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기자의 ‘오타쿠글라스’
※관객이 공연장에서 작품과 배우를 자세히 보려고 ‘오페라글라스’를 쓰는 것처럼 공연 속 티끌만 한 디테일도 놓치지 않고자 ‘오타쿠글라스’를 씁니다.[사진 제공 · 오디컴퍼니]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의 주인공 헨리 지킬 박사의 대사를 조금 고쳐봤다. 가창력 좀 된다 하는 가수들이 음악프로그램이나 콘서트에서 한 번쯤은 부르다 못해 결혼식 축가로도 널리 애창되는 ‘지금 이 순간’을 주인공이 서재에서 부른 후 나오는 장면의 대사다.
기자는 ‘지킬 앤 하이드’로 뮤지컬에 입문했고 ‘회전문’(같은 공연을 여러 번 관람하는 행위)도 처음으로 돌아봤다. 어쩌다 보니 매년 이 작품을 예매하는 게 숨 쉬듯 당연한 일이 됐는데(그렇다고 다른 공연을 보지 않는다는 건 아니다. 결국 어떤 식으로든 ‘텅장’이 된다는 뜻이다), 공연이 있는 시즌에는 저녁 약속을 잘 잡지 않는다. 언제 ‘꿀 캐스팅’ 조합의 자리가 생길지 모르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은 안다. 그런 날이면 기자가 공연장 근처 카페나 로비에서 하이드처럼 어슬렁대고 있으리라는 것을.
올해 캐스팅도 ‘기대 이상’
조승우 [사진 제공 · 오디컴퍼니]
보도를 목적으로 기획사에서 주는 프레스 티켓이 있긴 하다. 하지만 1장. 전 캐스트의 연기와 노래를 보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이 때문에 올해는 프레스 관람이 열리기도 전부터 2018년 지킬/하이드 역을 맡은 조승우, 홍광호, 박은태의 공연을 다 봤다. 작품 설명은 ‘애정 필터’가 끼어 객관적이지 않을 수 있으니, 올해 어떤 캐스팅으로 봐야 할지 고민 중인 이들을 위해 글을 쓰고자 한다.
이 작품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소설 ‘지킬 박사와 하이드’를 원작으로 한 뮤지컬이다. 프랭크 와일드혼이 작곡을 맡았는데, 내용은 지킬과 하이드의 대립이라는 설정을 제외하면 원작과 거의 다르다. 국내에 아무런 정보도 없던 시절 배우 류정한의 ‘류지킬’로 이 작품을 처음 본 후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와 영국 런던 웨스트엔드에 여행 갔을 때 원어로 감상하고 싶었는데, 도통 찾을 수가 없었다. 국내와 달리 흥행 성적이 그리 좋지 않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유독 인기인 ‘지킬 앤 하이드’는 2014년 10주년 공연을 한 데 이어 2019년 15주년 공연을 앞뒀다.
‘지킬 앤 하이드’는 일반적으로 ‘조승우의 뮤지컬’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조승우는 이 작품 외에도 여러 뮤지컬을 했는데 말이다. 2004년 초연부터 지금까지 11명(류정한, 조승우, 서범석, 민영기, 김우형, 홍광호, 김준현, 윤영석, 양준모, 박은태, 조성윤)의 걸출한 남자배우가 지킬/하이드 역을 맡았다. 연기, 노래 다 되고 체력까지 좋아야 소화할 수 있는 역이다. 셋 중 하나라도 없으면 지킬에서 하이드로 변하기 전 먼저 쓰러질지도 모른다. 이 작품을 여러 번 본 건 다양한 배우의 이중인격 연기와 음색, 성량을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다. 비극으로 점철된 작품에서 거의 몇 안 되는 웃음 포인트 중 하나인 “이 느낌은, 마약?”이라는 대사마저 모든 지킬이 다 다르게 소화하니 말이다.
내년이면 국내 공연 15주년
박은태(왼쪽) 홍광호 [사진 제공 · 오디컴퍼니]
아이비, 윤공주, 해나, 민경아, 이정화 (왼쪽부터) [사진 제공 · 오디컴퍼니]
다른 배우들의 1인 2역도 보는 재미가 있다. 2011년 ‘지킬 앤 하이드’ 공연 때 일이다. 한 여성 관객이 나가면서 일행에게 “무대 인사에 왜 지킬만 나오고 하이드는 안 나와?”라고 물은 게 기억난다. 새비지/풀, 비콘스필드/기네비어, 스트라이드/스파이더 역도 캐스팅을 보지 않으면 극 중에서 완전히 다르게 나와, 같은 배우라는 사실을 알아채기 쉽지 않다. 같은 배우가 귀족과 하층민을 모두 연기하니 그 자체로 ‘해학’이다.
다른 캐스팅의 OST도 ‘듣길 원해’
[사진 제공 · 오디컴퍼니]
여담이지만 오타쿠는 돈을 쓰고도 ‘호구’ 취급당하는 경우가 유독 잦다. 사회적 이미지가 박해서일까. 특히 게임·애니메이션업계가 그렇고, 뮤지컬업계도 사정은 비슷하다. 세상사 다 그렇듯, 이 작품도 공연할 때마다 화제가 되다 보니 구설에 오른 적이 있다. 10주년인 2014년 ‘지킬 앤 하이드’ 측 관계자가 “욕하고 인신공격하는 관객은 관객이 아니다. 그들은 작품을 즐길 줄도 모르는 양아치다. 게다가 매출을 올려주는 봉이다”라고 발언한 게 논란이 돼 관계자들이 줄사과하기도 했다. 작품 주제인 ‘인간의 이중성’을 몸소 보여줄 필요는 없었는데 말이다. 소비자를 봉 취급하는 작품은 오래갈 수 없다. 크고 작은 사건이 늘 터지는 이 업계의 관계자들이 염두에 둬야 할 부분이다. 앞으로도 ‘마약’ 같은 매력을 가진 이 작품이 ‘봉’이 아닌 ‘관객’과 ‘무병장수’하길 바란다. ‘봉’은 술집 레드랫을 방문한 지킬 하나면 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