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시계를 뒤로 돌려보자. 2009년 4월 5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체코의 수도 프라하에서 새벽잠을 설쳐야 했다. 북한이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했기 때문이다. 이날은 마침 오바마 대통령이 ‘핵 없는 세계’에 대한 구상을 발표하기로 한 날이었다. 그간 백악관이 야심차게 추진해온 구상이 발표 예정일 새벽부터 북한의 미사일 발사로 시험대에 오른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관련 보고를 받으면서 아마도 평양이 자신을 시험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2008년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 과정에서 힐러리 클린턴 후보에게 압박을 받았던 기억을 함께 떠올렸을지도 모르겠다. 당시 힐러리 후보는 “새벽에 안보상황을 보고받고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며 “오바마 후보는 그러한 위기관리 능력이 부족하다”고 질타했다. 당시 “북한과 대담한 대화를 나눌 것”이라고 응수했던 오바마 대통령은 예상과 달리 취임 이후 대북 무시정책으로 일관했다. 워싱턴 조야에서는 이를 두고 취임 직후부터 북한에 의해 시험대에 올라야 했던 경험이 만들어낸 거부감 때문이라는 분석이 흘러나왔다.
2년 8개월이 지난 2011년 12월 19일. 이미 자정이 지난 시각에 백악관 참모들은 잠자리에 든 오바마 대통령을 깨웠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사망 소식을 보고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후 미국 정부의 대응은 냉정했다. 북한에 대한 차분한 관찰을 주문했고, 클린턴 국무장관은 북한 주민에게 위로의 뜻을 표했다.
미국의 아시아 재개입 또 다른 시험대
수년 전부터 미국은 김 위원장의 사망을 북한의 급변사태 요인 가운데 하나로 설정하고 군사적 대비를 비롯한 각종 조치를 수립해둔 바 있지만, 정작 그런 일이 벌어졌는데도 한미연합사령부의 전투준비태세인 데프콘을 격상시키지 않은 채 평상시 수준을 유지했다. 2009년 4월의 새벽 보고가 오바마 정부의 대북정책을 무시정책으로 바꾸는 계기가 됐다면, 2011년 12월의 심야 보고는 무시정책에서 대화전략으로 굳히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백악관의 눈으로 보자면, 김 위원장 사후 북한의 불확실성이 확대돼 중국이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해나가는 것을 방치할 수는 없다. 그간 오바마 정부의 대외정책에서 대북정책은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이는 두 개의 전쟁과 중동 민주화 시위의 비중이 훨씬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 정부가 2011년 11월 ‘아시아·태평양지역으로의 선회’를 선언한 상황에서 김 위원장의 사망은 미국의 이러한 재개입(reengagement) 정책에 관한 또 다른 의미의 시험이 되고 있다.
워싱턴이 아시아에 외교역량을 집중하겠다고 나선 최근의 흐름은 베이징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미국은 이미 지난 1~2년간 한국, 일본, 베트남 등 동북아, 동남아 각국과 각종 해상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훈련을 실시한 해역은 모두 중국과 접한 서해, 동중국해, 남중국해였다. 천안함 침몰과 연평도 포격 이후에는 사상 처음으로 미국의 핵추진 항공모함인 조지워싱턴호가 동해와 서해에서 실시된 한미해상합동훈련에 참가했다.
김 위원장의 사망은 불확실한 북한의 정세를 안정시켜야 한다는 미국과 중국의 공통된 이해관계를 만들어냈다. 물론 동상이몽이다. 중국은 북한 정세가 혼란스러워져 대규모 난민이 발생하는 상황을 원치 않는다. 2020년까지는 북한이 안정 상태를 유지해야 샤오캉(小康) 사회 건설이라는 자신의 국가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미국이 개입할 만한 혼란 상황이 북한에 발생해 중국의 동북 국경지역에서 긴장이 고조되는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피하고 싶은 최악의 시나리오다.
