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구 소공동 한진그룹 본사(왼쪽)와 사모펀드 KCGI가 운영하는 ‘밸류한진’ 홈페이지. [뉴시스]
국민연금은 한 발 빼지만…
KCGI는 한국 최초의 토종 행동주의 펀드로 간주된다. 행동주의 펀드란 주식을 대량으로 매수, 특정 기업의 주요 주주로 등재한 뒤 경영에 적극 관여해 이익을 추구하는 펀드를 말한다. 배당금이나 시세차익에만 연연하지 않는 적극적인 투자 방식이다. 주식회사의 본고장 미국에서는 1927년 투자가 벤저민 그레이엄이 노던파이프라인의 최대주주인 존 록펠러 2세를 설득해 이 회사의 잉여현금을 돌려받은 일을 주주행동주의(Shareholder Activism)의 시초로 본다.
1999년 미국계 헤지펀드 타이거펀드의 SK텔레콤 공격 이후 국내 기업들의 경영권을 위협한 해외 행동주의 펀드가 국내 기업에 관여하는 일이 꾸준하게 이어졌다. 소버린(SK), 칼 아이컨(KT&G), 엘리엇(삼성물산) 등이 대표적 사례. 2006년 장하성 고려대 교수가 일명 ‘장하성 펀드’로 불린 한국기업지배구조개선펀드(Korea Corporate Governance Fund)를 출범했지만, 이 펀드는 행동주의 펀드라기보다 소액주주 운동 성격이 강했다. 최근 들어 라임자산운용, 밸류파트너스자산운용, KB자산운용, 한국투자밸류자산운용 등이 행동주의를 표방한 펀드를 내놓고 있다. 그러나 설정액 규모가 수십억 원에 불과해 실제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데 한계가 있다.
KCGI는 다르다. 지난해 8월 출범하면서 1600억 원 규모의 펀드를 조성, 단숨에 한진칼과 한진의 2대 주주로 올라섰다. KCGI가 한진과 한진칼 주식을 사들이는 데 쓴 돈은 2840억 원에 달한다고 알려진다.
KCGI가 5개년 계획을 통해 한진 측에 요구한 주요 사항은 다음과 같다. △KCGI가 추천한 사외이사 2인 포함, 6인으로 구성된 ‘지배구조위원회’를 설치해 주주가치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현안에 대한 사전 검토 및 심의를 담당하도록 함 △만성적자를 보이고 있는 칼호텔네트워크와 LA 월셔그랜드호텔, 노후화된 와이키키리조트, 인수 이후 개발 중단된 서울 종로구 송현동 호텔 대지, 제주 파라다이스호텔, 왕산마리나 등에 대한 투자 당위성을 원점에서 재검토 △대주주 일가의 각종 갑질 행태와 위법 행위 재발을 방지하고 낮아진 브랜드 이미지 회복을 위해 대주주는 주주로서 감시 역할에만 충실 등이다.
횡령 등 혐의를 받고 있는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2018년 6월 28일 서울 양천구 서울남부지방검찰청에 출석하고 있다. [동아일보]
KCGI의 ‘한진 공격’과 관련해 시장에서는 “때와 대상을 잘 골랐다”는 반응이다. 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의 ‘물컵 갑질’과 조 회장 부인 이명희 전 일우재단 이사장의 운전사 폭행 등 일련의 사태로 한진 오너가에 대한 국민적 여론이 매우 악화된 상태다. 또 국민연금이 스튜어드십 코드(기관투자자의 의결권 행사 지침)를 도입했으며, 문재인 대통령이 “앞으로 정부는 대기업 대주주의 중대한 탈법과 위법에 대해서는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를 적극 행사하겠다”고 발언해 힘을 실어줬다. 한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조양호 회장 일가에 대해 우호적인 한진그룹 주주는 조 회장 일가를 제외하면 국내 기관투자자든, 외국인이든, 소액주주든 없다고 보면 된다”고 요즘 분위기를 전했다.
“때와 대상 잘 골랐다”
국민연금은 2월 1일 한진칼에 대해 제한적으로 주주권을 행사하기로 했다.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왼쪽에서 두 번째)이 이날 열린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 회의장에서 모두 발언을 하고 있다. [동아일보]
“기업에 부정적” 對 “차익거래 기회 없애면 될 일”
물론 행동주의 펀드를 지켜보는 재계 입장은 불편하다. 한국경제연구원은 1월 24일 ‘행동주의 펀드가 기업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행동주의 펀드의 기업 경영 개입은 성장성, 수익성, 안전성 등 기업의 모든 부문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했다. 10대 행동주의 펀드가 2013~2014년 공격한 48개 기업을 분석한 결과 고용과 시설, 연구개발(R&D) 투자가 급격히 위축됐고, 당기순이익이나 영업이익도 모두 하락했다는 것이다. 반면 자기주식 매입과 배당은 가파르게 증가했다는 분석이다.미국 뉴욕 컬럼비아대 경영대학원에서 가치투자를 가르치고 그 자신이 헤지펀드 매니저이기도 한 제프 그램은 저서 ‘의장! 이의 있습니다 : 행동주의 투자 시대, 주주와 CEO를 위한 안내서’에서 그 대응 방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칼 아이컨은 주식시장에서 거래되는 가격과 공개매각 같은 사모시장에서 거래되는 가격의 차이를 노리고 파고들었다. (중략) 그 차익거래 기회를 없애면 된다. 쉽게 말해 정상적으로 배당하고, 낭비하는 비용이 없도록 하면 된다. 그리하여 시장에서 형성되는 주가가 회사의 제 가치를 반영하도록 하면 된다. 그게 유일한 방법이다.’
