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저 예술의 자유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봉준호 감독은 나의 새로운 가족이다. 봉준호는 힘든 촬영을 무사히 이끌어가는 가장인데, 좀 어린아이 같은 구석이 있는 가장이다. 그의 급진적 관점뿐 아니라 논리적이면서도 로맨틱한 비관주의를 사랑한다.” 배우 틸다 스윈턴의 말이다.
봉준호 감독(사진)은 매 작품에 자신이 상상한 세상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재현해내고 그 안에 통렬한 세계관과 풍자, 사람에 대한 애틋함을 담는다. 디테일한 ‘연출의 끝’을 보여준다 해서 ‘봉테일’로 불리기도 하고, 특정 영화 장르에 얽매이지도 않는다. 누군가는 그를 두고 ‘봉준호 장르의 창시자’라고 부른다. 영화감독에게 주어지는 최고 찬사라 할 만하다. 봉 감독의 신작 ‘옥자’가 얼마 전 막을 내린 제70회 칸영화제에서 그 베일을 벗었다.
“미야자키 하야오에게 ‘옥자’ 보여주고 싶어요”
5월 28일 칸영화제 폐막식이 열린 프랑스 뤼미에르 극장에서 ‘봉준호’라는 이름은 끝내 호명되지 않았다. 2010년 이창동 감독의 ‘시’가 각본상을 받은 이후 칸영화제에서 줄곧 무관에 그친 한국 영화는 올해 봉 감독의 ‘옥자’와 홍상수 감독의 ‘그 후’가 나란히 경쟁부문에 올라 수상 기대가 한껏 고조됐던 터라 아쉬움이 컸다. 하지만 단순히 ‘수상 실패’라는 결과만으로 영화 ‘옥자’를 재단하기는 어렵다.‘옥자’는 시골 소녀 미자(안서현 분)와 소녀의 오랜 친구이자 거대한 괴수인 옥자의 눈물겨운 우정을 그린 영화. 다국적 기업 미란도가 옥자를 탈취하면서 옥자를 구출하고자 고군분투하는 미자의 여정을 담고 있다. 지극히 한국적이고 투박한 주인공의 이름을 과감하게 영화 제목으로 내세운 것이나, 시놉시스가 공개된 후에도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영화 스토리 덕에 ‘옥자’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감은 한껏 부풀어 올랐다. 봉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영화와 관련해 힌트를 슬쩍 남기기도 했다.
“한때 한국을 떠들썩하게 한, 산골소녀 영자 사건에 대한 강렬한 기억이 바탕이 됐어요. 미자와 옥자라는 주인공 이름도 그때 지었죠. 굳이 구분하자면 ‘옥자’는 사랑 이야기예요. 저의 첫사랑 영화. 흔히 소녀와 동물이라고 하면 디즈니 같은 그림을 떠올리기 쉽지만, 저의 과거 영화를 봤다면 그런 기대는 없을 거예요.”
거대한 괴수로 알려진 옥자의 정체와 관련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하마와 돼지를 합쳐놓은 듯한 모습을 한 옥자는 애초 알려진 것처럼 유전자 조작과 관련된 것이 아닌, 돼지의 자연적 돌연변이다. 하지만 영화를 관통하는 메시지에는 분명 현대사회와 그 안에서 살아가는 동물을 바라보는 안타까운 시선이 담겨 있다.
“동물들 역시 자본주의에서 느끼는 피로와 고통이 있을 거예요. 그것에 대해 찍었어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과 유사하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는데, 자연과 생명을 얘기하면서 그의 그늘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은 일 같아요. 다만 ‘옥자’는 거기서 더 나아가 생명과 동물, 자본주의 영역을 그려보고 싶었어요. 그건 그분이 아직 가지 않은 길이고, 기회가 된다면 미야자키 하야오에게 이 영화를 보여드리고 싶어요.”