이 때문에 중국은 김정은 체제를 인정하고 나선 첫 번째 국가가 됐다. 후진타오 국가주석은 차기 중국 지도자인 시진핑 부주석을 대동하고 베이징 주재 북한대사관을 방문했다. 중국 정부는 “김정일 동지의 서거에 비통한 심정”이라면서 “김정은의 영도를 중심으로 단결”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일각에서는 김 위원장 사망을 계기로 북한에서도 민주적 정권교체가 이뤄지리라는 희망사항을 제기하지만, 중국은 이를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가까운 시일 안에 김정은 체제와 든든한 유착관계를 대외적으로 과시할 가능성이 더 커 보인다. 급변사태가 벌어질 가능성보다 오히려 중국의 대북(對北) 지원이 강화될 공산이 큰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간다면 워싱턴 역시 대외정책에서 북한에 대한 우선순위를 높일 수밖에 없다. 그간 북한은 공공연히 핵능력을 증강해왔고, 미국은 2011년 초부터 이에 대한 위기의식을 뚜렷이 표명해왔다. 2011년 1월 미·중 정상회담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후진타오 주석에게 “북한의 잠재적 공격으로부터 ‘미국 국토(American soil)’를 보호해야 한다”고 잘라 말했다. 이 회담을 사전에 조율하려고 중국을 방문한 로버트 게이츠 당시 미국 국방장관은 “북한이 ‘미국 본토’를 공격할 수 있는 한정된 능력을 5년 내에 개발할 위험이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북한의 위협을 상향 평가한 오바마 행정부가 다음으로 택한 행보는 북한과의 대화 시도다. 이를 위한 여건 마련 차원에서 대북 식량지원까지 검토했지만 의회를 장악한 공화당의 반대 때문에 쉽지 않았을 뿐이다.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로버트 킹 미국 대북 인권대사가 2011년 5월 말 국무부 산하 국제개발처(USAID)의 존 브라우스 부국장과 함께 북한을 방문했다는 사실이다. 브라우스 부국장은 식량지원 전문가이자 능숙한 협상가다. 이들의 방북이 공화당 등의 반대를 피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려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이유다.
북한 체제 연착륙의 중대 변수
킹 인권대사와 이근 북한 외무성 미주국장이 북미 대화 재개에 대한 합의를 도출한 것은 공교롭게도 김 위원장의 사망 하루 전인 2011년 12월 16일이었다. 북한은 우라늄 농축활동을 중단하고 미국은 북한에 대해 식량공급이 아닌 비스킷과 비타민 등 ‘영양지원’을 한다는 게 그 골자다. 그리고 김 위원장의 사망이 발표된 지 하루 만에 양국은 뉴욕에서 다시 접촉을 가졌다.
이렇게 놓고 보면, 결국 2011년 1월부터 미국 내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한 북한과의 대화 재개 움직임은 김 위원장 사망을 계기로 오히려 급물살을 탈 가능성이 더 커 보인다. 워싱턴은 김정은 체제를 ‘새로운 리더십’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비록 동상이몽이기는 하지만, 중국과 미국의 이러한 북한 접근은 김정은 체제의 연착륙에 중대한 변수로 작용할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관련 보고를 받으면서 아마도 평양이 자신을 시험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2008년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 과정에서 힐러리 클린턴 후보에게 압박을 받았던 기억을 함께 떠올렸을지도 모르겠다. 당시 힐러리 후보는 “새벽에 안보상황을 보고받고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며 “오바마 후보는 그러한 위기관리 능력이 부족하다”고 질타했다. 당시 “북한과 대담한 대화를 나눌 것”이라고 응수했던 오바마 대통령은 예상과 달리 취임 이후 대북 무시정책으로 일관했다. 워싱턴 조야에서는 이를 두고 취임 직후부터 북한에 의해 시험대에 올라야 했던 경험이 만들어낸 거부감 때문이라는 분석이 흘러나왔다.
2년 8개월이 지난 2011년 12월 19일. 이미 자정이 지난 시각에 백악관 참모들은 잠자리에 든 오바마 대통령을 깨웠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사망 소식을 보고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후 미국 정부의 대응은 냉정했다. 북한에 대한 차분한 관찰을 주문했고, 클린턴 국무장관은 북한 주민에게 위로의 뜻을 표했다.
미국의 아시아 재개입 또 다른 시험대
수년 전부터 미국은 김 위원장의 사망을 북한의 급변사태 요인 가운데 하나로 설정하고 군사적 대비를 비롯한 각종 조치를 수립해둔 바 있지만, 정작 그런 일이 벌어졌는데도 한미연합사령부의 전투준비태세인 데프콘을 격상시키지 않은 채 평상시 수준을 유지했다. 2009년 4월의 새벽 보고가 오바마 정부의 대북정책을 무시정책으로 바꾸는 계기가 됐다면, 2011년 12월의 심야 보고는 무시정책에서 대화전략으로 굳히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백악관의 눈으로 보자면, 김 위원장 사후 북한의 불확실성이 확대돼 중국이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해나가는 것을 방치할 수는 없다. 그간 오바마 정부의 대외정책에서 대북정책은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이는 두 개의 전쟁과 중동 민주화 시위의 비중이 훨씬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 정부가 2011년 11월 ‘아시아·태평양지역으로의 선회’를 선언한 상황에서 김 위원장의 사망은 미국의 이러한 재개입(reengagement) 정책에 관한 또 다른 의미의 시험이 되고 있다.
