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북한 조선노동당 제1비서와 부인 이설주가 12월 17일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 2주기를 맞아 김일성 주석과 김 위원장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태양궁전을 참배하고 있다. 이설주가 공개 행사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10월 이후 두 달여 만이다.
장성택 처형 직전인 12월 중순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떠들썩하게 달군 ‘이설주-장성택 불륜설’의 개요다. 그러나 12월 17일 열린 ‘김정일 국방위원장 2주기 추모대회’에 이설주가 모습을 드러내면서 이야기는 급속도로 세간의 관심에서 사라졌다. 최소한 이설주가 장성택과 함께 숙청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상황을 복기해보면, 불륜설에 불을 댕긴 첫 단초는 12월 9일 북한 ‘조선중앙통신’이 열거한 장성택의 죄목 중 한 대목이다. ‘여러 여성과 부당한 관계를 가졌으며 고급식당의 뒷골방에서 술 놀이와 먹자판을 벌였다’는 문장이 그것. 12월 11일 오전 한 중앙일간지는 ‘대북소식통’을 인용해 ‘(해당 성추문 내용은) 8월 처형된 은하수 관현악단 단원들을 지칭하는 것’이라며 ‘장성택이 연회를 즐기면서 은하수악단이 기쁨조 역할을 했다’고 전했다. 기사를 작성한 사람은 정보당국발(發) 단독기사로 정평이 난 베테랑 기자였다.
발랄한 상상력의 결과물?
이날 오전부터 유포된 증권가 정보지들은 은하수악단 출신인 이설주를 구체적으로 지목해 장성택과의 성추문 당사자라고 거론하기 시작했다. 맨 먼저 이 내용을 담은 정보지가 무엇인지 확인이 불가능할 만큼 동시다발적으로 유사한 내용이 쏟아진 것. 한 정보지 제작 관계자는 “출처는 알려줄 수 없다”면서도 “다른 정보지에 올라온 흥미 위주 내용을 베껴서 올리는 경우도 있지만, 비슷한 내용이 거의 시차 없이 등장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라고 말했다.
이날 오후 1시경 한 주간신문이 ‘북한 소식통’을 인용해 불륜설을 구체적으로 기사화해 인터넷에 올렸다. 일단 세상 밖으로 나온 기사는 온라인 매체들의 기사복제 과정을 거쳐 순식간에 인터넷을 뒤덮었다. 이튿날부터는 주요 중앙언론도 불륜설을 기사로 다루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홍수였다.
그렇다면 불륜설은 그저 증권가 정보맨들의 ‘발랄한 상상력’이 만들어낸 결과물이었을까. 복수의 여권 핵심 관계자는 “12월 11일 이전에 정보당국으로부터 관련 내용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고 말했다. 눈여겨볼 대목은 단순히 ‘두 사람의 불륜’이라는 착안뿐 아니라, 전체 스토리라인과 세부사항까지 정보지를 통해 나돌았던 것과 사실상 같았다는 것이다. 다만 여권 관계자들은 “‘이것이 팩트’라는 뉘앙스는 아니었다. ‘그럴 개연성도 있지 않겠느냐’는, 한마디로 힘이 실리지 않은 언급이었다”고 전했다. 장성택 축출이 확인되면서 쏟아진 다양한 배경 분석 가운데 제기된 ‘낮은 수준의 가설’이었다는 취지다.
이렇게 놓고 보면 이설주-장성택 불륜설을 가장 먼저 제기한 것은 증권가 정보지가 아니라 정보당국이 되는 셈이다. 불륜설 자체의 사실 여부보다 오히려 이 이야기가 정보당국과 국회 담장을 넘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 과정 자체가 훨씬 의미심장한 이유다.
