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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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재현의 심중일언

두산연강예술상 수상한 30대 연극연출가 김정

“살아 있는 사람과 살아 있는 사람이 만나 새롭고 낯설고 생생한 것을 발견하는 것이 연극”

  • |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입력2018-10-22 12: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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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호영 기자]

    [지호영 기자]

    나이 먹은 것도 서러운데 마흔 이하여만 받을 수 있는 상이 있다. 수학계 노벨상이라 부르는 필즈상이 대표적이다. 한국에도 그런 상이 있다. 매년 공연예술 분야와 미술 분야에서 각 1명씩 뽑아 3000만 원 상금과 1억5000만 원 안팎의 창작지원금을 주는 두산연강예술상이다. 두산그룹을 창업한 연강 박두병의 탄생 100주년을 맞은 2010년 제정됐다. 보통 예술 분야 상이 과거 업적을 토대로 주어진다면 이 상은 미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수여된다. 

    올해 공연 부문 수상자는 연출가 김정(34·프로젝트 내친김에 대표)이다. 공연계 밖 사람들은 “그가 누군데?” 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상복이 터진 연극계 ‘남자 신데렐라’다. 고연옥 작가와 첫 작업이자 자신의 네 번째 연출작인 ‘손님들’이 지난 연말 동아연극상 작품상, 희곡상, 신인연출상 등 3관왕에 올랐다. 이 작품은 한국연극평론가협회 선정 ‘올해의 연극 베스트 3’와 한국연극협회 선정 ‘공연 베스트 7’, 차범석희곡상, ‘이데일리 문화대상’ 연극부문 최우수작상을 휩쓸었다. 그리고 두산연강예술상 수상으로 화룡점정을 찍은 셈이 됐다. 

    그와 인연이 깊은 연극계 인사들도 상복이 터졌다. 고연옥 작가는 말할 것도 없고 그가 2009년부터 6년간 연출부 생활을 했던 극단 물리의 한태숙 대표는 올해 10월 동아일보에서 수여하는 인촌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다. 그래서 10월 16일 두산아트센터에서 만나 인터뷰할 때 “자신이 럭키 가이라고 자랑하고 다닐 법도 한데”라고 짓궂은 질문부터 던졌다.

    상복 터진 럭키 가이?

    10월 5일 두산아트센터 시상식에서 소감을 말하는 김정 연출가. [사진 제공 · 두산아트센터]

    10월 5일 두산아트센터 시상식에서 소감을 말하는 김정 연출가. [사진 제공 · 두산아트센터]

    “연극 베스트 3에 들었을 때 ‘뭐 하나는 받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고 얘기했다 ‘손님들’ 팀원들로부터 핀잔을 들었는데(웃음), 잘난 척하려던 게 아니었습니다. 두 번째 공연(‘손님들’은 2017년 1월 대학로 동숭소극장에서 나흘간 초연 이후 그해 9월 대학로 ‘예술공간 오르다’에서 11일간 재공연됐다) 때부터 이미 이 작품이 우리 손을 떠나 독자적 생명력을 갖게 됐다는 느낌이 들어서였습니다. 초연이 끝나고 복기하면서 내가 과연 연극 속 주인공인 소년의 마음을 제대로 더듬고 짚었나 하는 반성을 하게 됐습니다. 재공연 중간에 배우들이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던져 그 소년의 마음을 최소한 터치는 했다는 느낌이 들었고, 그것을 통해 관객이 받는 느낌도 이미 제가 의도하고 설계한 것을 뛰어넘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품이 제 수준을 훌쩍 뛰어넘어버린 것을 느끼면서 진정한 연극성이 무엇인지도 깨닫는 계기가 됐습니다.” 

