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헌법, 국가와 국민, 소수자와 인권…. 1980년 미국행 비행기에 오르며 청년 안경환이 마음에 품고 있던 주제들이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법학을 전공했지만 ‘대통령 말 한 마디로 국회가 해산되는’ 나라에서 멀찍이 미뤄둘 수밖에 없던 이 키워드들을 들고, 그는 서른두 살 ‘늦깎이’ 유학생이 되려는 참이었다. 이후 30여 년이 흐르는 사이 청년은 미국 변호사가 됐고, 한국에 돌아와 법대 교수를 지냈으며, 국가인권위원장을 역임했다. 이 모든 삶의 여정 동안 앞서의 키워드들은 한 번도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바로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안경환(68) 서울대 명예교수를 만났다. 오늘 한국의 민주주의와 헌법, 국가와 국민의 관계, 그리고 소수자와 인권에 대해서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야당 인사와 각종 시민단체 관계자 등이 앞다퉈 ‘민주주의의 후퇴’를 주장하고 있다. 보수학자로 통하는 이상돈 중앙대 명예교수도 언론 기고문을 통해 ‘이명박, 박근혜 정부 10년은 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거대한 후퇴를 기록한 세월’이라고 했다. 청년들을 중심으로 ‘헬조선론’이 확산할 만큼 국가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 낮아지는 모습이 보인다. 안 명예교수와 이야기를 나누기로 한 건 이 때문이다.
안 명예교수가 최근 전 미국 연방대법관 윌리엄 더글러스(1898~1980)에 대한 평전을 펴낸 것도 그를 만나는 데 영향을 미쳤다. 더글러스는 1939년부터 36년 7개월간 미국 연방대법관을 지내며 평등, 민권, 환경 등에 관한 각종 혁신적 판결로 화제를 모은 인물이다. 그의 의견 가운데 상당수는 시대를 앞서갔고, 동료들의 공감을 얻지 못했다. 그가 미국 연방대법원 역사상 가장 많은 300건 이상의 반대의견을 내고, 네 번이나 탄핵 위기에 놓였던 건 그 때문이다. 그러나 흑인에 대한 차별에 반대하고, 군부대의 민간인 사찰을 거부하며, 산과 들, 물과 바람의 원고 적격(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권리)까지 인정한 그의 판결문은 시대를 넘어 오늘날까지 많은 이의 공감을 얻고 있다.
“어느 사회에서나 법률가의 90%는 상위 10% 국민의 이익에 봉사하며 살아갑니다. 더글러스가 특별했던 건, 나머지 90%의 지친 영혼에 관심을 기울였다는 점 때문이에요. 그는 최고법원 판사이면서도 90% 국민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려 노력했고, 판결문에 ‘헌법은 정부를 국민의 몸에서 떼어내기 위해 제정된 것’이라고 쓸 만큼 국가보다 국민, 정부의 권한보다 인권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더글러스 같은 법률가가 많은 나라라야 살 만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 헌법이란 이렇게 국민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 것 아닐까…. 젊은 시절부터 쭉 그 생각을 해왔지요.”
그래서 안 명예교수와의 인터뷰는 헌법을 매개로 진행됐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에서부터다. 동조 2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규정에 대해서도 함께 물었다. 지금 대한민국의 주인은 국민인가. 국민은 자신의 ‘권력’을 제대로 행사하고 있는가. 이에 대해 답하기에 앞서 안 명예교수는 자신의 청년 시절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1973년 대통령이 국회를 해산했을 때 저는 대학원에서 헌법을 공부하고 있었어요. 그때 우리나라 헌법은 그저 국가 통치의 도구였지요. 국민의 기본권이란 국가가 ‘굴종하는 시민’에게 베푸는 시혜였고, 국민 중에서도 공무원은 ‘특별권력관계’에 복속돼 헌법상 권리와 자유조차 제한당해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반면 행정부에는 고도의 ‘자유재량’ 권한을 부여했고요. 19세기 독일 프로이센 국가학의 유산이 헌법을 통해 고스란히 국가 전체를 지배하던 시대였어요. 그때와 비교하면 세상이 많이 달라졌지요. ‘기본권’이라는 말보다 불가침의 ‘인권’이라는 말을 더 널리 쓰고,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 의식도 꽤 높아졌으니까요.”