TIP 국민연금이 하는 ‘제한적 경영 참여’란?
국민연금기금운용본부는 2월 1일 대한항공 지주회사인 한진칼에 대해 회사 정관 변경을 요구하기로 했다. 국민연금은 3월 열리는 주주총회에서 ‘임원이 횡령·배임을 저질러 금고 이상의 형이 확정되는 경우 임원직에서 자동 해임된다’는 내용을 포함한 정관 변경 안건을 제출한다. 현재 조양호 한진칼 대표이사 · 회장은 횡령 · 배임 등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상태이며, 국민연금은 한진칼 지분 7.34%를 보유한 3대 주주다. 정관 변경은 경영 참여 주주권 행사 가운데 가장 강도가 약한 조치다. 그 외 조치로는 임원 해임, 사외이사 선임, 의결권 사전 공시 등이 있다.한편 국민연금은 대한항공에 대해서는 주주권 행사를 하지 않기로 했다. 국민연금은 대한항공 지분을 11.7% 보유한 2대 주주로, 주주권을 행사할 경우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자본시장법)이 규정한 ‘10% 룰’에 따라 6개월 이내 단기매매 차익을 토해내야 한다. 이번에 대한항공에 대해 경영 참여를 선언할 경우 100억 원가량을 토해내야 할 것으로 추산된다는 점을 고려해 주주권 행사를 하지 않기로 했다.
강성부는 누구?
“코리아 디스카운트 진짜 원인은 기업지배구조”
채권 애널리스트 출신 … 투자자들로부터 두터운 신뢰받아
위 글은 ‘글로벌 기업의 지배구조 2015’ 26쪽에 실린 일화다. 600쪽이 넘는 두꺼운 책을 쓴 대표 필자는 강성부 당시 신한금융투자 글로벌자산전략팀장. 그는 이 책의 1장 ‘위기의 한국 재벌’에서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진짜 원인은 남북분단이 아닌 기업지배구조이고, 한국 재벌들은 세습을 거듭하면서 더는 오너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 지분율을 갖게 돼 대주주 또는 현 경영진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으며, 이들은 기업이라는 사회적 생산수단의 소유자라기보다 나머지 주주, 채권자 혹은 사회로부터 경영을 위임받은 대리인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다. ‘경영진은 경영진다워야 한다. 능력과 도덕성이 절실한 상황’이라고도 했다.
이 책이 출간되기 넉 달 전 벌어진 대한항공의 ‘땅콩회항’ 사건에 대해서는 ‘회사를 100% 소유했다고 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회사 자산의 단 1.5%만 소유한 가족의 일원이 비행기를 세운 것’이라고 평했다. 2014년 3분기 말 기준 대한항공 부채비율이 809%이므로 자산 23조3000억 원의 89%는 채권자 몫이고, 나머지 주주 몫 11% 중 조양호 회장 및 자녀 3남매의 직간접 소유권은 13.7%이므로 총자산에 대한 실질 소유권은 1.5%(11%×13.7%), 즉 3500억 원(23조3000억 원×1.5%)에 불과하다는 계산에 근거한 것이다.
이러한 그의 시각은 KCGI가 1월 21일 공개한 ‘한진그룹의 신뢰 회복을 위한 프로그램 5개년 계획’에도 그대로 녹아 있다. 117쪽짜리 이 보고서는 3장 ‘코리아 디스카운트 및 나아갈 길’에서 한국 재벌이 일자리 창출과 글로벌 경쟁의 대표선수에서 애물단지로 전락했다고 진단하면서, 한국형 주주행동주의자가 나와 대주주에 편중된 의사결정 구조를 타파하고 기업이 투명 경영, 주주 중시 경영, 사회적 책임을 다하도록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형 지배구조 개선의 문화전도사’
앞에서 언급한 책을 출간한 다음 달, 강 대표는 LIG그룹 계열 사모투자회사 LK투자파트너스 대표로 자리를 옮기며 애널리스트에서 투자자로 변신한다. 그는 이 회사에서 550억 원 펀드를 조성, 요진건설에 투자해 2년 반 만에 2배 이상 수익을 남긴 것으로 알려진다.
지난해 7월 강 대표가 설립한 KCGI는 ‘한국기업지배구조개선(Korea Corporate Governance Improvement)’의 앞자리를 따서 만든 사명이다. 이 회사는 ‘한국형 지배구조 개선의 문화전도사’를 표방한다. 그는 최근 언론과 인터뷰에서 한진그룹에 대해 “시어머니처럼 간섭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한 증권업계 관계자는 “투자자들이 KCGI에 11년간 돈을 맡기기로 했다고 들었다”며 “이렇게 오랜 기간 돈을 맡기는 것은 국내 사모펀드업계에서 흔한 일은 아닌데, 그만큼 투자자들이 강 대표를 신뢰한다는 것 아니겠느냐”고 귀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