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일 3개국에서 자국 포도로 생산한 고급 와인시장이 넓어지는 추세다. 왼쪽부터 한국, 중국, 일본의 와인. [각 업체]
中 옌타이시는 아시아 유일 ‘국제와인도시’
고량주와 칭다오 맥주의 나라 중국은 알고 보면 세계 5위 와인 소비량을 자랑하는 국가다. 전체 와인 소비량에서 수입 와인과 중국 와인의 비중이 절반씩일 정도로 자국 내 와인 생산 및 소비가 활발하다. 중국의 포도밭 면적은 세계 2위. 굴지의 와인 종주국인 스페인(1위)과 프랑스(3위) 사이에 당당히 위치한다. 중국 와인은 유럽, 두바이, 홍콩으로 수출되고도 있다.중국 내 와인 산지는 넓게 분포한다. 서해와 마주 보고 있는 산둥성 옌타이시에서부터 내몽골과 가까운 닝샤후이족자치구, 실크로드로 유명한 신장웨이우얼자치구, 차마고도가 시작하는 윈난성 등이 주요 산지다. 이 중 와인을 가장 많이 생산하는 곳은 고량주로 유명한 옌타이시. 전체 와인 생산량의 40%가 이곳에서 나온다.
청나라 말기인 1892년 옌타이시에 장유포도양주공사(張裕葡萄醸酒公司)라는 와이너리가 설립된 것이 그 시초. 옌타이시에서는 카베르네 소비뇽, 메를로 등 대표적인 와인용 포도 품종이 재배되고 있다. 1987년 국제와인기구(OIV)는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옌타이시를 국제와인도시로 선정했다.
중국의 장위와인. [사진 제공·문정훈]
하지만 1980년대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 우선 포도밭부터 달라졌다. 사막을 개간해 유럽 품종의 포도나무를 심었다. 황허 등에서 포도밭으로 물을 끌어왔다. 정부가 와인 연구비를 댔고, 국제와인콩쿠르도 개최했다.
이러한 노력은 2000년대 결실을 보기 시작했다. 와인산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한 것이다. 2002년 2억8000만ℓ였던 중국의 와인 생산량이 2012년 13억8000만ℓ로 4배 이상 증가했다. 최근 중국 정부의 삼공소비(공무원 관용차량, 해외 출장, 식음료비) 억제 방침에 따라 소비가 다소 줄었으나, 중국은 여전히 고급 와인 생산국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유럽 와인업체들도 중국 투자에 나섰다. 프랑스 최대 와인업체 카스텔(CASTEL)그룹은 2001년 옌타이시의 장유포도와 함께 합작회사 ‘샤토 장유 카스텔’을 세웠다. ‘돔페리뇽’으로 유명한 모에 헤네시 디아지오(Moët Hennessy Diageo)와 시바스 리갈로 알려진 페르노리카(Pernod Ricard)도 중국에 진출했다.
최근 가장 각광받는 와인 산지는 닝샤후이족자치구다. 업계에서는 이 지역을 미국 캘리포니아주 나파밸리와 남아프리카를 잇는 와인 산지로 주목한다. 사막을 포도밭으로 바꾼 지역이 바로 이곳이다. 1980년 1개에 불과하던 와이너리가 현재 200개가 넘는다. 모에 헤네시 디아지오와 페르노리카가 투자한 곳도 여기다.
닝샤후이족자치구는 강수량이 적어 밀도와 당도가 높은 포도를 재배할 수 있고, 일조량이 많아 포도 열매가 잘 자란다. 겨울에는 추운 대륙성 기후라 캐나다의 주요 와인용 포도 품종인 비달을 재배해 아이스 와인도 생산한다.
항공기 일등석에 제공되는 일본 와인
국제와인기구에 일본 고유의 포도품종으로 등록된 고슈 포도. [위키피디아]
이 모임은 일본 와인에 대한 이미지 개선에도 나섰다. ‘맛이 좋아졌다’가 아닌 ‘일본 와인이 달라졌다’는 운동을 벌인 것이다. ‘맛이 좋아졌다’는 표현은 기존 와인 맛이 나빴다는 의미라 배제했다. ‘달라졌다’는 말은 단맛 위주의 와인에서 포도의 풍미와 토양의 맛을 살리고, 일본 전통음식과도 어울리는 와인으로 탈바꿈했다는 의미다.