그러나 헌법을 ‘국가’ 중심으로 바라보는 시각만은 여전히 뿌리 깊게 남아 있다는 게 안 명예교수의 생각이다. 그는 한 사례로 통합진보당(통진당)에 대한 정당해산 결정을 꼽았다. 이는 “헌법의 기본을 망각한 난센스”라는 게 그의 의견이다.
▼ 우리 헌법 제8조 4항에는 ‘정당의 목적이나 활동이 민주적 기본 질서에 위배될 때는 정부는 헌법재판소에 그 해산을 제소할 수 있고, 정당은 헌법재판소의 심판에 의하여 해산된다’고 규정돼 있지 않습니까.▼
“예, 그렇지요. 그러나 그 규정이 과연 우리 헌법의 철학과 맞닿아 있는지에 대해 검토해봐야 합니다. 대한민국 헌법의 바탕에는 자유민주주의가 있어요. 그리고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은 다양한 사람이 다양한 생각을 말하고, 쓰고, 단체를 만들어 주장하는 걸 허용하는 겁니다. 이런 나라에서 정부가 나서 특정 정당을 ‘자유민주주의 위반’이라며 제소하고, 헌법재판소가 이를 받아들여 정당해산을 결정한 게 난센스 아닌가요. 저는 그 판결의 기저에 아직도 헌법을 국가 통치수단으로 보는 헌법관(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에 저런 사람이 살고 있다니. 다수 국민이 그들에게 분노하고 있잖아. 저건 사회 안정을 해치는 행위야’라고 판단한 것이니까요.”
안 명예교수에 따르면 이것은 현 시대의 헌법관이 아니다. 서구의 시민혁명 과정에서 탄생한 각종 권리장전 이래로 헌법은 ‘국가 권력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의미가 강해졌고, 그 철학을 받아들인 것이 바로 우리 헌법 제1조
1항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를 바탕으로 할 경우 “정부는 다양한 국민의 다양한 의견을 존중하기 위해 일단 한 걸음 물러서야 했다. 그리고 국민 다수가 투표를 통해 통진당을 심판하도록 했어야 한다.”
안 명예교수는 ‘윌리엄 더글라스 평전’에도 ‘민주주의의 최대 강점은 반대의 자유가 보장된다는 것이며, 반대 의견이야말로 역사 발전의 원동력’이라고 썼다. 이때 ‘반대 의견’은 달리 말하면 주류와 ‘다른 의견’이라고도 할 수 있을 듯하다. 이것은 바로 더글러스의 생각이기도 했다. 더글러스는 논문 ‘반대의견’에서 ‘절대적 진리라는 것은 반대를 용납하지 못하는 전체주의체제 아래서나 생성될 수 있는 도그마’라고 단정하며 ‘판사들 사이에 의견이 다른 건 전혀 이상한 게 아니고 그것을 위험시해서도 안 된다’고 주장했다.
“저는 우리나라 법원에 부족한 것이 창의성이라고 생각해요. 인적 구성이 단조롭다 보니 외부 억압이 없어도 ‘다른 의견’을 내는 판사가 별로 없는 겁니다. 더글러스는 판결문에 셰익스피어를 인용할 만큼 개성적인 인물이었어요. 하지만 우리 법원에서는 그런 판결문을 좀체 찾을 수가 없지요. 특히 법률의 해석 및 적용을 넘어 가치판단까지 해야 하는 헌법재판소 재판관조차 천편일률적으로 구성돼 있는 건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민사·형사재판을 통해 단련된 분들이 승진해 헌법재판소 재판관이 되고, 거기서도 헌법을 세법처럼 해석규범으로 여기는 현실에는 분명 문제가 있어요.”