사실 수년간 ‘옥자’와 관련해 소문이 무성했다. 세계적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업체인 넷플릭스가 560여억 원에 달하는 제작비를 전액 투자하고 브래드 피트가 이끄는 영화사 플랜B엔터테인먼트가 공동제작사로 나섰다는 것, 또 극장이 아닌 스트리밍 서비스를 통해 전 세계에 동시 공개된다는 점에서 그 규모와 파격을 어렴풋이 짐작했을 뿐이다(한국에서는 스트리밍 서비스와 동시에 극장에서도 개봉한다).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어떠한 간섭이나 개입도 없었어요. 이렇게 큰 예산을 100% 감독 자율에 맡긴다는 것이 쉽지 않거든요. 정말 환상적이었고, 감독으로서는 행복한 작업이었습니다. 그래서 영화가 더 잘 나와야 한다는 부담도 있어요(웃음).”
극장 상영 논란이 남긴 숙제
테드 서랜도스 넷플릭스 콘텐츠 최고책임자는 “‘옥자’는 내 커리어에서, 넷플릭스 역사에서 가장 놀라운 일”이라며 봉 감독과의 작업을 회상했다. 또 제러미 클레이너 플랜B엔터테인먼트 프로듀서는 “봉 감독은 영화계의 위대한 아티스트이자 장인이라고 생각한다. ‘옥자’ 대본을 운 좋게 볼 수 있었고, 놀라운 작품이라는 데 이견이 없었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기대는 ‘옥자’가 칸영화제에 초청되면서 최고조에 달했다. ‘옥자’는 넷플릭스가 제작한 영화 가운데 최초로 칸영화제에 초청된 작품이다.영화를 칸에서 선보이기까지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프랑스 극장협회가 영화제 개막 전 ‘극장 상영을 하지 않는 영화는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할 수 없다’는 취지의 성명을 발표했고, 넷플릭스 영화인 ‘옥자’가 후보에서 배제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 이에 칸영화제 측은 “경쟁부문 후보의 배제는 없다”면서도 “어떤 영화든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하려면 프랑스 극장에서 상영을 약속해야 한다”는 새로운 규칙을 제정했다.
사실상 내년부터는 극장 영화만 경쟁부문 진출을 허용한 것이다. 경쟁부문 심사위원장을 맡은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은 개막식 기자회견에서 “극장에 걸리지 않는 영화에 황금종려상이 돌아간다는 것은 엄청난 역설”이라며 마치 ‘옥자’를 겨냥한 듯한 발언을 해 논란을 증폭했다. 봉 감독은 칸으로 떠나기에 앞서 “불타는 프라이팬 위의 생선이 된 기분”이라며 당시 심경을 밝히기도 했다.
“결국에는 (스트리밍과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방식이) 공존할 것이라고 봐요. 지금은 어떻게 공존하는 것이 아름다운지를 찾아가는 과정 같아요. 이번 논란은 그 과정에서 벌어진 작은 소동일 뿐,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아요. 빨리 영화가 공개돼 영화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논란은 영화가 첫선을 보인 기자 시사회장에서도 이어졌다. 스크린의 마스킹이 완성되지 않아 화면이 왜곡됐고, 이에 관객들이 야유를 보낸 것이다. 결국 영화는 잠시 중단됐다 재상영되는 해프닝을 겪었다. 이 일로 칸영화제 집행위원회는 공식 인터넷 홈페이지에 ‘이번 사고는 전적으로 영화제 책임으로 봉 감독과 제작진, 프로듀서, 관객 여러분에게 사과드린다’는 사과문을 게재했다.
다행히 야유로 시작한 ‘옥자’의 공식 상영회는 환호와 호평으로 마무리됐다. 이로써 봉 감독은 ‘플란다스의 개’ ‘살인의 추억’ ‘괴물’ ‘마더’ ‘설국열차’에 이은 자신의 여섯 번째 장편영화의 화려한 신고식을 마쳤다. 도무지 통일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의 궤적에서 ‘옥자’는 또 한 번 한계가 없는 봉 감독의 상상력을 유감없이 보여줄 것으로 보인다. 덧붙여 영화를 보는 새로운 방식에 대한 화두를 우리에게 던져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