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만 봐선 안 된다. 신드롬을 만들어내는 미국 내 여론 흐름을 주목해야 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공화당 대통령선거 후보가 연출하고 있는 ‘역사상 가장 기괴한 선거’를 두고 전문가들이 한결같이 지적하는 핵심 메시지다. 안보와 무역을 가리지 않고 대외정책과 관련해 쏟아내는 그의 극단적인 말들의 연원을 꼼꼼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는 것. 공화당 대선후보 자리를 거머쥔 이후 한층 선 굵은 행보에 나서고 있는 트럼프는 5월 하순 현재 경쟁자인 힐러리 클린턴 전 미 국무부 장관과 엎치락뒤치락 지지율 싸움을 벌이는 중이다.
“미국 재정적자를 제로(0)로 만들겠다” “중산층과 서민에 대한 세금을 줄이겠다” “미국은 국방비를 늘려야 한다”. 상식적으로 앞뒤가 안 맞는 그의 이 같은 발언들은 논의를 시작하기에 가장 적절한 포인트다. 재정적자를 줄이자면 방법은 둘 중 하나뿐. 세금을 늘리거나, 예산 지출을 줄이거나. 전문가들이 이 부분을 지적하자 그의 대답은 “경제성장률을 늘리면 된다”는 것이었다. 재선까지 상정해 8년 임기 내내 미국이 매년 20% 이상 초고속 경제성장을 지속해야 가능한, 말 그대로 ‘미션 임파서블’이다.
이렇듯 앞뒤가 맞지 않는 주장이 한꺼번에 나오는 걸 볼 수 있는 대표적 경우는 바로 미국 내 여론조사다. 유권자들에게 각각의 질문을 따로 던져 다수를 차지하는 응답을 모으면 정확히 앞서 본 세 개의 문장이 만들어진다. 결국 트럼프가 그간 쏟아낸 ‘앞뒤 안 맞는 발언’들은 ‘(주로 공화당 지지자들의) 여론조사 1위 답변’을 고스란히 반복한 결과에 불과하다. 이를테면 ‘소비자 입맛에 맞춘 이미지 메이킹’인 셈이다. 각각의 발언이 마음에 드는 유권자들은 그에게 지지를 보낸다. 한데 모으면 현실성이 없다는 사실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트럼프 돌풍’의 가장 원초적인 진실이다.
무너진 보호무역-자유무역 공식
그렇다면 미국 유권자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5월 초 미국 여론조사 전문기관 퓨리서치센터(Pew Research Center)가 공개한 105쪽 분량의 대선 관련 보고서는 이를 살펴볼 수 있는 가장 의미심장한 바로미터다. 트럼프가 던진 주요 이슈에 얽힌 민심의 향방을 여론조사를 통해 살펴본 이 보고서는, 특히 공화당과 민주당 성향 유권자들의 응답을 분리해 추적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그리고 그 결과는 우리에게는 ‘피곤하기 짝이 없는 미래’를 시사하기에 충분하다.
논란의 핵심 쟁점인 대외정책부터 살펴보자. 2014년만 해도 ‘미국이 국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너무 많이 개입하고 있다’고 응답한 사람은 공화당 지지자 37%, 민주당 지지자 36%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 조사는 같은 응답을 한 민주당 지지자가 2년 전과 같은 36%에 머무르는 동안 공화당 지지자는 44%로 늘었음을 보여준다. 후보별 지지자로 갈라보면 추세는 더욱 뚜렷하다. 클린턴 지지자의 34%가 이에 동조하지만 트럼프 지지자는 54%에 이른다. 그 결과 ‘미국은 해외보다 국내 문제에 더 신경 써야 한다’는 응답자가 민주당 지지자는 47%인 반면, 공화당 지지자는 62%로 올라섰다. 역대 최고 수준의 시각차다.
이러한 차이는 경제 문제로 시선을 돌리면 훨씬 극명해진다. 핵심 질문은 ‘미국은 세계 경제와 얼마나 긴밀히 엮여야 하는가’다. 그간의 정설은 공화당이 자유무역을 적극 지지하는 반면 민주당의 보호무역 성향이 한층 강하다는 것이었지만, 최근 여론조사는 이러한 통념이 철저히 깨져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클린턴 지지자의 55%가 미국 경제가 세계 경제와 더 강하게 묶여야 한다고 믿는 반면, 트럼프 지지자는 31%만이 이에 동의한다. 이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유권자는 클린턴 지지자의 37%, 트럼프 지지자의 65%이다. 2배에 육박하는 시각 역전 현상이 벌이지고 있다는 뜻이다.
이와 더불어 트럼프 지지자의 67%는 개발도상국으로부터 더 많은 상품을 수입하는 것을 반대하고, 63%가 개발도상국에 대한 투자를 반대하며, 78%가 해외 원조 증대를 반대한다. 다만 이에 대한 반대 추세는 클린턴 지지자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각각 57%, 57%, 61%. 15%p 안팎의 차이가 있긴 해도 다수이긴 마찬가지다.
질시는 이미 정해져 있다
퓨리서치센터 보고서가 던지는 또 다른 흥미로운 포인트는 아시아에 대한 미국 민심의 변화다. ‘중국을 어떻게 보느냐’는 질문에 ‘적대세력(Adversary)’으로 본다는 응답자가 2004년에는 10%대 초반에 불과했지만 최근 1~2년 사이 20%대 중반으로 올라섰다. 같은 기간 ‘잘 모르겠다’는 응답자가 12%에서 3%로 9%p 감소한 것과 고스란히 대칭형이다. 중국의 부상이 급속도로 현실화된 최근 10여 년 사이 미국 유권자들 뇌리에서 중국의 존재감이 커졌고, 그 대부분은 적대적 존재라는 인식으로 이어졌다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이다.논리적으로 보면 이제 미국 국민에게 가장 의미 있는 지역은 아시아가 돼야 옳지만, 여론조사 데이터의 결론은 역시나 다르다. ‘미국의 대외관계에서 유럽과 아시아 중 어느 쪽이 더 중요한가’라는 질문에서 아시아가 처음 유럽을 제친 것은 2000년대 이후의 일이었다. 2012년에는 아시아를 꼽은 응답자(47%)가 유럽을 꼽은 응답자(37%)에 비해 10%p 더 많았을 정도. 그러나 이는 2014년 조사에서 35% 대 50%로 완전히 역전됐고, 올해 조사에서는 32% 대 52%로 격차가 더욱 벌어졌다. 오바마 행정부의 ‘아시아 회귀 정책(Pivot To Asia)’이 본격화되면서 급부상했던 ‘아시아의 중요성’이 우크라이나 사태 등 다양한 이슈가 겹치며 유럽으로 시선이 확 쏠리자 다시 순식간에 가라앉은 셈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결과는 자못 명확해진다. 미국의 민심은 날이 갈수록 극단화되고 있고, 아시아에 대한 관심은 빠른 속도로 식었으며, 안보와 경제정책 모두에서 대외 개입을 줄여나가야 한다는 주장이 반수를 넘어섰다. 주한미군과 한미자유무역협정(FTA)으로 상징되는 두 나라 사이 연결고리를 둘러싼 미국 내 여론의 싸늘한 질시는 이미 정해져 있되, 공화당과 민주당 사이의 정책 격차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는 의미. 백악관 주인이 바뀔 때마다 미국 대외정책도 극에서 극으로 달라질 테고, 그로 인해 한국이 겪을 스트레스 역시 비례해 커질 것임이 분명해 보인다. 역시나 중요한 것은 트럼프가 아니었다. 일관성을 잃은 미국의 민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