안 명예교수는 ‘헌법재판소는 법관의 자격을 가진 9인의 재판관으로 구성한다’고 규정한 우리 헌법 제111조 2항을 언급하며 “나는 1987년 헌법재판소가 생길 때부터 이 규정에 문제가 있다고 지속적으로 주장해왔다. 법관 구성을 다양화해야 새로운 관점을 바탕으로 하는 다양하고 창의적이며 시대를 선도하는 판결이 나올 수 있다”고 강조했다.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헌법재판소는 국가와 개인이 충돌할 때 개인을 보호하는 최후의 보루입니다. 국회가 만든 법률이 헌법에 위배될 때 이를 무효화하는 권한도 헌법재판소에 있고요. 선출직 대통령과 의회가 가진 민주적 정당성을 넘어서는 ‘사법적극주의’를 발휘하려면 국민의 다양한 철학과 가치를 반영할 수 있는 다원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다양성을 가진 소수’의 의견이 당장 사회 변화를 이끌지 못해도 상관없다고 한다. 안 명예교수는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미국에서 헌법재판소 구실을 하는 연방대법원의 원장을 지낸 찰스 휴즈 판사의 발언을 소개했다. “대법원 판결에서 반대의견은 새로 움트기 시작하는 법의 정신에 대한 호소요, 오늘의 법원이 범한다고 생각하는 오류를 시정해줄 미래 법원의 지혜에 대한 간청”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이러한 ‘반대의견’을 낼 수 있는, 시대의 주류적 관점에서 벗어나 소수자와 약자의 시각에서 사안을 바라볼 수 있는 법률가의 존재가 절실하다”는 게 안 명예교수의 생각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판사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도 헌법재판소 재판관 문호를 열어야 한다고 한다.
안 명예교수는 ‘윌리엄 더글라스 평전’을 쓰기 전 우리나라 최고 인권변호사로 꼽히는 고(故) 조영래 변호사에 대한 평전을 썼고,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무료 변론 등을 하는 공익 변호사 모임 ‘공감’의 이사장도 지냈다. 소수자와 약자를 위한 ‘따뜻한 법’은 그가 오랜 세월 천착해온 주제다.
“과거에는 자유권을 천부인권이라 하고, 사회권은 국가가 주는 시혜적 권리로 여겼습니다. 경제가 좀 더 성장할 때까지 유예할 수 있다고 여겼지요. 하지만 이제 유엔은 모든 인권이 서로 관련돼 있고(interrelated) 상호의존적이며(interdependent) 분리될 수 없다(indivisible)고 말합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존엄과 가치를 주장할 수 있으며, 국가는 어떤 상황에서도 이를 보장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 한국 상황은 어떻습니까. 복지예산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매우 적은 수준이지요. 나라의 국제적 위상이나 경제 수준에 비하면 아쉬운 점이 많습니다. 저는 그것이 최근 발생하는 각종 사회적 문제의 주된 원인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사회권을 주장하는 이들을 ‘빨갱이’로 몰거나 ‘떼쟁이’라고 공격하는 시각에도 문제가 있다는 게 안 명예교수의 생각이다. 그는 “약자에게는 약간 응석도 부리고 떼도 쓸 수 있는 ‘정서적 권리’가 있다”며 “집에서도 큰형과 막내동생이 싸울 때 동생은 악도 쓰고 대들 수도 있지 않나. 지식과 논리가 적어 표현이 과격해지더라도 그 주장을 받아들여 내 지위가 흔들릴 정도가 아니라면 관대하게 수용해주는 태도, 그러한 톨레랑스가 있어야 좋은 사회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 한국 사회 주류는 그런 관용을 베풀 줄 모른다”고 안타까워했다.
안 명예교수는 주류의 배려가 필요한 또 다른 대상으로 ‘청년’을 들었다. 고등학교 시절까지는 대학 입시준비에 정신이 온통 쏠려 있고, 대학에 들어간 뒤엔 취업준비 때문에 또 세상을 돌아볼 여유가 없는 청년들이 오늘날 한국 사회의 대표적 ‘약자’가 돼가고 있다는 생각에서다. 이 과정에서 좌절감이 커지면서 ‘헬조선’이라는 유행어가 생길 만큼 국가에 대한 신뢰도 떨어지는 상황이다. 이런 현실을 바꾸려면 청년을 세상의 ‘주인’으로 만들기 위한 사회적 노력이 필요하다는 게 안 명예교수의 생각이다.
