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교육헌장’은 1968년 12월 5일 제정, 선포됐다. 종전의 홍익인간이라는 추상적 교육이념 대신 전통과 변화를 조화시킨 주체적 교육이념을 제시한다는 명분 아래 만들어진 ‘국민교육헌장’을 기초한 이가 박종홍이다. 동아DB
‘교회’에 강조 표시를 한 이 문장은, 함석헌이 무교회주의자라는 사실을 모르는 상태에서는 온전히 이해될 수 없다. 함석헌은 이 글에서 교회당 수가 늘어나는 현상을 가리켜 ‘나라가 망할’ 징조라고 했다. 고려에 절이 성하고 조선에 서원이 성하면서 나라들이 망한 것에 비유해 당시 기독교회의 번창을 비꼰 말이었다. 기독교는 교회의 종교가 아니라 내적 생명의 종교라는, 무교회주의적 견지에서 교회를 비판한 글이었다.
함석헌은 무교회주의의 존재를 세상에 널리 알렸지만, 동갑내기 동지 김교신에 비해 우치무라 간조의 영향이 그다지 절대적이었다고 말하기 어렵다. 함석헌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스승은 따로 있었다. 다석(多夕) 류영모였다.
류영모와 함석헌이 처음 만난 것은 1921년 오산에서였다. 21년 9월 류영모가 조만식 후임으로 오산학교 교장으로 취임하면서 당시 21세의 3학년생 함석헌을 가르치게 된 것이 인연의 시작이었다. 이때부터 함석헌은, 60년 자신의 과오로 스승으로부터 내침을 당하기까지 40년 동안 류영모를 극진히 따르는 제자로 살았다.
류영모-함석헌의 독특한 계보
다석 류영모(1890〜1981)는 서울에서 태어나 한학을 배우다 1905년 기독교에 입교했다. 1910년 오산학교 교사로 재직 당시 학교 설립자 이승훈을 기독교에 입교하게 했고, 21년 조만식 후임으로 오산학교 교장이 돼 김교신, 함석헌 등에 영향을 끼쳤다. 동아DB
류영모의 사상에는 노자가 예수만큼이나 중요한 위치에 있다. 굳이 분류하자면 류영모는 종교 다원주의자라 할 수 있었다. 상대적으로 류영모에 비해, 김교신 등 성서조선 그룹의 핵심 멤버들은 기독교 정통신앙에 훨씬 가까웠다. 무엇보다 류영모의 노자 사상에 대한 강조가 김교신에게서는 보이지 않는다. 이는 김교신이 훗날의 함석헌과 가지는 차이이기도 하다.
류영모-함석헌 계보에는 특이하게도 도교적 수련 전승이 있는 듯하다. 류달영이 회고한 에피소드 하나를 보자. ‘성서조선’ 사건으로 함석헌과 류달영이 서울 서대문경찰서 유치장 옆방에 나란히 수감돼 있을 때였다. “함석헌 선생으로부터 통방이 왔다. 유치장 안에서 할 일이 없으니 정신통일 공부를 시작하자는 제의였다. 깊은 밤중에 정좌를 하고 두 손바닥을 맞대어, 합장한 손에 전기가 올라서 온몸이 뜨거워지기 시작하면서 (중략) 나는 매일 깊은 밤중에 정좌하고 정신통일을 수련하였다. 함석헌 선생은 감방 안에서 뜨거워진 손으로 환자의 아픈 곳을 만져서 치료한다는 정보도 받았다.”(류달영의 ‘소중한 만남’)
함석헌(1901~89)은 평북 용천 출신으로 ‘성서조선’ 창간에 참여했다. 1956년부터 ‘사상계’에 글을 발표하면서 자유당 정권을 비판했고, 5·16 군사정변 직후에는 군사정권에 도전하며 민중운동가로 활동했다. 동아DB
함석헌의 가장 유명한 용어인 ‘씨’이라는 말도 실은 류영모로부터 온 것이다. 류영모에게서 가져왔다는 것은 동양적 사유 없이는 이 용어에 대한 풀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흔히들 ‘씨’을 민중 자체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원래 이 말은 사회학적 집단으로서의 민중과는 별 관련 없는 개념이었다. 죽지 않는 생명으로서 ‘씨’와 극대의 하늘을 의미하는 ‘ㅇ’, 극소이자 소우주인 자아를 의미하는 ‘·’, 활동양태로서의 ‘ㄹ’이 결합한 말인 씨은 하나님(우주)의 생명이 내려와 인간의 얼(靈)이 된 존재로 해석된다(함석헌의 ‘우리가 내세우는 것’). 씨 하나에 우주가 있다는 말로 요약되는 이런 생각은 그 뿌리가 류영모에게 있었다. 류영모는 한글도 한자처럼 파자(破字)하여 해석하는 독특한 사유 습관이 있었다.
김범부와 박종홍의 국가주의 철학
범부 김정설(1897〜1966)은 경북 경주 출신의 동양철학자로 소설가 김동리의 친형이며, 제2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동아DB
김범부는 누구인가. 범부(凡夫) 김정설은 함석헌과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재야 사상가로, 소설가 김동리의 큰형이자 영남대학교의 뿌리 중 하나인 계림대(계림학숙) 초대 학장을 지낸 인물이다. 1963년 김범부는, 박정희가 회장으로 있던 ‘오월동지회’에 민간 측 부회장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박정희가 대통령이 된 이후에는 그의 비공식 정치자문역을 맡았다고 전해진다.