워싱턴이 아시아에 외교역량을 집중하겠다고 나선 최근의 흐름은 베이징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미국은 이미 지난 1~2년간 한국, 일본, 베트남 등 동북아, 동남아 각국과 각종 해상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훈련을 실시한 해역은 모두 중국과 접한 서해, 동중국해, 남중국해였다. 천안함 침몰과 연평도 포격 이후에는 사상 처음으로 미국의 핵추진 항공모함인 조지워싱턴호가 동해와 서해에서 실시된 한미해상합동훈련에 참가했다.
김 위원장의 사망은 불확실한 북한의 정세를 안정시켜야 한다는 미국과 중국의 공통된 이해관계를 만들어냈다. 물론 동상이몽이다. 중국은 북한 정세가 혼란스러워져 대규모 난민이 발생하는 상황을 원치 않는다. 2020년까지는 북한이 안정 상태를 유지해야 샤오캉(小康) 사회 건설이라는 자신의 국가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미국이 개입할 만한 혼란 상황이 북한에 발생해 중국의 동북 국경지역에서 긴장이 고조되는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피하고 싶은 최악의 시나리오다.
이 때문에 중국은 김정은 체제를 인정하고 나선 첫 번째 국가가 됐다. 후진타오 국가주석은 차기 중국 지도자인 시진핑 부주석을 대동하고 베이징 주재 북한대사관을 방문했다. 중국 정부는 “김정일 동지의 서거에 비통한 심정”이라면서 “김정은의 영도를 중심으로 단결”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일각에서는 김 위원장 사망을 계기로 북한에서도 민주적 정권교체가 이뤄지리라는 희망사항을 제기하지만, 중국은 이를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가까운 시일 안에 김정은 체제와 든든한 유착관계를 대외적으로 과시할 가능성이 더 커 보인다. 급변사태가 벌어질 가능성보다 오히려 중국의 대북(對北) 지원이 강화될 공산이 큰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간다면 워싱턴 역시 대외정책에서 북한에 대한 우선순위를 높일 수밖에 없다. 그간 북한은 공공연히 핵능력을 증강해왔고, 미국은 2011년 초부터 이에 대한 위기의식을 뚜렷이 표명해왔다. 2011년 1월 미·중 정상회담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후진타오 주석에게 “북한의 잠재적 공격으로부터 ‘미국 국토(American soil)’를 보호해야 한다”고 잘라 말했다. 이 회담을 사전에 조율하려고 중국을 방문한 로버트 게이츠 당시 미국 국방장관은 “북한이 ‘미국 본토’를 공격할 수 있는 한정된 능력을 5년 내에 개발할 위험이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북한의 위협을 상향 평가한 오바마 행정부가 다음으로 택한 행보는 북한과의 대화 시도다. 이를 위한 여건 마련 차원에서 대북 식량지원까지 검토했지만 의회를 장악한 공화당의 반대 때문에 쉽지 않았을 뿐이다.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로버트 킹 미국 대북 인권대사가 2011년 5월 말 국무부 산하 국제개발처(USAID)의 존 브라우스 부국장과 함께 북한을 방문했다는 사실이다. 브라우스 부국장은 식량지원 전문가이자 능숙한 협상가다. 이들의 방북이 공화당 등의 반대를 피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려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이유다.
북한 체제 연착륙의 중대 변수
킹 인권대사와 이근 북한 외무성 미주국장이 북미 대화 재개에 대한 합의를 도출한 것은 공교롭게도 김 위원장의 사망 하루 전인 2011년 12월 16일이었다. 북한은 우라늄 농축활동을 중단하고 미국은 북한에 대해 식량공급이 아닌 비스킷과 비타민 등 ‘영양지원’을 한다는 게 그 골자다. 그리고 김 위원장의 사망이 발표된 지 하루 만에 양국은 뉴욕에서 다시 접촉을 가졌다.
이렇게 놓고 보면, 결국 2011년 1월부터 미국 내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한 북한과의 대화 재개 움직임은 김 위원장 사망을 계기로 오히려 급물살을 탈 가능성이 더 커 보인다. 워싱턴은 김정은 체제를 ‘새로운 리더십’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비록 동상이몽이기는 하지만, 중국과 미국의 이러한 북한 접근은 김정은 체제의 연착륙에 중대한 변수로 작용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