“청년들은 여당 정치인을 ‘적당히 부패한 출세 지향자’ 정도로, 야당 정치인을 ‘스스로 돈 벌어본 경험도 전문성도 없는 건달’ 정도로 여기며 폄훼하지요. 하지만 그런 시니컬한 시각으로 정치를 외면하면 결코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없습니다. 정당에 가입하고, 직접 정당을 만들어 정치에 뛰어들어야 해요. 기존 정당도 청년들에게 기회를 더 많이 주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여기에 한국 사회의 미래가 달려 있습니다.”
안 명예교수의 얘기다.
※ 안경환 서울대 명예교수
1948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법학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 로스쿨(LL.M.), 산타클라라대 로스쿨(J.D.)을 졸업했다. 1987년부터 2013년까지 서울대 법대 교수로 일했고, 학장시절 최초의 여성 교수 임용, 1급 시각장애인 학생 선발 등의 결정으로 화제를 모았다. 한국헌법학회장, 국가인권위원장 등을 지냈으며 2004년 여성권익디딤돌상, 2012년 대한민국 법률대상(인권 부문) 등을 받았다. 현재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와 국제인권법률가협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30여 년 동안 헌법, 영미법, 인권법, 법과 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많은 책을 쓰거나 번역했으며, 최근 평생의 사표 윌리엄 더글러스의 생애를 담은 ‘윌리엄 더글라스 평전’을 펴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야당 인사와 각종 시민단체 관계자 등이 앞다퉈 ‘민주주의의 후퇴’를 주장하고 있다. 보수학자로 통하는 이상돈 중앙대 명예교수도 언론 기고문을 통해 ‘이명박, 박근혜 정부 10년은 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거대한 후퇴를 기록한 세월’이라고 했다. 청년들을 중심으로 ‘헬조선론’이 확산할 만큼 국가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 낮아지는 모습이 보인다. 안 명예교수와 이야기를 나누기로 한 건 이 때문이다.
안 명예교수가 최근 전 미국 연방대법관 윌리엄 더글러스(1898~1980)에 대한 평전을 펴낸 것도 그를 만나는 데 영향을 미쳤다. 더글러스는 1939년부터 36년 7개월간 미국 연방대법관을 지내며 평등, 민권, 환경 등에 관한 각종 혁신적 판결로 화제를 모은 인물이다. 그의 의견 가운데 상당수는 시대를 앞서갔고, 동료들의 공감을 얻지 못했다. 그가 미국 연방대법원 역사상 가장 많은 300건 이상의 반대의견을 내고, 네 번이나 탄핵 위기에 놓였던 건 그 때문이다. 그러나 흑인에 대한 차별에 반대하고, 군부대의 민간인 사찰을 거부하며, 산과 들, 물과 바람의 원고 적격(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권리)까지 인정한 그의 판결문은 시대를 넘어 오늘날까지 많은 이의 공감을 얻고 있다.
“상위 10%보다 나머지 90%에게 관심을”
안 명예교수도 그중 한 사람이다. 그는 젊은 시절 ‘타임’ 등 우리나라에 소개된 미국 잡지를 통해 더글러스의 판결문을 접하며 미처 알지 못했던 헌법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그것이 미국 유학을 결심한 결정적 이유가 됐다고 한다. 안 명예교수의 생애 첫 저서가 더글러스의 법사상을 분석한 논문집 ‘미국법의 이론적 조명’(1986)이었던 걸 감안하면, 이번 책은 30년의 세월을 쏟아 ‘이론’을 ‘삶’으로 풀어낸 역작이라고 할 만하다.“어느 사회에서나 법률가의 90%는 상위 10% 국민의 이익에 봉사하며 살아갑니다. 더글러스가 특별했던 건, 나머지 90%의 지친 영혼에 관심을 기울였다는 점 때문이에요. 그는 최고법원 판사이면서도 90% 국민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려 노력했고, 판결문에 ‘헌법은 정부를 국민의 몸에서 떼어내기 위해 제정된 것’이라고 쓸 만큼 국가보다 국민, 정부의 권한보다 인권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더글러스 같은 법률가가 많은 나라라야 살 만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 헌법이란 이렇게 국민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 것 아닐까…. 젊은 시절부터 쭉 그 생각을 해왔지요.”
