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사망 2주기를 하루 앞둔 12월 16일 금수산태양궁전 광장에서 열린 충성맹세대회에서 최룡해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앞줄 가운데)이 맹세문을 선창하고, 다른 참석자들이 복창하고 있다. ‘조선중앙통신’은 북한군이 김정은 조선노동당 제1비서를 결사옹위할 것을 다짐했다고 전했다.
북측 언론이 전한 대로 장성택은 정말 김정은 체제를 전복하려 했던 것일까. 아이러니하게도 이 질문은 향후 핵 정책을 포함한 김정은 체제의 군사노선이 어디로 향할지 엿볼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특정 인물의 사형을 정당화하려고 북한 당국이 판결문을 공개한 것은 1955년 남조선노동당(남로당) 수장이던 박헌영을 국가전복혐의로 사형에 처하면서 재판기록을 공개한 이후 처음이다. 그리고 그 내용은 베일에 싸여 있던 김정은 체제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김정은 조선노동당 제1비서가 후계자로 내정된 2009년 이후 물밑에서 진행된 권력 엘리트 집단 간 노선 투쟁이나 당과 군부의 이해관계도 고스란히 묻어난다.
장성택 vs 이영호 충성경쟁 유도
2008년 8월 뇌중풍으로 쓰러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현업에 복귀하기 전 가장 먼저 한 일은 3남 김정은을 후계자로 내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가장 큰 고민은 자신의 건강을 고려할 때 김정은의 후계자 유일지도체제를 완성할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이 때문에 김정일은 권력 공백을 메울 엘리트 집단의 후견을 기획했다. 2010년 6월 장성택을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임명해 백두혈통 후견인으로 삼았고, 같은 해 9월 김정은을 후계자로 공인하면서 군부의 신망이 두터운 이영호를 군부 대표주자로 내세웠다. 두 사람의 충성경쟁을 유도하는 구도였다.
당과 공안기구를 대표하는 장성택, ‘신군부’를 대표하는 이영호. 두 사람의 충성경쟁은 이후 북한이 대외관계에서 도발과 대화를 규칙적으로 반복한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예컨대 2010년 3월 천안함 폭침 이후 김정일은 5월과 8월 중국을 연이어 방문해 국제사회에 대화를 제의했다. 2010년 11월 연평도 포격 이후에도 그는 2011년 5월과 8월 중국, 러시아를 방문해 조건 없는 대화를 제의했다. 계속되는 정책 혼선이었다.
이러한 흐름은 김정일이 죽고 김정은이 최고지도자가 된 후에도 이어졌고, 핵을 포함한 대량살상무기 개발과 관련해서도 나타났다. 2012년 초 북한은 미국과의 2·29합의를 통해 핵실험 중단과 영양 지원을 이끌어냈지만 4월 들어 장거리로켓 발사를 감행하면서 무위로 돌아갔다. 2013년 상반기에는 3차 핵실험과 개성공단 폐쇄로 도발을 시도했다가, 하반기에는 다시 대화 분위기로 국면 전환에 나섰다. 갈 지(之) 자 행보가 이어지면서 북한 대외정책 전략·전술에 대해 다양한 추측이 쏟아졌다.
당과 군부의 이 같은 상반된 행동은 경제권을 둘러싼 이들의 이해관계와 관련이 깊다. 선군정치의 혜택으로 군 단위별로 자체 무역회사를 소유하던 군부는 북한 내에서 유통되는 외화의 70%를 장악했을 정도로 튼튼한 경제적 기반을 갖췄다. 그에 따라 군부는 대외관계가 어떻게 변화하든 중국과의 무역을 통해 달러를 벌어들일 수 있었다. 김정은 후계체제의 안정적 구축과 선군기반 강화를 위해 핵과 장거리 미사일로 대외적 긴장을 고조해가면서 정국 주도권을 쥐려고 시도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반면 장성택을 중심으로 한 당은 처지가 달랐다. 경제적 기반이 약했던 만큼 황금평, 위화도, 나선(나진·선봉), 개성공단 등 경제특별구역을 지정해 해외 투자를 유도해야 ‘다른 길’을 모색할 수 있었다. 물론 이러한 투자 유치를 위해서는 대외관계 안정이 필수적이다. 이 때문에 이 그룹은 핵실험이나 미사일 발사에 소극적이었고, 미국과의 협상을 중요하게 인식할 수밖에 없었다.
