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2권(나남/ 2020) [홍중식 기자]
이 대목에서 꼭 추가하고 싶은 것은 채록자들이 구술 내용을 그대로 받아쓰지 않고 사실 여부를 검증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결과를 각주에 담아 최 옹의 구술 가운데 사실에 어긋나는 내용은 설명을 덧붙였다.
우선 최 옹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하기로 한다. 1928년 강원 원주에서 태어난 그는 17세 때 연희전문학교 학생으로 해방을 맞으면서 김구 선생의 노선에 따라 대한학생연맹 위원장으로 신탁통치반대운동에 참여했고, 그 일환으로 소련군이 점령한 북한에 잠입해 역시 신탁통치반대운동을 이끌던 조만식 조선민주당 위원장을 만났으며, 1947년 ‘장덕수사건’에 연루되기도 했다.
20세인 1948년 8월 15일 이승만 정부가 세워진 뒤 그는 자신의 종교인 천주교의 가르침에 따라 이 대통령의 ‘정적’이라 할 수 있는 천주교도 장면 부통령을 돕다 체포 위기에 직면하자 1957년 일본으로 망명했다. 그 뒤 도쿄에 한국연구원을 설립했고, 이를 국제관계공동연구원으로 발전시켰다. 이 과정에서 그는 ‘조선=한국’에 관련된 책을 10만~20만 권이나 확보해 일본인에게도 연구의 폭을 넓혀줬다. 그의 모교인 연세대가 그에게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한 까닭이다.
이렇게 도쿄에 30년 동안 머물면서 일본 정계·재계·언론계·학계 등 각계 인사들과 친교를 쌓았고, 박정희 전 대통령과도 가까이 지내며 한일관계 막후에서 일정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그가 공개한 이야기들은 단순히 한 망명객의 개인사가 아니라 한일관계의 이면사에 해당한다.
그 수많은 이야기 가운데 하나는 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 당시 일본 총리와 면담했다는 기록을 내세우려 했던 한국 요인들의 행태에 관해서다. 전직 문교부(현 교육부) 장관을 비롯한 한국 정계·관계·재계 요인들이 모두 박 전 대통령으로부터 ‘점수’를 따려고 후쿠다 총리와의 면담을 최 옹에게 간곡히 부탁한 사실은 한국 정치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그들은 박 전 대통령이 후쿠다 총리와 가깝다는 사실에 주목했던 것이다.
이것보다 서평자가 주목한 대목에는 다음의 사실들도 포함됐다.
중국 랴오닝성 뤼순감옥에서 안중근 의사가 정근, 공근 두 동생과 홍석구 신부를 만나 유언 하고 있는 모습. [동아DB]
둘째, 그런데 최 옹의 관심은 곧 안중근 의사에게 집중됐다. 우리 민족 불세출의 영웅 가운데 한 명인 안중근 의사에 관한 자료들을 일본에서 꾸준히 하나하나 발굴해 국내에 소개한 그의 공로는 인정받기에 충분하다. 특히 그가 일본 학자가 먼저 입수한 ‘안응칠(安應七) 역사’(흔히 ‘안응칠 자전’으로 알려져 있다)를 끈질긴 설득 끝에 찾아오는 과정은 감동적이다. ‘안응칠’은 ‘안중근’의 다른 이름인데, 그는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우리 민족이 반드시 확보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그는 일왕을 향해 폭탄을 던진 이봉창 의사에 관한 자료도 발굴했다. 비록 일왕을 죽이지는 못했지만 조선인의 항일독립 의지를 널리 알린 이 의사의 의거가 훨씬 더 자세히 알려지게 된 것은 그의 공이라 하겠다.
셋째, 최 옹은 중국 만주에 있는 고구려 광개토대왕릉비에 관한 연구에도 힘을 쏟았다. 광개토대왕릉비는 광개토대왕의 아들이자 후임자인 장수왕이 지린성 지안에 세운, 글자 그대로 ‘위대한 비석’으로, 여기에 새겨진 비문을 놓고 남한, 북한, 일본, 중국 사이에 격론이 벌어져왔다. 능비와 격론에 관한 그의 회상은 흥미롭다. 특히 1960년대 홍위병이 조선인의 비석이 왜 중국 땅에 세워져 있느냐는 비상식적인 발상 아래 파괴하려 했을 때 당시 저우언라이 총리가 개입해 방지했다는 일화는 아슬아슬함을 느끼게 한다.
