS) 수석고문으로 일했다고 공식 프로필에는 기재돼 있다. 잠시 사장으로 일했던 디케이아이 역시 방산회사. 2005년 상하이 총영사로 발탁되기 전까지 이력 대부분이 해외무기 중개사업에 쏠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인들이 말하는 가장 큰 아이러니는 이 대목에서 비롯된 두 개의 정체성이다. 개인적으로 그를 아는 이들은 절도 있고 품행이 단정한 ‘명문가 자손’이자 ‘양식 있는 고위공직자’로 기억하지만, 무기도입시장에서 비즈니스로 얽힌 이들의 평가는 허세가 심하고 인맥 과시가 주무기인 ‘거품형 로비스트’에 가깝다.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라는 게 선뜻 믿기지 않을 정도로 상반된 말들. 이 두 개의 정체성이야말로 그의 인생을 관통하는 키워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 전 처장은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71학번이다. 대학 시절 선후배들의 촌평은 ‘눈에 띄는 사람은 아니었다’는 말로 요약 가능하다. 대부분 그가 김구의 손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스스로 이를 내세우거나 과시하는 스타일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것. 대만에서 청소년기를 보내는 동안 미국계 국제학교를 다닌 덕에 영어와 중국어를 자유롭게 구사해 부러움을 샀으나, ‘절친’이라고 할 동기는 없었다는 증언도 있다. 유신반대 운동이 대학가를 휩쓸던 시기였음에도 학생운동과는 아예 인연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1990년 무기도입사업에 뛰어든 이후 평가는 완전히 다르다. 이 시기 아에로스파시알 한국지사는 이름만 거창할 뿐 실제로는 서울 용산구 한남동의 작은 사무실에 직원 2~3명이 전부인 연락사무소 정도였고, 아에로스파시알과 김 전 처장이 한국군에 판매한 실적 역시 전무하다는 게 방산업계 관계자들의 말이다. 이후 맡았다는 EADS 고문 직함과 관련해서도, 이 회사가 옛 아에로스파시알 사무실 자리를 물려받아 사용했을 뿐 김 전 처장에게 고문이라는 공식 직함을 준 적은 없다는 게 EADS 측 설명. 한마디로 무기도입시장에서 경력 자체가 상당 부분 부풀려졌다는 평가다.
예비역 공군 원로들은 김 전 처장이 무기도입시장에 뛰어든 배경에 대해 “김구의 손자라서가 아니라 김신의 아들이었기 때문으로 봐야 한다”고 말한다. 김구의 두 아들 가운데 장남 김인 씨는 해방 전 독립운동을 하다 유명을 달리했고, 둘째였던 김신 씨가 1948년 부친의 평양 방문을 동행하는 등 가문의 적통(嫡統)을 이어받는다. 해방 이전부터 미국에서 비행사 교육을 받았던 김신 씨는 60년부터 6대 공군참모총장으로 재임했을 만큼 대한민국 공군 건설의 주역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이러한 전통을 이어받아 김 전 처장과 그 아들 역시 공군 장교로 복무했다. 공군과의 원만한 관계가 무엇보다 중요한 외국계 항공 무기회사의 눈에 충분히 ‘가치 있는 인물’로 비쳤으리라는 건 어렵지 않게 추론할 수 있다. 율곡사업 등 빠른 속도로 전력구조 현대화 프로젝트에 몰두했던 이 무렵 한국군의 분위기와 관련해, 장기 투자 차원에서 그를 ‘관리’하려 했을 공산이 크다는 게 당시 사정에 정통한 방산업계 인사들의 말이다.
정작 김 전 처장은 10년이 넘는 본인의 방산업계 활동을 그다지 자랑스러워하지 않았던 것 같다는 증언도 있다. 관련 세미나나 학술행사에서 조우하곤 했다는 한 인사는 “각 업체가 나서서 자기 홍보를 해야 하는 곳이지만, 언제나 구석에서 조용히 자리를 지키다 사라지곤 했다”고 전한다. 특히 그가 김구의 손자임을 잘 아는 사람들과 만날 때 그 같은 태도가 한층 두드러졌다는 것. 이를테면 두 개의 정체성이 충돌하는 지점이었던 셈이다.
