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기자의 ‘오타쿠글라스’
※관객이 공연장에서 작품과 배우를 자세히 보려고 ‘오페라글라스’를 쓰는 것처럼 공연 속 티끌만 한 디테일도 놓치지 않고자 ‘오타쿠글라스’를 씁니다.[사진 제공 · 클립서비스]
티몬과 품바, 그리고 심바가 함께한 애니메이션 ‘라이온 킹’이 세상에 처음 나온 건 1994년. 벌써 25년이 흘렀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심바를 추억하는 이들에게는 반가운 소식이 있다. 지금 공연계와 영화계는 돼지의 해(2019)가 무색할 정도로 ‘사자’가 화제의 중심에 서 있다(물론 품바를 떠올리면 ‘돼지의 해’라고 우겨볼 수도 있겠지만). 올여름에는 ‘라이온 킹’ 실사 버전 영화가 개봉할 예정이고 뮤지컬계에서는 한국 관객을 찾은 ‘라이온 킹’이 매진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라이온 킹’은 광활한 아프리카 대지에서 뛰어놀던 장난꾸러기 사자 심바가 진정한 왕으로 거듭나는 성장 드라마다. 귀엽고 개성 있는 캐릭터와 정감 넘치는 음악이 잔뜩 나오는 ‘라이온 킹’을 애니메이션으로만 놔둘 월트 디즈니가 아니다. ‘알라딘’ ‘미녀와 야수’처럼 뮤지컬로 만들었고, 흥행에 성공했다. 1997년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초연한 뮤지컬 ‘라이온 킹’은 전 세계 20개국 100여 개 도시에서 공연되며 9500만 명의 관객의 눈과 귀를 즐겁게 했다.
‘잠깐만, ‘라이온 킹’? 예전에 서울 잠실에서 본 것 같은데…’라고 생각한다면 그 기억이 맞다. 국내에서는 2006년 일본 극단 시키를 통해 들어와 1년여간 관객을 만났다. 당시 이 작품은 롯데가 설립한 국내 최초 뮤지컬 전용 극장 샤롯데씨어터의 개관작이었다. 일본에서 활동하던 한국인 배우와 국내에서 오디션으로 뽑은 배우들이 무대에 올랐다. 강태을, 김준현, 박은태, 차지연, 이경수 등 내로라하는 뮤지컬 배우가 이 작품을 거쳤다. 하지만 당시에는 36억 원의 적자를 기록하며 막을 내렸다. 국내 뮤지컬시장 분위기를 제대로 읽지 못한 가격 정책과 홍보 전략이 참패의 주요 원인이었다.
[사진 제공 · 클립서비스]
월트 디즈니 컴퍼니 시어트리컬 그룹 인터내셔널 프로덕션 총괄이사인 펠리페 감바는 “디즈니의 스토리텔링이 주는 매력은 모든 어른의 동심에 호소한다는 점”이라며 “처음 제작할 때는 아이들을 위한 작품이 아니었고, 성인을 타깃으로 철학적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다”고 말했다. 이국적 소품과 따뜻한 컬러의 조명이 세렝게티 초원을 만들어내고 다양한 국적의 배우들은 역동적인 에너지를 한껏 뿜어낸다. 작품 주제이기도 한 ‘생명의 순환’은 라피키와 앙상블의 목소리를 통해 ‘Circle Of Life’라는 노래로 완성된다.
그나저나 사자와 하이에나, 멧돼지, 미어캣 등을 무대에 올리려면 대체 어떻게 분장해야 할까. 끽해야 ‘동물탈’ 정도밖에 떠오르지 않는 누추한 상상력을 비웃듯, 초연 연출가이자 의상 디자이너인 줄리 테이머는 아시아의 가면무용극과 인형극에 아프리카 고유의 마스크를 섞어 독창적인 예술작품을 만들어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휴매니멀’(Humanimal·인간+동물), ‘이중 이벤트(Double-event)’다. 여기에 협곡에서 누 떼가 돌진하는 장면이나 사자들이 사냥하는 장면은 그림자와 인형을 활용해 간결하면서도 신비감 넘치게 표현했다. 작품에서 퍼펫(puppet)이나 가면 없이 분장으로 캐릭터를 완성한 건 밀림의 정신적 지주인 개코원숭이 주술사 라피키뿐이다.
이번 시즌 라피키 역을 맡은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 배우 느세파 핏젱은 2009년 요하네스버그에서 열린 디즈니 오디션에서 발탁되며 ‘라이온 킹’과 인연을 맺었다. 세계 주요 도시 랜드마크를 배경으로 진행한 영상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국내에서는 그가 123층짜리 롯데월드타워 꼭대기에 올라 ‘Circle Of Life’를 완창해 화제를 모았다.
막이 오르면 ‘Circle Of Life’에 맞춰 공연장 저 끝에서부터 코끼리를 필두로 매와 기린, 영양과 표범 등이 무대로 뛰어든다. 거대한 코끼리의 위용에 시선을 빼앗긴 것도 잠시, 아무것도 없던 무대는 어느 순간 사자가 포효하는 ‘프라이드 랜드’로 변모한다. 티몬과 품바, 심바가 함께 부르는 ‘Hakuna Matata’나 ‘Can You Feel The Love Tonight’ 등을 듣다 보면 애니메이션에서 받았던 감동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각 지역 맞춤형 대사도 있다. 화려한 무대 커튼을 보고 한국어로 “(대구) 서문시장에서 파는 샤워 커튼 같구나”(서울 공연에서는 ‘동대문시장’으로 바뀌었다)라고 하거나, 품바가 놀랐을 때 “Oh my god!” 대신 “대박!”을 외치는 식이다. 자막에도 적절한 의역과 ‘소오름’ 같은 유행어를 넣었다. 아이와 함께 보러 갔다 추억에 흠뻑 젖어 나오는 어른 관객이 더 많고, 티켓을 지를 때는 손이 떨리지만 보고 나면 제값을 했다는 생각이 드는 작품이다. 진정한 마니아라면 공연 전 애니메이션으로 예습하고, 공연을 감상한 뒤, 올여름 개봉하는 실사판을 보러 가자. 심바의 팬이라면 그 정도는 해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