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마산상고 감독을 맡으며 지도자로 첫발을 내딛었다. 호적상 42년생이니 스물일곱 살 때였다. 올해 5월 23일 한화 이글스 감독을 사임했다. 75세. 감독이라는 직업을 48년 만에 내려놓았다.
‘야구의 신’이라는 최고 찬사까지 받았던 김성근 감독의 마지막 퇴장은 쓸쓸하기만 했다. 2014년 말 김 전 감독과 한화의 계약이 발표됐을 때 많은 야구인이 “‘영감님’(상당수 야구인은 김 전 감독을 이렇게 부른다)이 프로로 돌아오지 않고 고교 선수들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낸다면 진짜 ‘야구의 신’으로 남을 텐데…”라는 반응을 보였다.
한화에서 보낸 3년여 기간에 노장의 열정은 노욕이라는 참을 수 없는 악평으로 바뀌었다. 선수의 야구인생을 망친다는 혹사 논란은 김 전 감독 곁을 떠나지 않았다. 구단은 우승을 바라며 아낌없이 지원했지만 단 한 번도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지 못했다. 선수 육성에도 실패했다. 2011시즌 중 SK 와이번스에서 경질됐을 때 불 꺼진 인천문학구장(현 인천SK행복드림구장) 마운드에서 유니폼을 불태우며 눈물 흘렸던 팬들은 이제 없다.
7개 프로팀에서 격한 갈등과 해임
김 전 감독은 프로야구 출범 전 마산상고와 기업은행, 충암고, 신일고에서 지도자 생활을 했다.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하자 같은 재일교포 출신인 김영덕 감독이 사령탑을 맡은 OB 베어스(현 두산 베어스) 코치로 프로 유니폼을 입었다.
김 전 감독은 일본 교토에서 태어난 제일교포 2세대다. 1959년 제4회 재일동포 학생 모국 방문 경기 때 처음 한국 땅을 밟았다. 실업야구선수 시절 그는 한국어가 서툴러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일본어 덕에 ‘선진야구’를 그 누구보다 빠르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프로야구 초창기 일본 야구이론서는 선진야구를 배울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통로였다.
뛰어난 지도능력을 인정받은 김 전 감독은 1984년 OB 2대 감독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우승에는 실패했고 구단과 격한 대립 끝에 1988시즌 중 재계약 불가 통보를 받았다. 첫 불명예 퇴진이자 구단과 갈등이었다. 이후 김 전 감독과 구단의 마찰은 계속됐다. 경질, 해임도 뒤따랐다.
1989년 태평양 돌핀스 감독을 맡아 인천 야구의 부활을 이끌며 큰 인기를 누리기도 했지만, 역시 구단과 훈련수당 지급 등을 놓고 싸우다 1990시즌을 끝으로 팀을 떠났다. 김 전 감독은 91년 삼성 라이온즈 감독으로 화려하게 컴백했다. 그러나 성적 부진으로 1992시즌이 끝난 뒤 해임된다. 이후 96년 쌍방울 레이더스 감독을 맡아 신생팀 돌풍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1999시즌 중반 해임된다. 2001년에는 LG 트윈스 2군에서 감독대행을 맡았고 2002년 1군 감독이 돼 한국시리즈까지 진출했지만 또 한 번 구단 경영진과 갈등을 빚어 해임된다.
당시까지 김 전 감독은 약한 팀의 체질을 바꿀 수는 있어도 우승은 못 하는 감독이라는 평가가 뒤따랐다. 구단과 잦은 마찰로 더는 불러주는 팀도 없었다. 김 전 감독은 일본 지바 롯데 마린스에서 정식 코치를 맡는 등 절치부심했고, 2007년 SK 사령탑을 맡아 생애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맛봤다. 탄탄한 선수층을 자랑하는 SK에서 김 전 감독은 3차례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2011시즌 중 구단과 갈등하며 ‘시즌 종료 후 자진사퇴’ 카드를 꺼냈다 경질됐다. 김 전 감독은 2011년부터 2014년까지 독립구단 고양 원더스 사령탑을 맡아 야구계를 넘어 사회적 명사이자 멘토로 떠올랐다. 청와대에서 강연할 정도로 최고 인기 강사이기도 했다.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큰 이슈가 됐고, 프로야구를 향한 쓴소리도 박수를 받았다.