아버지의 길, 아들의 길
쿠데타가 일어난 후 육군본부에 모이라는 연락을 받았다. 그곳에서 박정희 장군을 처음 봤다. 박정희 장군은 나를 보고 아는 척을 했다. “아 김 장군은 저를 잘 몰라도 저는 잘 압니다. ‘백범일지’를 여러 번 정독하고 깊이 감명받았습니다.” (중략) 장도영 장군은 나를 총장 사무실에 딸린 침실로 불러 의견을 구했다. “육군의 소령, 중령 등 젊은 애들이 총을 들이대려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나?” “이들은 지금 목숨 내놓고 나온 사람들입니다. 누가 말한다고 해서 쉽게 말을 들을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강제로 진압하려 하면 서울 시내가 전쟁터가 될 것입니다. 이것만큼은 피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김신 회고록 ‘조국의 하늘을 날다’ 중에서
모든 경력을 민간기업에서만 이어왔던 김 전 처장은 2005년 9월 갑자기 주상하이총영사관 총영사로 임명된다. 인사 소식을 전한 보도자료에는 ‘백범 김구의 손자’라는 사실이 강조됐다. 그러나 외국 무기업체의 국내 판매를 담당하던 인물을 재외공관장으로 발탁하는 것을 두고 당시에도 정부 내부에서 상당한 반론이 있었다는 게 노무현 정부 청와대 관계자들의 설명. 그중 한 사람의 말이다.
“중국과의 관계를 중시했던 당시 청와대로서는 김구 선생과 그 후손이 중국과 맺어온 두터운 인연이 필요했다. 더욱이 노 대통령 본인이 김구 선생에 대해 애정이 있었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 아닌가. 넓게 보면 상하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대한민국 정부의 역사적 정체성을 재정립한다는 의지도 있었을 것이다. 실무 능력이나 이전 경력보다 ‘이미지’가 가장 중요했다는 뜻이다.”
김 전 처장의 형이자 김신 전 총장의 장남인 김진 씨가 대한주택공사(현 한국토지주택공사) 사장에 임명된 것 역시 노무현 정부 출범 직후인 2003년 6월의 일이었다. 역시 민간기업에서 주로 경력을 쌓았던 김진 씨는 김대중 정부 첫해인 1998년 대한주택공사 감사로 영입된 바 있다. 김대중 정부 시기에는 전두환·노태우·김영삼 정부를 거치는 동안 번번이 무산됐던 백범김구기념관이 서울 용산구 효창동에 건립되기도 했다.
2008년 이명박 정부가 김양 씨를 차관급 정무직인 보훈처장에 임명한 것 역시 이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당시 보도자료도 ‘백범의 손자’임을 강조하기는 마찬가지. ‘풍부한 조직관리 경험’과 ‘건전하고 원만한 인간관계’ 같은 설명이 달려 있긴 하지만, 한국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의 자손이 보훈처장을 맡는다는 상징성에 비할 바는 아니다. 2007년 대통령선거 이명박(MB) 캠프에서부터 활동했던 한 MB정부 핵심 인사는 “취임 후 첫 조각은 상당 부분 논공행상으로 이뤄지기 마련이지만, 보훈처장만큼은 ‘의의’가 중요하다고 판단했다”고 전한다.
공교롭게도 이러한 발탁 배경은 아버지 김신 전 총장의 경우와 그대로 겹친다. 김구 선생 서거 이후 암살 배후에 이승만 정부가 있다고 판단했던 김 전 총장은 이후 자유당 정권과 불편한 관계를 이어나갔다. 4·19혁명으로 민주당 정부가 들어선 후에야 공군참모총장에 오를 수 있었던 그는, 5·16군사정변 당시 사실상 쿠데타를 추인하면서 박정희 정부와 밀월관계를 맺는다.
1962년 주대만총영사관 대사, 71년 교통부 장관, 73년 유정회 국회의원 등 김 전 총장이 성공적인 커리어를 밟아나가는 동안 박정희 정부는 69년 8월 서울 남산에 동상을 건립하는 등 백범의 위상을 곧추세우는 작업을 진행했다. ‘박정희 대통령만큼 독립유공자를 위해 힘쓴 대통령은 많지 않았다’는 게 회고록에 등장하는 김 전 총장의 말. 좋게 말하면 이승만 정부 시기 뒤틀린 평가를 바로잡는 작업이지만, 비판적으로 보자면 쿠데타 정권의 부족한 정통성을 만회하려는 행보였다.