북한 당국이 공개한 장성택의 국가전복음모행위 내용을 분석해보면 이러한 구도를 확인할 수 있는 단서가 곳곳에 박혀 있다. 국가전복음모의 첫 번째 단계는 먼저 경제를 장악하려고 모든 경제기관을 내각에 집중하는 것이라고 지적한 대목이다. 두 번째 단계에서 군사정변을 일으킬 때도 경제문제를 해결하면 군부도 쿠데타에 동조할 것임을 지적하는 부분 역시 마찬가지다.
양측 경쟁이 권력투쟁으로 확대된 것은 2012년 4월 6일 김정은이 이른바 4·6담화를 통해 모든 경제권을 내각으로 이전하라고 지시한 일이 결정적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그간 군부가 장악하던 무역회사 ‘와크권’(무역 물량)을 빼앗기게 됐기 때문. 군부는 이를 저지하려고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장성택이 ‘내각 주도의 경제를 빌미로 모든 이권을 제 마음대로 좌지우지함으로써 오히려 내각을 무력화’했으며, ‘평양시 건설을 방해’했고, ‘석탄 등 국가의 귀중한 지하자원을 헐값에 팔아넘겼다’는 공격 논리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가 주도한 경제특별구역 확대도 경계 대상이었다. 나선특구 등 대외개방 정책을 ‘외국에 국가 재산을 팔아먹은’ 매국행위로 지목한 이유다.
장성택의 혐의 내용에서 눈에 띄는 대목 한 가지는 대외관계에 대한 그의 노선을 비판하는 부분이다. 군부가 핵과 장거리로켓으로 선군정치를 강화할 때 대화를 주장한 그의 행위를 두고, 미국의 ‘전략적 인내’에 편승해 추후 쿠데타를 벌여 정권을 획득하면 외국으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도록 준비한 사전조치였다고 비난한 것이다. 이러한 언급은 향후 평양이 상당 기간 미국과의 협상이나 대화에 유보적인 태도를 보일 것으로 예상할 수 있는 근거다. 앞으로는 이를 주장하는 이들마다 ‘장성택 노선을 추종한다’는 올가미를 거는 게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두 엘리트 보호막 스스로 걷어차
장성택 전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의 처형 관련 내용을 게재한 북한 ‘노동신문’ 12월 13일자 2면. 판결에 대한 보도문과 함께 국가 안전보위부 특별재판에 나온 장성택의 사진도 함께 실었다.
결과적으로 최근 북한의 권력 지형은 김정은 1인 지배체제가 강화됐다기보다 장성택 처형이 만들어낸 권력 공백을 최룡해 중심의 군부와 김원홍, 조연준 등 공안 및 조직지도부가 메우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다시 말해 장성택 제거는 김정은 1인 지배체제를 굳히려는 조치라기보다 장성택에게 과도하게 집중된 권력을 찬탈하고자 벌인 반(反)장성택 연합의 승리로 해석할 수 있다.
문제는 앞으로 장성택이 쥐었던 경제 이권을 재분배하는 과정에서 권력 엘리트 간 훨씬 치열한 권력투쟁이 벌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이를 덮고자 4차 핵실험 같은 무력시위를 벌여 외부와의 긴장을 다시 조성하리라는 예측도 가능하다. 이렇게 보면 자신의 지도체제를 확립하지 못한 김정은이 권력층 내부에서 가장 노련했던 장성택과 신망이 가장 두터웠던 이영호를 숙청한 것은 자신의 방패를 스스로 걷어찬 것이나 다름없다. 그 결과가 김정은 체제의 강화로 이어질지 권력 붕괴로 이어질지 단언하긴 이르지만, 김정일이 어린 아들에게 물려준 최고의 유산이 선군정치나 강성대국이 아닌 두 엘리트의 보호막이었음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최소한 아버지가 아들보다는 현명했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