그래서 안 명예교수와의 인터뷰는 헌법을 매개로 진행됐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에서부터다. 동조 2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규정에 대해서도 함께 물었다. 지금 대한민국의 주인은 국민인가. 국민은 자신의 ‘권력’을 제대로 행사하고 있는가. 이에 대해 답하기에 앞서 안 명예교수는 자신의 청년 시절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1973년 대통령이 국회를 해산했을 때 저는 대학원에서 헌법을 공부하고 있었어요. 그때 우리나라 헌법은 그저 국가 통치의 도구였지요. 국민의 기본권이란 국가가 ‘굴종하는 시민’에게 베푸는 시혜였고, 국민 중에서도 공무원은 ‘특별권력관계’에 복속돼 헌법상 권리와 자유조차 제한당해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반면 행정부에는 고도의 ‘자유재량’ 권한을 부여했고요. 19세기 독일 프로이센 국가학의 유산이 헌법을 통해 고스란히 국가 전체를 지배하던 시대였어요. 그때와 비교하면 세상이 많이 달라졌지요. ‘기본권’이라는 말보다 불가침의 ‘인권’이라는 말을 더 널리 쓰고,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 의식도 꽤 높아졌으니까요.”
그러나 헌법을 ‘국가’ 중심으로 바라보는 시각만은 여전히 뿌리 깊게 남아 있다는 게 안 명예교수의 생각이다. 그는 한 사례로 통합진보당(통진당)에 대한 정당해산 결정을 꼽았다. 이는 “헌법의 기본을 망각한 난센스”라는 게 그의 의견이다.
▼ 우리 헌법 제8조 4항에는 ‘정당의 목적이나 활동이 민주적 기본 질서에 위배될 때는 정부는 헌법재판소에 그 해산을 제소할 수 있고, 정당은 헌법재판소의 심판에 의하여 해산된다’고 규정돼 있지 않습니까.▼
“예, 그렇지요. 그러나 그 규정이 과연 우리 헌법의 철학과 맞닿아 있는지에 대해 검토해봐야 합니다. 대한민국 헌법의 바탕에는 자유민주주의가 있어요. 그리고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은 다양한 사람이 다양한 생각을 말하고, 쓰고, 단체를 만들어 주장하는 걸 허용하는 겁니다. 이런 나라에서 정부가 나서 특정 정당을 ‘자유민주주의 위반’이라며 제소하고, 헌법재판소가 이를 받아들여 정당해산을 결정한 게 난센스 아닌가요. 저는 그 판결의 기저에 아직도 헌법을 국가 통치수단으로 보는 헌법관(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에 저런 사람이 살고 있다니. 다수 국민이 그들에게 분노하고 있잖아. 저건 사회 안정을 해치는 행위야’라고 판단한 것이니까요.”
안 명예교수에 따르면 이것은 현 시대의 헌법관이 아니다. 서구의 시민혁명 과정에서 탄생한 각종 권리장전 이래로 헌법은 ‘국가 권력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의미가 강해졌고, 그 철학을 받아들인 것이 바로 우리 헌법 제1조
1항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를 바탕으로 할 경우 “정부는 다양한 국민의 다양한 의견을 존중하기 위해 일단 한 걸음 물러서야 했다. 그리고 국민 다수가 투표를 통해 통진당을 심판하도록 했어야 한다.”