혼일강리역대국지도. [서울대 규장각]
그는 독도에 관한 지도, 특히 서양의 지도들을 찾아내고 사들였다. 서양의 지도에 근거해 한국 입장을 뒷받침하는 것이 국제적으로 더 설득력이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다섯째, 최 옹은 임진왜란 때 함경도 의병대장 정문부의 승리가 기록된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의 실물을 야스쿠니 신사에서 1978년 확인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외교부장이었고 1948년 남북협상 추진자 가운데 한 명이었으며 2대 국회의원을 역임한 조소앙이 메이지대 학생일 때 조선이 임진왜란에서 승전했다는 내용을 담은 전승비가 야스쿠니 신사에 있다고 쓴 글을 읽은 최 옹은 마침내 그 비를 찾아 ‘북관대첩비’인 사실을 알아낸 것이다.
이 사실이 국내 매체에 보도되자, 박 전 대통령은 최 옹에게 직접 전화해 그 비가 국내로 돌아올 수 있도록 힘써달라고 제의했으며, 그는 여러 통로를 통해 결국 그 제의를 실현하는 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 관한 이야기 역시 감동적이다.
여섯째, 1972년 7월 4일 서울과 평양에서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자 일본 정계 일각에서 경계심이 높아졌으며, 이것을 무마하기 위해 박 전 대통령이 당시 최규하 외교안보특별보좌관을 파견해 강연하게 했다는 비화 역시 인상적이다. 5·16 군사정변 직후 박정희가 ‘빨갱이’가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던 일본 정계의 ‘우익’이 이것을 보고 그 의혹을 재생시켰다는 사실은 한반도를 바라보는 일본의 한 시각을 보여준다.
일곱째, 1973년 박정희 정권이 중앙정보부를 통해 자행한 김대중 납치사건을 둘러싸고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가 분쟁한 사실에 대한 그의 관찰과 관여 역시 많은 일화를 담고 있다.
여덟째, 1979년 10월 26일에서부터 12월 12일로 이어진 역사적 전환기에 관한 그의 관찰 가운데 관심을 갖게 하는 대목은 자신의 4촌형인 최규하 전 대통령에 대한 것이다. 최 옹은 최 전 대통령이 12월 12일 전두환 국군보안사령관 등이 대통령 관저로 몰려와 정승화 계엄사령관의 불법 체포에 대한 사후 재가를 요청했을 때 거절했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거절한다고 현직 대통령을 죽일 수 있었겠느냐고 반문했고, 거절했더라면 최 전 대통령은 ‘민족 영웅’이 될 수 있었는데 기회를 놓쳤다고 아쉬워했다.
그는 국내뿐 아니라 일본에 머물면서 만났던 사람들에 대해서도 자세히 회상했다. 거기에는 한국천주교의 노기남 대주교와 김수환 추기경, 이승만 전 대통령 때 국무총리 비서실장을 지냈으나 ‘국제공산당자금사건’에 연루됐다는 혐의를 받아 일본으로 망명한 선우종원, 동아일보사 편집국장을 지내고 일본인 부인을 따라 도쿄로 망명해 한반도중립화운동을 이끌었던 김삼규, 항일독립운동가로 동아일보사 사장을 역임하고 한국민주당(한민당) 수석원내총무로 활동했던 송진우를 암살한 뒤 감옥생활을 하다 6·25전쟁을 계기로 도쿄로 망명한 한현우, 남로당원으로 월북했다 중국을 거쳐 일본으로 망명한 박갑동, 박 전 대통령의 처남이자 국회의원을 지낸 육인수, 동아일보사 도쿄특파원으로 훗날 동아일보사 사장을 거쳐 김영삼 정부에서 통일원(현 통일부) 장관으로 봉직한 권오기, 5공 실세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히고 국토통일원(현 통일부) 장관도 지낸 허문도를 비롯해 이호 전 주일대사, 이규호 전 주일대사 등이 포함됐다. 이어 시인 김지하, 극작가 한운사, 음악인 길옥윤, 전 서울시 교육감 김원규, 전 서울대 법과대학 학장 이한기와 그의 제자 백충현, 그리고 전 서울대 사범대학 지리교육과 교수 이찬 등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책에는 양명학의 대가로 항일독립지사였으며 대한민국 초대 감찰위원장을 역임했다 6·25전쟁 때 납북된 정인보 선생이 북한에서 별세했다는 사실이 도쿄를 방문한 북한 홍기문에 의해 확인되면서 국내에 알려진 경위 등도 들어 있다. 홍기문은 소설 ‘임꺽정’의 작가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전 월북해 부수상에 오른 홍명희의 장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