2011년 국제와인기구가 ‘고슈(甲州)’라는 포도를 일본 고유 포도 품종으로 인정했다. 이는 일본인이 자국 와인을 다르게 인식하는 계기가 됐다. 그리고 그저 ‘국산 와인’이라고 부르던 자국 와인을 ‘일본 와인’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일본 와인의 정체성이 정립되면서 소비 또한 늘었다. 2013년 ‘머스캣베일리A(MBA)’라는 품종이 추가로 등록되면서 일본의 고유 포도 품종은 두 개가 됐다.
일본 와인의 특징은 와인 라벨에 한자와 일본어를 병기한다는 점이다. 괜한 영어식 표현을 지양하고 일본의 정체성을 잘 녹여 넣은 것이다. 일본의 화이트 와인은 일본식 청주인 사케의 질감과 비슷하다. 따라서 일본 와인과 잘 어울리는 음식은 프랑스나 이탈리아 요리가 아닌 일식(日食)이라는 인식이 퍼졌다. 일식시장이 요식업계에서 가장 큰 시장이다 보니, 일본 와인 시장도 크게 성장했다. 최근 일본 와인은 일본항공(JAL) 일등석에도 등장했다. 프리미엄 이미지가 굳건히 자리 잡은 것이다.
현재 일본 내 와인시장은 수입 와인이 70%, 일본 와인이 30%를 점유한다. 그런데 일본 와인의 80%가 원액을 벌크로 수입해 포장만 일본에서 한 제품이다. 이들 제품은 병당 500~700엔으로 매우 저렴하다. 일본산 포도로 만든 진짜 일본 와인은 가장 저렴한 것이 1500엔(약 1만6750원), 비싼 것이 2만 엔(약 22만3300원)이다.
따라서 같은 일본 와인이라도 원액을 수입했느냐, 자국 포도로 만들었느냐에 따라 구별해 표기할 필요가 생겼다. 일본 정부는 수입 원액으로 만든 제품의 겉면에 ‘수입 와인 사용’이라고 표기하게 했다. 과실농축액을 사용한 와인 제품 역시 ‘농축과즙 사용’이라고 표기해야 한다. 자국산 포도로 만든 와인은 산지명, 포도 품종, 포도 수확 연도를 기록하게 했다. 소비자가 무늬만 일본 와인인지, 진짜 일본 와인인지 구분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러한 정부 방침이 고급 일본 와인의 성장에 도움이 된 것은 당연하다.
국내 ‘와이너리 체험’도 인기
서울 프라자호텔에서 열린 ‘한복과 한국 와인의 만남’ 행사에 선보여진 한국 와인들. [모던한 제공]
1990년대 PC통신에서 와인 만들기 동호회가 생겨나고 뜻있는 포도 과수원이 와인 생산에 나서면서 와인 제조 마니아들이 형성됐다. 이들이 2010년 전후로 과수원 경작에 나서며 와인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후 포도밭 경작, 다양한 품종 재배, 토양 개량 등 수많은 도전을 거친 끝에 한국에서도 유럽에서 인정받는 와인이 나오고 있다.
이에 더해 7년 전부터 농림축산식품부가 ‘찾아가는 양조장’ 사업을 벌이면서 봄가을 와이너리 체험을 시행했고, 이에 힘입어 한국 와인 팬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2018년에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딸 이방카 트럼프가 내한했을 때 만찬주로 ‘여포의 꿈’이라는 한국 와인이 선정됐다. 최근에는 더플라자 서울 등에서 ‘한복과 한국 와인의 만남’이라는 독특한 행사가 진행되기도 했다. 중국이나 일본보다 느리긴 해도 한국 와인 역시 차곡차곡 한 계단씩 밟으며 성장해가는 중이다. 충북 영동 여포와인농장의 여인성 대표는 “와인산업을 단순히 수익 면에서만 바라보지 않고, 와인에 뜻있는 사람들이 포도 재배부터 와인 제조, 와이너리 체험 등 모든 과정에 참여하다 보니 한국 와인이 탄탄하게 성장해갈 수 있는 것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한때 한국에서 와인을 만든다고 하면 “왜 서양 술을 만드냐”는 지적을 받곤 했다. 하지만 세상 그 무엇도 우리 땅에 기초하는 것이라면 우리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와인도 그 시작이 서유럽이 아닌 이슬람 문화권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와인은 꾸준히 키워가야 할 중요 문화이자 산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