김구 가문과 오랜 인연을 맺어온 한 인사는 “김 전 처장이 상하이 총영사 자리를 제안받았을 당시 부친이나 형과 깊이 상의한 것으로 안다”고 전한다. 요컨대 개인의 결정이 아니라 가문의 결정이었던 셈. 이후 김 전 처장은 보훈처와 독립기념관 등이 진행한 중국 내 독립운동 사적 조사 및 복원 작업에 성공적으로 힘을 보탠다. 김구 가문의 눈으로 보자면 백범 재평가 작업에 공들였던 박정희 정부와 김대중·노무현·이명박 정부는 일종의 우군이었고, 이들 정부를 활용해 백범의 뜻을 후세에 전할 동력을 얻으려 했던 셈이다.
그가 탐났던 이유
그것은 언제나 사(私)보다는 공(公)을 우선시하며 어긋남 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삶의 지침 그 자체이기도 했거니와, 일거수일투족이 때로는 감시받고 때로는 크게 주목받을 수밖에 없는 굴레이기도 했다.
-김신 회고록 ‘조국의 하늘을 날다’ 중에서
기억해둘 것은 공직 재임 기간 김 전 처장에 대한 부하직원들의 평가가 상당히 긍정적이라는 점이다. 업무 추진 과정에서 무리한 결정을 하는 경우가 없었고, 직원들을 대하는 태도 역시 품위와 절도가 있었다고 한다. 특히 군 출신 인사가 임명되는 경우가 많은 보훈처의 한 관계자는 “역대 처장 중 가장 모시고 일하기 좋은, 합리적 성격이 빼어난 상사였다”고 평한다. 요컨대 ‘김구의 손자’라는 정체성에서 시작돼 그에 철저히 부합하는 자세로 이어진 공직생활이었다는 의미다.
공직을 마무리한 2011년 2월 이후, 특히 무기도입 비즈니스와 관련해 그를 만난 업계 인사들의 평가는 정반대다. “오랜만에 보니 사람이 이상하게 변했더라. 말이 거칠고 자기가 뭐든 다 할 수 있는 것처럼 거드름이 심했다”는 평가가 대표적이다. “밖에서는 나를 이명박 정부 사람으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박근혜 정부 핵심과도 막역한 사이”라는 과시성 발언을 직접 들었다는 증언도 있다.
금화장(金華莊).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2가에 있는 김신 전 총장의 옛 집이다. 김구 선생이 서거한 뒤 경교장을 비워야 했던 그는 적산가옥으로 정부귀속재산이던 이 건물을 인수해 부친의 유품을 모셨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와 김용우 전 국방부 장관이 탐냈을 만큼 좋은 집이었다는 회고. 부동산등기부등본에 따르면, 2005년 낡은 집을 부수고 바로크풍의 4층짜리 미색 건물로 말끔하게 재건축한 인물은 김 전 총장의 사위인 김호연 전 빙그레 회장이다. 현재 이 건물은 김구재단이 사용하고 있다.
김종희 한화그룹 창업주의 아들이자 김승연 회장의 동생인 김호연 전 회장은 김 전 총장의 딸 김미 씨와 결혼한 이후 김구재단의 이사장직을 맡아 기념관 건립 등 국내외에서 진행된 다양한 김구 선생 기념사업의 재정 후원을 맡아왔다. 2010년 7월 치른 재·보궐선거에서 한나라당의 공천을 받아 충남 천안을에서 당선된 후 국회의원으로 2년간 일했다. 선거운동 과정에서는 어김없이 ‘김구의 손자사위’라는 사실이 강조됐다. 언론사에 배포한 김 전 회장의 공식 프로필 가족사항에도 ‘장조부 김구’가 가장 먼저 등장한다.