최근 국가정보원 관계자들이 북한 붕괴 개연성을 심도 깊게 거론하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에 가깝다. 대표적인 것이 남재준 국정원장이 직원들에게 강조해왔다는 이른바 ‘새벽론’. “국정원 임무는 조국의 새벽을 준비하는 것이며, 이는 곧 다가올 통일의 기반을 조성하는 것”이라는 게 그 주요 내용으로 알려졌다. 북한 정권의 변화에 대비하는 방향으로 조직 역량을 모아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박근혜 정부 들어 정보당국은 국회 정보위원회나 언론을 통해 북한의 권력 변화에 관한 정보를 신속히 공개해왔다. 평양 권력핵심의 도덕적 타락이나 호화사치 풍조는 가장 자주 거론되던 주제다. 대표적인 사례가 앞서 언급한 은하수악단 단원 10여 명의 총살사건. 10월 초 일본 언론을 통해 사건 내용이 전해지고 ‘이설주도 관련 있다’는 이야기가 떠돌자, 국정원이 직접 이에 ‘힘을 실어준’ 바 있다.
10월 8일 남재준 원장은 국회 정보위원회에서 “(단원 처형사건은) 우리도 파악한 내용”이라고 발언했다. 이설주 관련설에 대해서는 “확인된 바 없다”고 선을 그었지만, 정보위 관계자들에 따르면 총살설 관련 내용은 당초 국정원이 정보위원들에게 배포했다가 회수한 서면 보고자료에도 포함돼 있었다. 단순히 현장에서 위원들 질문에 답하느라 나온 말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윗사람의 뜻’에 쏠리는 분위기
국회 정보위원회 위원들이 북한 장성택 실각과 관련해 12월 6일 국회에서 열린 전체회의에서 남재준 국가정보원장의 보고를 받고 있다.
그러나 반론도 만만치 않다. 정보 분야를 연구해온 한 학계 전문가는 “최근의 개혁 논의와 관련해 국정원 조직 차원의 이해관계가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닌지 주의해야 한다”고 말한다. 북한의 불안정 징후가 확산할수록 거꾸로 국정원의 존재가치나 중요성은 높아지므로, 개혁 논의 활성화 차단 효과를 기대한 것일 수 있다는 뜻이다. 그는 “장성택 처형 소식과 함께 국회 국정원 개혁특위 논의가 지지부진해진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느냐”고 덧붙였다.
장성택 실각이 처음 알려진 과정도 같은 관점에서 볼 수 있다. 익명을 요구한 전직 정부 관계자는 “엄밀히 말해 장성택 실각 같은 사안은 국가안보실이 각 부처의 정보판단을 종합해 대응 방향 논의까지 진행한 다음 청와대 이름으로 공개하는 것이 옳다”고 말한다. “대북정보에서 국정원이 독점적 위치에 있다 보니 청와대 참모진을 우회해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하려는 욕구가 늘 적지 않았다”는 것. 또 다른 전직 안보당국 핵심 관계자의 말이다.
“대북심리전 문제는 시각에 따라 판단이 다를 수 있다. 문제는 경향성이다. ‘윗사람의 뜻’이 무엇인지 공공연해지면 조직 전체 분위기가 그리로 쏠리는 건 정보기관의 본질적 특성이다. 사안 대부분을 불안정 징후로 해석하고 반대 징후는 무시하는 일이 반복되는 식이다. 따지고 보면 부시 행정부 당시 미 중앙정보국(CIA)이 이라크 대량살상무기 정보 판단에 처참하게 실패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정보조직이 정치 바람에 쉽게 휩쓸리는 한국에서 이런 경향은 더 강할 수밖에 없다.”
북한 체제 붕괴가 정말로 코앞에 있고 지금이 한반도의 명운을 가를 기로라면, 정보기관의 정교하고 냉정한 태도가 더더욱 필수적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정보당국의 존재 이유는 차가운 정보판단으로 대통령의 결정을 보좌하는 것이기 때문. 이것이야말로 말초적 호기심만 자극하고 사라진 ‘불륜설 헛소동’ 뒤에 남은 무거운 교훈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