화려한 복귀, 쓸쓸한 퇴장
2015시즌 김 전 감독은 팬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한화 감독으로 KBO리그에 돌아왔다. 한화구단은 자유계약선수(FA)시장에 나온 최고 선수들을 싹쓸이했고, 외국인 선수도 언제나 특급 자원을 영입했다. 우승을 위해 모든 준비가 끝난 것처럼 보였다.그러나 김 전 감독이 팀 운영 전권을 쥐자 여기저기서 불협화음이 나오기 시작했다. 시즌 중 외국인 코치들이 비정상적인 운영을 비판하며 팀을 떠나기도 했다.
김 전 감독은 투수를 혹사한다는 비판을 끊임없이 받아왔다. 김 전 감독의 재임 기간 불펜투수 40명이 1210차례나 등판했다. 리그 최고 기록이다. 불펜투수의 경기당 투구 수는 81.1개에 달했다. 연이어 부상자가 나왔고 권혁, 송창식, 이태양 등이 모두 수술을 받았다. 2군 선수들을 지도하겠다며 1군으로 불러 수백 개씩 불펜투구를 하게 한 방식도 논란이 됐다. 또한 김 전 감독이 즉시 전력인 FA 영입을 계속해서 요청해 팀의 미래인 유망주를 제대로 육성하지 못했다.
구단과 갈등도 문제였다. 외국인 선수 교체 과정에서 김 전 감독이 “구단에 돈이 없는 것 같다”고 말해 한화구단 경영진이 경악하기도 했다. 또 “선수가 없다”는 말에 선수들은 상처를 받았다. 언론 대응도 김 전 감독이 전권을 쥐고 있었다. 일례로 한화구단 프런트는 부상 선수에 대한 의료진의 진단을 언론에 발표할 때도 김 전 감독으로부터 허가를 받아야 했다.
한화는 2016시즌 종료 후 LG 감독을 역임한 박종훈 NC 다이노스 육성이사를 단장에 임명했다. OB에서 선수와 감독으로 만난 박 단장과 김 전 감독은 이후 극심한 마찰을 빚었다. 두산 2군 감독 시절부터 선수 육성에 탁월한 능력을 보인 박 단장은 한화에서 1, 2군을 엄격히 구분하는 시스템을 도입했다. 1군 감독은 1군 경기에 전력을 다하고, 구단이 2군을 육성 시스템으로 관리한다는 것이 원칙이었다.
박 단장은 2군 선수를 1군으로 불러 훈련시키는 김 전 감독 특유의 지도방식을 금지했다. 하지만 김 전 감독은 5월 21일 다시 한 번 2군 선수를 직접 보고 판단하겠다며 충남 서산 2군 전용훈련장에서 대전 한화생명이글스파크로 이동을 지시했다. 박 단장은 이를 거부했다. 김 전 감독은 “이런 환경에서 더는 감독을 못 하겠다”고 발언했고, 스스로 한화그룹 프로야구 담당 고위임원에게 전화해 이 같은 내용을 전달했다.
그러나 김 전 감독 퇴임은 본인이나 구단, 그룹 모두가 원치 않던 결과다. 한화그룹 담당 임원은 김 전 감독을 직접 만나 만류하고자 5월 23일 급히 서울에서 대전으로 향했다. 김 전 감독의 사퇴카드는 박 단장과 파워게임에서 던진 승부수였다. 그러나 언론에 이 내용이 보도되자 한화구단은 김 전 감독의 사퇴를 수용했다.
김 전 감독의 퇴임은 KBO의 흐름이 메이저리그처럼 감독이 아닌 단장 중심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앞으로 KBO리그에서 김 전 감독처럼 전권을 가진 감독은 존재하기 어렵다. 최근 흐름은 감독은 그라운드에서 지휘하는 장수 구실에 전념하고, 팀 설계는 단장이 맡는 프런트 야구가 대세이기 때문. 김 전 감독의 퇴임은 프로야구 1세대의 퇴장으로 평가된다. ‘제왕적 감독’ 시대는 이제 마침표를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