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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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먹계 큰형님 파란만장한 삶

  • 김현미 기자 khmzip@donga.com

    입력2003-02-20 14: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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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먹계 큰형님 파란만장한 삶
    김두한과 시라소니 사이에 일촉즉발의 위기감이 흐른다. 그러나 시라소니가 두한에게 결투를 신청하자 두한은 여유 있는 웃음을 띠며 자신이 졌다고 말한다. 두한이 진정한 싸움꾼은 싸우기 전에 상대를 아는 법이라고 말하자 시라소니는 형 아우를 확실히 해야 한다며 무릎을 꿇을 것을 요구한다. 두한은 순순히 한쪽 무릎을 꿇고 시라소니는 이에 당황한다. 2월18일 방영될 SBS 드라마 ‘야인시대’의 하이라이트 장면이다.

    이광석의 ‘시라소니 평전’ 133쪽을 펼쳐보자. 해방 후 서울의 주먹계는 김두한이 이끄는 우미관파, 이화룡의 명동파, 이정재의 종로파 등 3대 산맥으로 나뉘어 있었다. 월남한 시라소니는 우미관 바에서 우연히 김두한과 마주친다. 두한은 시라소니가 중국에서 자신의 부하를 두들겨 팬 일로 깊은 원한을 품고 있었다. “오늘이 네 제삿날이다”라며 으름장을 놓는 두한과 무표정한 채 두한의 발끝만 노려보는 시라소니. 돌연 두한이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으며 “이형, 나 오늘부터 형으로 모시겠으니 잘 도와주시오”라고 한다. 돌연한 행동에 주위사람들도 깜짝 놀랐다.

    저자 이광석씨(작고)는 이 장면 말미에 훗날 사람들이 말하기를 김두한이 시라소니에게 져서 무릎을 꿇었다고 하지만, 사실은 두 거인의 인간적인 화합이었다고 정정한다. ‘시라소니 평전’은 동아일보 체육부 기자 출신인 저자가 시라소니 이성순과 직접 인터뷰해서 쓴 논픽션으로 다른 협객소설류와 구분된다. 1980년 출간된 후 방학기 만화 ‘바람의 아들’의 텍스트가 되기도 했다. ‘김두한과 시라소니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와 같은 즐거운 상상에 빠져 있는 시청자들에게 ‘시라소니 평전’은 실제 주인공의 진술에 근거한 역사적 장면을 제공하고 있다.

    첫 장면은 1961년 5월23일, 깡패들이 속죄 가두행렬을 벌이고 있는 서울이다. 시라소니의 라이벌로 주먹의 대통령이었던 이정재가 ‘우리는 깡패입니다. 국민의 심판을 달게 받겠습니다’라는 플래카드를 걸고 굴욕적인 행진을 벌이고 있었다. 그 순간 가슴에 권총을 품은 시라소니는 교회로 발길을 옮긴다. 8년 전 그에게 집단폭행을 가했던 이정재에게 복수하기 위해 마련한 총이었지만 그날로 목사 앞에서 원한을 잊겠다고 약속한다. 이정재는 얼마 후 처형됐다.

    이후 ‘시라소니 평전’은 이성순이 1917년 신의주 부농의 아들로 태어나 개망나니로 떠돌다가 17세 무렵 가세가 기울자 밀무역에 뛰어드는 과정을 들려준다. 어린 시절의 추억과 집안 이야기, 그리고 뛰어난 격투기술을 익히게 된 과정 등이 너무 간략히 소개된 점이 불만이라면 불만이다. 그러나 이후 행적은 사건별로 비교적 상세히 기술된다.



    평전의 1장은 해방 전 중국 일대를 떠돌며 일본, 중국의 주먹들과 겨루던 청년기 시라소니의 행적을 쫓고, 2장은 해방 후 고향 신의주로 돌아왔던 시라소니가 공산주의에 염증을 느끼고 월남하는 이야기다. 이념을 사이에 두고 주먹들이 좌파냐 우파냐 갈라서던 시기, 시라소니는 평안도 인맥이 중심이 된 우파 조직 서북청년단을 이끈다. 3장에서는 한국전쟁과 함께 정치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시라소니의 모습이 그려지고, 4장은 이정재파의 끔찍한 기습공격을 받는 대목에서 시작한다.

    ‘시라소니 평전’은 이성순씨의 진술을 충실히 따르고 있기 때문에 역사적 평가를 내리기 어렵다. 다만 그가 공산주의가 싫어 월남한 사람들 특유의 공산주의에 대한 적개심으로 똘똘 뭉쳐 있었고, 그래서 좌익세력 소탕에 누구보다 앞장섰음은 분명히 한다. 또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김두한, 이정재, 조봉암, 이화룡, 오제도, 장도영, 신성모 등-의 모습도 모두 이성순씨의 시각에 의해 재구성했다.

    북어처럼 마른 몸에 조는 듯 늘 내리깐 눈, 새끼손가락이 없는 왼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명동 일대를 활보하던 시라소니. 그가 조선 제일의 주먹들 사이에서 ‘형님’으로 군림할 수 있었던 힘의 근원은 무엇일까. 저자는 ‘정의감’으로 요약한다. 협객이라 불렸던 한 주먹의 일생을 통해 한국의 근현대사를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시라소니 평전/ 이광석 지음/ 동아일보사 펴냄/ 390쪽/ 9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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