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름이 305m에 달하는 안테나로 천체를 관측하는 아레시보 망원경. [Gettyimage]
21세기를 빛낸 SF영화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인터스텔라’를 꼽는다면, 그 전에는 이 영화가 있었다.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는 다소 생소할 수 있는 SETI(Search for Extra-Terrestrial Intelligence) 프로젝트, 다시 말해 외계 지적 생명체 탐사를 위한 계획이다. 상영 내내 외계인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지만, ‘칼 세이건’이라는 위대한 천문학자의 열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섬세한 작품으로 남았다. 영화의 배경으로 멋들어진 초대형 시설이 잠깐 등장하는데, 주인공인 조디 포스터(엘리 애로웨이 역)는 외계인이 보낸 신호를 검출하기 위해 오랜 시간을 이곳에서 보낸다. 바로 이번 ‘궤도 밖의 과학’ 시리즈의 주인공인 아레시보 망원경이다.
50년 넘게 ‘외계 사냥 신호꾼’ 역할
편안히 영화를 보던 관객들은 촬영장 세트 규모에 놀라며 할리우드 영화의 자본력이 대단하다고 감탄했겠지만, 놀랍게도 이 녀석은 일회용이 아닌 실존하는 장비다. 푸에르토리코 아레시보 남쪽으로 내려가면 천문대가 하나 있는데, 여기에 무려 지름이 305m에 달하는 거대한 접시 안테나가 하늘을 향해 입을 벌리고 있다. 2016년 중국이 지름 500m짜리 전파 망원경을 세우기 전까지, 1963년부터 50년 넘게 세계 최대 규모의 단일 전파 망원경이라는 위용을 떨쳤다. 아레시보 망원경은 오랫동안 ‘외계 신호 사냥꾼’으로 유명했다.이 거대한 녀석의 출연작은 SF영화뿐만이 아니다. ‘영국 영화의 자존심’으로 불리는 첩보영화 ‘007’ 시리즈 중 1995년 작인 ‘골든 아이’에서 피어스 브로스넌이 연기한 주인공 제임스 본드는 접시 안테나 위의 수신기에 매달려 생과 사를 오가기도 했다. 이 정도면 과학계에서 꽤 유명인사일 텐데, 12월 1일 아레시보 망원경으로부터 정말 슬픈 소식이 들려왔다. 메인 케이블이 끊어지면서 900톤에 가까운 무게의 수신기가 추락했고, 결국 접시 안테나 일부와 주변 시설이 파괴됐다는 것이다.
수신기는 접시 안테나를 둘러싼 3개의 기둥과 철제 케이블로 연결되어 지상으로부터 140m가량 떠 있었는데, 케이블 일부가 세월의 풍파를 견디지 못하고 끊어졌고, 추락하는 구조물엔 날개가 없으니 그대로 망원경의 붕괴를 가져왔다. 다행히 인명 피해나 부상은 현재까지 보고된 바가 없다. 하지만 이런 안타까운 징조는 이미 몇 년 전부터 여러 차례 있었다. 2017년 푸에르토리코를 그대로 관통했던 허리케인 ‘마피아’로 인해 쉽게 복구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 피해를 봤으며, 올해 초 남쪽 연해에서 발생한 규모 6.4의 강진 탓에 시설을 일시적으로 폐쇄했다. 심지어 8월에는 3cm 두께의 고정 케이블 중 하나가 떨어지면서 접시 안테나에 지름 30m 크기의 구멍을 뚫었다. 이후 어떻게든 보수를 하느냐 아니면 완전히 문을 닫느냐 갈림길에 서 있던 와중에 최근 수신기 추락으로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무리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너무도 갑작스러운 사고였다.
