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이샛별(37) 씨는 주말만 되면 ‘오늘은 뭘 버릴까’ 고민한다. 평소 같으면 ‘오늘은 뭘 살까’ 하는 생각에 들떴을 테지만, 언제부턴가 이씨의 관심사는 방 안의 물건들을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 됐다. 침대 밑에 가득 쌓여 있던 먼지 덮인 책들은 서점에 내다 팔고, 옷장에 더 넣을 곳이 없어 처박아뒀던 옷들은 괜찮은 것들로 골라 ‘아름다운 가게’로 보내고 나머지는 상자에 담아 헌옷업체에 판다. 나아가 이씨는 한 달 동안 어떤 물건도 구매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방 정리를 통해 심리적 안정감과 내 물건을 내가 지배할 수 있다는 뿌듯함, 시간적 효율성을 얻었다”는 게 이씨의 말이다.
동일본 대지진 후 불기 시작한 ‘단샤리’ 열풍
최근 들어 이씨처럼 공간을 비우고 정리하며 ‘심플 라이프’를 추구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오늘부터 ‘미니멀리스트’(소수의 물건만 가지고 생활하면서 단순한 요소를 통해 최대 효과를 이루려는 사고방식을 지닌 사람)가 되기로 했다며 방 정리 과정을 자신의 인터넷 블로그에 올리는 이들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이들은 왜 물건을 더는 소유의 대상이 아닌 소멸의 대상으로 여기게 된 것일까. 요즘 화제인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 속 시대만 해도 물건은 늘 부족했다. 형제끼리 옷을 물려 입는 건 당연했고, 신문지며 달력 등도 한곳에 잘 모아뒀다 요긴하게 썼다. 하지만 경제성장과 함께 물질적 풍요의 시대가 열리면서 사람들은 전투적으로 물건을 사들이기 시작했고, 급기야 물건에 사람이 치이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최근 우리 사회에 불고 있는 미니멀리즘, 심플 라이프는 그동안 물건에 파묻혀 살면서는 미처 알지 못했던 삶의 여유와 인생의 가치를 되찾아준다는 점에서 많은 이로부터 공감을 얻고 있다. 최근 들어 ‘버리기’를 골자로 한 책 ‘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 ‘정리 습관의 힘’ ‘심플하게 산다’ ‘부자가 되는 정리의 힘’ ‘인생을 단순하게 사는 100가지 방법’ ‘우리아이 정리습관’ 등이 인기를 얻는 이유도 이러한 사회 현상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015년 9월 발간된 책 ‘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는 일본 아마존 등에서 판매 1위에 오른 데 이어 국내에서도 베스트셀러로 등극했다. 저자인 사사키 후미오 씨는 원래 작은 메모지 한 장도 버리지 못하는 성격이었지만 물건을 최소한으로 줄여 자유롭게 살아가는 미니멀리스트들의 생활을 접한 후 방 정리를 시작했다. 현재 그의 집에는 가구가 거의 없다. 옷장에는 여섯 벌의 옷과 몇 개의 속옷만 있고, 욕실에도 액체 비누 하나, 무명천이 전부다. 주방 역시 식기나 냄비 등 꼭 필요한 물건 외에는 두지 않는다. 과거 책과 가구들이 창문을 막아 늘 어두컴컴하던 방이 지금은 아침마다 햇살이 가득 쏟아지는 쾌적한 공간으로 바뀌었고, 퇴근 후에는 확 트인 공간에서 느긋하게 스트레칭을 즐긴 뒤 잠자리에 든다. 이것이 바로 사사키 씨의 심플 라이프다.
단조롭지만 평화로운 그의 일상은 최근 EBS ‘하나뿐인 지구:물건 다이어트’ 편에도 소개돼 국내 시청자들에게 반향을 일으켰다. 사사키 씨는 방송에서 “물건이 많으면 익숙해져서 만족하지도 못할 테고 가진 게 많을수록 감사한 마음도 안 들 테지만, 나는 남아 있는 적은 물건에 감사하며 산다. 물건을 줄이면 줄일수록 자신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게 무엇인지 스스로 묻고 생각하게 된다. 남을 의식하지 않음으로써 더욱 자유로운 삶을 살게 됐다”고 말했다.
일본에서는 미니멀리즘과 같은 뜻의 ‘단샤리(斷捨離)’ 열풍도 불고 있다. 단샤리는 요가 수행법인 단행(斷行), 사행(捨行), 이행(離行)에서 따온 말로 인생과 일상생활에서 불필요한 물건을 끊어버리고 버리며 멀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심플 라이프, 단샤리, 미니멀리즘의 탄생 배경은 과연 무엇일까. 바로 2011년 발생한 ‘동일본 대지진’을 꼽을 수 있다. 온 국민이 소중하게 여겼던 물건들이 하루아침에 흉기로 변하는 현실을 경험하면서 물질 소유와 관련한 인식의 대변화가 일어난 것.
정리·정돈은 삶의 질서를 잡아주는 힘
일본 유루리 마이 작가의 만화책 ‘우리 집엔 아무것도 없어’에도 동일본 대지진을 경험한 주인공이 그동안 집 안에 필요 없는 물건이 태반이었고, 정작 비상시 꼭 필요한 물품은 찾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 날마다 ‘오늘은 뭘 버릴까’ 고민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만화 속 주인공은 작가 자신인데, 유루리 작가는 만화를 그리기에 앞서 자신의 블로그에 놀라울 정도로 아무것도 없는 자신의 집을 공개해 누리꾼 사이에서 큰 화제를 모았다. 지난해 4월 우리나라에서도 번역 출간돼 인기를 얻고 있는 ‘우리 집엔 아무것도 없어’는 2월부터 일본 NHK 방송에서 드라마로도 방영된다.아직 국내에서는 일본의 사례처럼 집 안 물건을 거의 다 없애는 극단적 미니멀리스트는 찾아보기 힘들지만 정리·정돈과 수납이 라이프 트렌드로 떠오르고 있음은 분명하다. 불필요한 물건을 버리고 정리한다는 점에서 미니멀리즘, 심플 라이프와 궤를 같이한다.