김범부는 노자를 어떻게 보고 있었을까. 함석헌과 류영모에게 중요한 노자의 평화주의는 김범부에게는 이상주의자의 망상에 불과했다. 김범부는 세계주의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다. “역사의 현실, 역사의 원칙을 잘 모르는 ‘코즈모폴리턴’들의 망상”이라는 것이다.
1976년 3·1민주구국선언 사건과 관련해 침묵시위를 하고 있는 함석헌(오른쪽에서 두 번째). 당시 서울 명동성당에서 개최된 3·1절 기념미사를 빌미로 정부가 재야의 지도급 인사들을 정부전복선동 혐의로 대량 구속한 사건이다. 동아DB
“나라에 대한 심정도 기실인즉 이해득실을 초월해서 당연히 그리 해야 하고 그리 않고는 할 수 없는 ‘무조건의 감분(感憤)’ 다시 말해서 효자가 부모에게 대한 측달(惻)한 심정 곧 지정(至情)이라 할밖에 딴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심정들은 이것을 국가관으로 규정하자면 역시 윤리적 혹은 ‘인륜적 국가관’으로 해야 할 것이다”(김범부의 ‘방인(邦人)의 국가관과 화랑정신’). ‘인륜적 국가관’이라는 한마디로 김범부의 국가관은 깨끗이 요약된다. 국가는 하나의 큰 집안이며 따라서 국민은 그 가족이라는 것이다.
김범부가 재야사상가로서 국가철학을 내세웠다면, ‘공식적으로’ 국가주의 철학을 확립한 사람은 박종홍이다. 1903년 평양 출신의 박종홍은 제1세대 서양철학자로서 한국 철학계의 태두로 공인된다. 경성제국대 철학과를 나오고 독일철학을 전공한 박종홍은 후일 서울대 교수로서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5·16 군사정권기 국가재건최고회의 사회분과 위원이었으며, 70년에는 대통령특별보좌관(교육문화 담당)을 맡았다. 68년 서울대를 퇴임한 후 그해 ‘국민교육헌장’을 기초했다.
김범부가 유교의 충효 논리를 국가철학의 기반으로 삼았다면, 박종홍 역시 유교적 천명사상에 바탕을 두고 국가철학을 확립하고자 했다. 박종홍이 민족 주체성을 강조하는 논리는 북한의 주체철학과도 닮은 것이었다. 국민교육헌장의 첫 문장은 이렇게 나왔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국민 개개인의 인생 사명이 ‘민족중흥’을 위한 것이라는 ‘충격적인’ 생각을 교육헌장으로 명문화했다.
1950년께 류영모(앞줄 가운데)와 함석헌(앞줄 오른쪽)이 함께 찍은 사진. 두 사람 뒤에 서 있는 이는 ‘다석 강의’ 속기록을 작성한 김흥호 목사다. 동아DB
노장 사상과 국민윤리의 충돌
박종홍(1903~76)은 평양 출신으로 경성제국대 철학과를 나와 서울대 철학과 교수를 지냈다. 동아DB
류영모는 ‘효’의 국가주의적 이념화를 극력 비판했다. 류영모에게 효와 충은 전혀 상관이 없는 개념이었다. 김범부에게 효란 충으로 확장되는 기본 바탕에 해당한다면, 류영모에게 부모에 대한 효는 그다음 단계에서 충으로 확장됨이 없이 곧바로 하늘로, 즉 신에 대한 경애로 상승한다. 국가는 ‘효’와 무관한 것이었다.
유교윤리에 기대 김범부와 박종홍이 국가철학을 확립하고자 했다면, 류영모의 국가주의 비판의 밑바탕에는 노장 사상이 있었다. 제자 함석헌이 스승의 생각을 이어 노자의 평화주의에 입각해 국가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당연했다. 안병무에 의하면, 함석헌은 ‘국민’이란 용어를 극히 싫어했다고 한다. 함석헌이 ‘나라 국(國)’ 자를 쓰는 경우는 대개 ‘도둑놈’이란 뜻이라고 했다(안병무의 ‘씨과 평화사상’).
함석헌은 자신의 유명한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나라의 정신적 파산! 사상의 빈곤! 한다는 소리가 벌써 케케묵은 민족 지상, 국가 지상, 화랑도나 팔아먹으려는 지도자들, 이 민족의 정신적 빈곤을 무엇으로 형용할까?”(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사’)
류영모와 함석헌의 노자 이해는, 기독교 사상과 결합한 형태로 한국 현대지성사에서 독특한 정신주의의 맥을 이룬다. 이들의 사상은 사회에서 주류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이후로도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하나의 진영을 형성했다. 평화와 세계를 강조하고 국가주의 철학에 반대하는 이들에게 ‘민족’은 부차적 가치였다. 모두가 ‘조국 근대화’를 외치던 시기 ‘물질’보다 ‘정신’을, 국가이념보다 보편윤리를 강조한 이들은 확실히 이상주의자였다. 이런 이상주의는 대개 한 사회가 나락으로 떠내려가지 않게 잡아주는 거멀못으로 자기 소임을 다한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한국 역사에서 충분히 의미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