아레시보 망원경이 남긴 발자취
아레시보 망원경이 12월 1일 붕괴됐다. [AP=뉴시스]
영국의 천문학자 마틴 리스는 펄서를 외계 생명체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등대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 정도로 특이한 천체이다 보니 이후 많은 연구가 진행될 수 있었고 결국 여기서 노벨상도 나왔다. 미국의 과학자 러셀 헐스와 조지프 테일러는 아레시보 망원경을 통해 빠르게 회전하는 쌍성 펄서를 발견했고, 이걸 토대로 중력 연구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해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헤어진 연인이 무언가 메시지를 보내기를 애타게 고대하던 시기가 지나면, 먼저 문자를 보내보는 것도 방법이라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처럼 외계의 신호를 기다리다 지쳐 1974년엔 우리 은하 내에 별들이 모여 있는 구상성단으로 우리가 먼저 신호를 보내기도 했다. 이 신호는 아레시보 메시지라고 불리는데, 역사상 가장 먼 거리를 날아가고 있는 탐사선 보이저에 실려있는 골든 레코드와 비슷하게 지구의 각종 정보와 메시지를 담고 있다. 1990년대 초에는 태양계 외부 지구와 유사한 행성들을 발견하기도 하면서 지적 생명체 탐사를 넘어 외계 생명체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는 지역의 범위를 좁히는 데 집중했다.
아레시보 망원경의 아낌없는 헌신은 공상에 가까운 곳을 향하고 있었지만, 그 외에도 많은 업적을 이뤄냈다. 이 망원경 덕분에 불타는 금성의 지질표면에 대한 레이더 지도가 최초로 제작됐고, 화성과 달의 표면을 면밀하게 관측하게 됐다. 이 망원경은 수성의 북극과 남극을 살피다가 그늘진 분화구에서 얼음을 발견하고, 통신이 끊긴 태양 및 태양권 관측위성 소호(SOHO)를 다시 찾아내는 뛰어난 기량을 보여주기도 했다. 토성이 보유한 위성 가운데 가장 큰 타이탄에서 탄화수소 호수의 흔적을 탐지한 것도 아레시보 망원경이다. 최근에는 우주의 기원을 규명할 수 있는 좋은 접근 방법이자, 장차 충돌로 벌어질 위기상황을 대비할 수 있는 소행성 연구에 힘썼다. 어디 그뿐인가. 소행성 주위를 두 개의 위성이 도는 삼중 소행성을 발견하기도 하고, 최근까지 지구 근처로 접근하는 소행성을 찾거나 궤도를 조사하는 핵심 역할을 꾸준히 해냈다. 안테나에 수많은 상처와 흔적을 남기는 것도 기꺼이 감수하며 말이다.
거대 구조물과 인간의 따뜻한 교감
아레시보 망원경을 이용해 쌍성 펄서를 발견해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과학자 러셀 힐스(왼쪽)와 조지프 테일러. [미국 에너지부 United States Department of Energy 홈페이지, 노벨상 The Nobel Prize 홈페이지]
외계 지적 생명체 탐사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대전제가 필요하다. 바로 외계인이 대화의 수단으로 전파를 사용할 것이라는 가정이다. 다분히 인간적인 이 공상이 맞아떨어질 지에 대한 검증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우리는 이제야 겨우 같은 행성에서 태어나고 사라진 과거 선조들이 남긴 상형문자를 공들여 해석하고 있으며, 어느 정도 지적능력을 갖춘 침팬지나 범고래 등이 보내는 신호를 아직 알지 못한다. 하물며 정말 있는지 확신조차 할 수 없는 외계문명의 존재를 찾아내고 소통하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지만 이러한 노력이야말로 우주에 존재하는 지적 생명체에 대한 유일한 증거인 인류가 얼마나 위대한지를 여실히 보여준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믿음 덕분에 우리의 사고력은 고작 태양계 변두리의 행성에 머물지 않을 수 있었고, 시선을 아주 먼 곳까지 둘 수 있었다. 아마 부서지는 그 순간까지 아레시보 망원경은 맑은 눈빛으로 우주를 응시하고 있었을 것이다. 헤드셋을 끼고 미약한 외계의 신호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영화 속 조디 포스터처럼 말이다.
궤도_연세대 천문우주학과 학부 및 대학원을 졸업하고 한국천문연구원 우주감시센터와 연세대 우주비행제어연구실에서 근무했다. ‘궤도’라는 예명으로 팟캐스트 ‘과장창’, 유튜브 ‘안될과학’과 ‘투머치사이언스’를 진행 중이며, 저서로는 ‘궤도의 과학 허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