안 명예교수는 ‘윌리엄 더글라스 평전’에도 ‘민주주의의 최대 강점은 반대의 자유가 보장된다는 것이며, 반대 의견이야말로 역사 발전의 원동력’이라고 썼다. 이때 ‘반대 의견’은 달리 말하면 주류와 ‘다른 의견’이라고도 할 수 있을 듯하다. 이것은 바로 더글러스의 생각이기도 했다. 더글러스는 논문 ‘반대의견’에서 ‘절대적 진리라는 것은 반대를 용납하지 못하는 전체주의체제 아래서나 생성될 수 있는 도그마’라고 단정하며 ‘판사들 사이에 의견이 다른 건 전혀 이상한 게 아니고 그것을 위험시해서도 안 된다’고 주장했다.
다양성이 존중되는 사회
▼우리 헌법 제103조도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고 규정하고 있지요. 우리 법관 역시 ‘다른 의견을 낼 권리’를 충분히 보장받고 있나요.▼“저는 우리나라 법원에 부족한 것이 창의성이라고 생각해요. 인적 구성이 단조롭다 보니 외부 억압이 없어도 ‘다른 의견’을 내는 판사가 별로 없는 겁니다. 더글러스는 판결문에 셰익스피어를 인용할 만큼 개성적인 인물이었어요. 하지만 우리 법원에서는 그런 판결문을 좀체 찾을 수가 없지요. 특히 법률의 해석 및 적용을 넘어 가치판단까지 해야 하는 헌법재판소 재판관조차 천편일률적으로 구성돼 있는 건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민사·형사재판을 통해 단련된 분들이 승진해 헌법재판소 재판관이 되고, 거기서도 헌법을 세법처럼 해석규범으로 여기는 현실에는 분명 문제가 있어요.”
안 명예교수는 ‘헌법재판소는 법관의 자격을 가진 9인의 재판관으로 구성한다’고 규정한 우리 헌법 제111조 2항을 언급하며 “나는 1987년 헌법재판소가 생길 때부터 이 규정에 문제가 있다고 지속적으로 주장해왔다. 법관 구성을 다양화해야 새로운 관점을 바탕으로 하는 다양하고 창의적이며 시대를 선도하는 판결이 나올 수 있다”고 강조했다.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헌법재판소는 국가와 개인이 충돌할 때 개인을 보호하는 최후의 보루입니다. 국회가 만든 법률이 헌법에 위배될 때 이를 무효화하는 권한도 헌법재판소에 있고요. 선출직 대통령과 의회가 가진 민주적 정당성을 넘어서는 ‘사법적극주의’를 발휘하려면 국민의 다양한 철학과 가치를 반영할 수 있는 다원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다양성을 가진 소수’의 의견이 당장 사회 변화를 이끌지 못해도 상관없다고 한다. 안 명예교수는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미국에서 헌법재판소 구실을 하는 연방대법원의 원장을 지낸 찰스 휴즈 판사의 발언을 소개했다. “대법원 판결에서 반대의견은 새로 움트기 시작하는 법의 정신에 대한 호소요, 오늘의 법원이 범한다고 생각하는 오류를 시정해줄 미래 법원의 지혜에 대한 간청”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이러한 ‘반대의견’을 낼 수 있는, 시대의 주류적 관점에서 벗어나 소수자와 약자의 시각에서 사안을 바라볼 수 있는 법률가의 존재가 절실하다”는 게 안 명예교수의 생각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판사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도 헌법재판소 재판관 문호를 열어야 한다고 한다.
안 명예교수는 ‘윌리엄 더글라스 평전’을 쓰기 전 우리나라 최고 인권변호사로 꼽히는 고(故) 조영래 변호사에 대한 평전을 썼고,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무료 변론 등을 하는 공익 변호사 모임 ‘공감’의 이사장도 지냈다. 소수자와 약자를 위한 ‘따뜻한 법’은 그가 오랜 세월 천착해온 주제다.