이전에도 방위산업 포트폴리오가 만만치 않았던 한화그룹이 최근 들어 무기체계 분야에 한층 공격적으로 임하고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 지난해 삼성탈레스와 삼성테크윈 등 삼성이 보유하고 있던 굴지의 방산기업들을 인수한 게 대표적이다. 업계 관계자들은 김구 가문과 한화 가문의 사돈 관계 역시 무기도입시장에서 김 전 처장의 ‘몸값’을 올린 요인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라고 말한다. 국내 방산기업과 다양한 협력 사업이 필수적인 업계 특성상, 외국업체들로서는 방산시장의 큰손으로 자리매김한 한화와 김 전 처장의 인연을 무시할 수 없었으리라는 시각이다.
여기에 3년 가까이 보훈처장으로 재임한 이력도 간과하기 어렵다. 한 업계 관계자는 “원래 보훈처장이라는 자리가 예비역 인사들에게 뭔가 ‘베풀 일’이 많은 직위 아닌가. 재향군인회 등 군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단체의 주무기관이기도 하다. 전직은 물론 현역 고위 인사들과도 관계가 좋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여전히 인맥이 중시되는 무기도입시장의 현실을 감안하면 외국업체들로서는 탐날 수밖에 없는 경력이라는 뜻이다.
김 전 처장이 AW와 자문 계약을 맺은 2011년 11월은 보훈처장에서 물러난 지 1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 공직을 벗어난 직후부터 그는 개인사무실을 열고 진행 중이던 주요 무기도입사업 자문을 여러 경로로 타진한 것으로 전해진다.
정확한 사실은 앞으로 이어질 재판 과정에서 판가름 나겠지만, 드러난 부분만 놓고 보면 그가 벌인 일은 외국업체 지사장으로 일했던 20여 년 전이었다면 크게 문제될 게 없는 사안이라는 게 방산업계 안팎의 중론. 김 전 처장으로서는 공직이 끝나고 난 뒤 원래 자신이 하던 일로 돌아갔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10년 전 이미 잉태된 비극
그러나 그가 간과한 것은 자신이 더는 ‘예전의 그 김양’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이후 그는 고위 공직에 재직했고, 전직 공직자의 ‘로비활동’은 위법 여지를 피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김구의 손자였기에 가능했던 공직 경력이 김신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시작할 수 있었던 ‘원래 직업’의 발목을 잡은 셈이다. 그 두 개의 정체성이 충돌할 때 얼마나 큰 파열음을 낼 수 있는지 미처 가늠하지 못한 것이야말로 가장 큰 실책이었을까. 이렇게 보면 비극의 화근은 외국 무기를 판매하던 인물을 공직에 입문케 한 10년 전에 이미 잉태된 것이라고 봐야 할 듯하다.
공교롭게도 그의 형인 김진 전 사장 역시 광고회사와 협력업체 등으로부터 억대 금품을 수수한 혐의로 1년6개월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한 바 있다. 수사가 시작된 후 김 전 처장은 가까운 지인들에게 “내가 김구 손자가 아니었어도 검찰이 나를 이렇게 캤겠나. 떠들썩한 언론보도로 성과를 과시하려는 한건주의 아니냐”며 불만을 토로한 것으로 전해진다. 어떤 식으로든 벗어날 수 없는 가문의 영광과 굴레. 김구 선생을 오랜 기간 연구해온 한 학계 전문가의 말이다.
“따지고 보면 이승만 정부로부터 홀대받은 이래 김구 가문은 역대 정권과 줄타기를 이어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구 선생의 뜻과 업적이 잊히지 않도록 세상에 널리 알릴 유일한 길은 ‘김구의 이미지’를 필요로 하는 정치권력을 활용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대한민국 광복사(史)의 가장 큰 영웅이지만, 그 유지를 따르는 정치세력이 없는 김구라는 인물의 비극과 고스란히 맞닿아 있는 행적이다.”
김우전. 1940년대 김구 선생의 비서로 일했고 2003년부터 광복회장을 지내기도 한 이 원로 독립운동가는 6월 26일 김구 선생의 66주기 추모식에도 예전처럼 참석했다. “금년 기일이 아주 힘들었다. 왜 하필 그날이었는지…. 생존해 있는 다른 임시정부 인사들은 나오지 않았다. 애통하기 짝이 없는 날이었다.” 청년 시절, 조국의 독립을 꿈꾸며 김구 선생과 풍찬노숙을 함께 했던 그의 한숨에 물기가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