4~5년 전 처음 등장한 정리수납 대행업체가 최근 들어서는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이 생겨났고, 2015년 한국직업사전에 ‘정리수납 전문가’가 새로운 직종으로 등록됐다. 정리수납 전문가가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건 2012년 방영된 KBS 2TV ‘여유만만:심리가 있는 집정리 클린하우스 프로젝트’를 통해서인데, 방송은 일종의 저장강박증을 앓는 의뢰인을 찾아가 쓰레기더미에 묻혀 있던 집을 쾌적하고 안락한 공간으로 바꿔놓아 많은 이로부터 호응을 얻었다. 이후 정리수납 대행업체 이용자 수가 급격히 늘었고, 정리수납이 어엿한 사업의 한 분야로 자리 잡았다. 최근에는 백화점 문화센터를 비롯해 각종 정리 관련 협회에서 운영하는 교육 프로그램 등 마음만 먹으면 손쉽게 정리·정돈 노하우를 배울 수 있다.
정경자 한국정리수납협회 회장은 “정리·정돈은 삶의 질서를 잡아주는 힘이 있다”고 말한다. 흔히 학생들이 시험공부를 앞두고 책상 정리를 하고, 주부가 울적한 마음이 들 때 대청소를 하는 것처럼 주위에 널려 있는 물건들을 없애거나 정돈하면 새롭게 의욕도 생겨난다. 정리를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버리기다. 그다음은 새롭게 생겨난 공간을 꼭 필요한 물건들로 채우고, 그 상태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 정 회장은 “많은 사람이 정리·정돈을 힘들어하는 이유가 지금 당장 해야 할 일들을 나중으로 미루기 때문이다. 외출했다 돌아오면 외투를 소파에 던져놓을 것이 아니라 원래 있었던 대로 옷걸이에 걸고, 마트에서 장을 봐오면 음식이 담긴 포장지를 통째로 냉장고에 밀어 넣지 말고 그 자리에서 바로 소분해 보관하는 등 물건을 정리하는 습관을 들이면 누구나 정리수납의 달인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물건을 버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새로 들이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선물로 뭔가를 받는 경우가 그러한데, 당장 필요한 물건이 아니라면 선물한 사람에게 고마운 마음은 충분히 전하되 필요한 사람을 위해 기부하거나 나눠주는 것이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드는 길이다. 정 회장은 “선물을 받으면 그 자리에서 필요 유무를 따져보고, 필요 없다 생각되면 바로 누군가에게 다시 선물하는 게 좋다. 똑같은 물건이어도 집에 몇 년간 묵혀뒀다 주는 건 선물이 아니라 쓰레기를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방 3.3㎡ 정리하면 2000만 원 버는 셈
심플 라이프가 새로운 삶의 화두로 떠오르면서 자녀에게도 정리·정돈을 강조하는 부모가 늘고 있다. 정리하는 습관이 아이들 학습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란 생각 때문인데, 실제로 최근에는 일부 초교 방과후수업이나 중고교 특별 강의에서 정리하는 습관과 자기주도학습을 연계한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책 ‘우리아이 정리습관’의 저자 임희정 씨는 책에서 ‘정리력(물건, 시간, 공간을 적절하게 조율해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사용할 줄 아는 힘)을 갖춘 아이는 자신의 삶을 통찰하는 능력을 가지게 되고 삶의 에너지를 긍정적으로 처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꾸준한 정리 습관은 사고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논리인데 장난감을 종류별, 크기별, 용도별로 구분할 줄 아는 아이는 단순히 물건만 분류해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속성을 이해해 이들을 목적에 맞게 가려낼 수 있는 능력까지 지니게 된다는 것. 더 나아가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자료나 개념 정리 역시 가능해지고 이는 곧 학업능력 향상으로 이어지게 된다고 한다.
‘버리기’는 놀랍게도 경제적 이익까지 안겨준다. 물건이 차지하는 공간의 기회비용 때문이다. 2015년 서울 아파트 평균 가격이 3.3m2당 약 2000만 원이니 그만큼의 공간이 물건들로 채워져 있다면 2000만 원을 손해 보는 셈이다. 만약 아파트 거실에 ‘세상에서 가장 비싼 옷걸이’라 부르는 러닝머신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면, 그 크기가 대략 1m2이니 그 기회비용은 약 613만 원, 창고로 쓰는 방이나 옷으로 가득한 드레스룸을 8.26m2 정도로 보면 약 5000만 원을 낭비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계산법이 너무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윤선현 베리굿정리컨설팅 대표는 “묶여 있는 돈은 다른 곳에 투자해서 벌 수 있는 수익만큼 손해를 보는 것이다. 비싼 돈을 들여 넓은 평형으로 이사해도 집 안을 또 엄청난 물건들로 채운다면 더 큰 손해를 보는 것”이라고 말한다.
3.3m2당 가격을 차치하더라도 물건을 버렸을 때 발생하는 경제적 효과는 상당하다. 먼저 집 안 가득 쌓인 물건들을 정리하면서 그동안 얼마나 잘못된 소비를 해왔는지 깨닫게 되고, 불필요한 소비를 중단하게 된다. 또한 수납이 제대로 이뤄지면 물건을 빠른 시간 내 찾을 수 있으니 시간이 절약되고, 물건의 효용 가치가 커져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비)도 높아진다. 어쩌면 ‘버리기’는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쉬운 돈 벌기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