소수자, 약자 위한 ‘따뜻한 법’
안 명예교수는 이에 대해 “법학에서 가장 발전된 분야는 민법이다. 수많은 머리 좋은 사람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재산권 보호 등의 법리를 갈고닦았다. 하지만 가난하고 약한 사람이 최소한의 인권을 보장받는 데도 역시 법이 필요하다. 논리가 최고 가치로 여겨지는 법의 영역에서 이들의 권리를 보호하려면 더욱 유능한 법률가들이 이 분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우리 헌법 제10조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가 보장하는 ‘사회권’, 이른바 ‘인간답게 살 권리’의 실현을 위해 좀 더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과거에는 자유권을 천부인권이라 하고, 사회권은 국가가 주는 시혜적 권리로 여겼습니다. 경제가 좀 더 성장할 때까지 유예할 수 있다고 여겼지요. 하지만 이제 유엔은 모든 인권이 서로 관련돼 있고(interrelated) 상호의존적이며(interdependent) 분리될 수 없다(indivisible)고 말합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존엄과 가치를 주장할 수 있으며, 국가는 어떤 상황에서도 이를 보장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 한국 상황은 어떻습니까. 복지예산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매우 적은 수준이지요. 나라의 국제적 위상이나 경제 수준에 비하면 아쉬운 점이 많습니다. 저는 그것이 최근 발생하는 각종 사회적 문제의 주된 원인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사회권을 주장하는 이들을 ‘빨갱이’로 몰거나 ‘떼쟁이’라고 공격하는 시각에도 문제가 있다는 게 안 명예교수의 생각이다. 그는 “약자에게는 약간 응석도 부리고 떼도 쓸 수 있는 ‘정서적 권리’가 있다”며 “집에서도 큰형과 막내동생이 싸울 때 동생은 악도 쓰고 대들 수도 있지 않나. 지식과 논리가 적어 표현이 과격해지더라도 그 주장을 받아들여 내 지위가 흔들릴 정도가 아니라면 관대하게 수용해주는 태도, 그러한 톨레랑스가 있어야 좋은 사회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 한국 사회 주류는 그런 관용을 베풀 줄 모른다”고 안타까워했다.
안 명예교수는 주류의 배려가 필요한 또 다른 대상으로 ‘청년’을 들었다. 고등학교 시절까지는 대학 입시준비에 정신이 온통 쏠려 있고, 대학에 들어간 뒤엔 취업준비 때문에 또 세상을 돌아볼 여유가 없는 청년들이 오늘날 한국 사회의 대표적 ‘약자’가 돼가고 있다는 생각에서다. 이 과정에서 좌절감이 커지면서 ‘헬조선’이라는 유행어가 생길 만큼 국가에 대한 신뢰도 떨어지는 상황이다. 이런 현실을 바꾸려면 청년을 세상의 ‘주인’으로 만들기 위한 사회적 노력이 필요하다는 게 안 명예교수의 생각이다.
“청년들은 여당 정치인을 ‘적당히 부패한 출세 지향자’ 정도로, 야당 정치인을 ‘스스로 돈 벌어본 경험도 전문성도 없는 건달’ 정도로 여기며 폄훼하지요. 하지만 그런 시니컬한 시각으로 정치를 외면하면 결코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없습니다. 정당에 가입하고, 직접 정당을 만들어 정치에 뛰어들어야 해요. 기존 정당도 청년들에게 기회를 더 많이 주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여기에 한국 사회의 미래가 달려 있습니다.”
안 명예교수의 얘기다.
※ 안경환 서울대 명예교수
1948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법학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 로스쿨(LL.M.), 산타클라라대 로스쿨(J.D.)을 졸업했다. 1987년부터 2013년까지 서울대 법대 교수로 일했고, 학장시절 최초의 여성 교수 임용, 1급 시각장애인 학생 선발 등의 결정으로 화제를 모았다. 한국헌법학회장, 국가인권위원장 등을 지냈으며 2004년 여성권익디딤돌상, 2012년 대한민국 법률대상(인권 부문) 등을 받았다. 현재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와 국제인권법률가협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30여 년 동안 헌법, 영미법, 인권법, 법과 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많은 책을 쓰거나 번역했으며, 최근 평생의 사표 윌리엄 더글러스의 생애를 담은 ‘윌리엄 더글라스 평전’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