    ‘손님들’은 2000년 양친을 도끼로 살해한 고교생 이모 군의 사건에서 모티프를 얻어 창작됐다. 주인공인 소년은 속물근성에 물들었으면서 서로를 증오하기 바쁜 부모에게 올바른 삶의 태도를 일깨우고자 어둠과 한기만 가득한 집으로 길거리에 버려진 기상천외한 손님들을 초대한다. 소년은 “손님을 잘 대접해 보내드려야 이 집을 떠날 수 있다”고 말하지만 부모는 끝내 손님 접대에 실패하고, 절망한 소년은 도끼를 든 채 부모의 방을 방문하고 나와 다시 아침 밥상을 차리며 말한다. “어제는 실패했어. 오늘은 정말 잘해야 돼. 난 포기하지 않을 거야. 날 믿어. 꼭 제대로 살게 해줄 테니까.” 자신에게 쓰인 저주를 풀지 못해 마치 시시포스가 된 양 천인공노할 죄를 반복해야 하는 소년에게 선악의 이분법을 적용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연출가 김정의 파격은 이토록 무거운 작품을 춤과 노래, 웃음이 범벅된 블랙코미디로 빚어낸 점에 있다. 이는 특히 소년이 초대한 손님 3명의 흡인력 강한 캐릭터 설정에서 빚어진다. 아파트 3단지 공터에 사는 길고양이 ‘3단지’와 초등학교 화단에 버려진 낙서투성이 동상 ‘오뎅’, 허물어진 무덤의 주인인 ‘동수아저씨’는 상처받지 않은 듯 살아가려고 귀여움, 인내력, 음산함 같은 필살기로 일종의 버라이어티 쇼를 펼친다. 

    이는 그가 연출한 다른 작품에서도 발견된다. 한국 웅녀신화와 그리스 비극 메데이아를 결합한 고연옥 작가의 ‘처의 감각’(2018)에선 출연 배우들이 남성 중심적 ‘인간 세계’에 맞선 여성 중심적 ‘곰의 세계’의 파열을 슬로모션 되감기 같은 몸의 유희로 풀어냈다. 대사와 몸짓의 불협화음을 추구하는 일본 연출가 오카다 토시키의 작품에서처럼 배우들이 말과 몸의 불협화음으로 웃음을 유발한다. 또 ‘임영준 햄릿’(2017·하수민과 공동연출)은 쫄바지 차림으로 좌충우돌하는 무명배우의 원맨쇼를 통해 햄릿이란 이상적 연극 앞에서 유령처럼 배회할 수밖에 없는 연극배우의 현실을 자기풍자극으로 펼쳐놓는다. 독일 컨템퍼러리 연극의 대가 르네 폴레슈의 ‘현혹의 사회적 맥락이여,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를 연상케 했다.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하는데, 그분들 작품을 보고 저도 깜짝 놀랐어요. 형식만 놓고 본다면 특히 르네 폴레슈 작품을 제가 따라 했다고 오해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작품들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그저 제가 생각하는 연극성을 표현하고자 배우들과 고민을 거듭한 끝에 내놓은 것일 뿐입니다.”

    공연 촌놈의 연극 입문기

    [지호영 기자]

    [지호영 기자]

    연극 팬의 의표를 찌르는 점은 얼핏 리얼리즘 연극의 대척점에 서 있는 것 같은 그가 정통 연극의 표상과도 같은 한태숙 연출가의 제자라는 사실이다. 연극의 본질은 진정성에 있다며 수도승처럼 이를 추구해온 한태숙 연출가는 ‘서안화차’ ‘레이디 맥베스’ ‘오이디푸스’ ‘단테의 신곡’ ‘배장화 배홍련’ 등 주로 심오한 고전의 재해석을 통해 인간성의 심연을 웅숭깊게 응시한 작품들을 발표해왔다. 

    동국대 신문방송학과를 다니던 김정은 2009년 한태숙의 연출부에 들어간다. 놀랍게도 그때까지 한태숙 연극을 한 편도 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경북 안동 출신인 촌놈이 공연에 대해 뭘 알았겠어요. 그저 영화와 광고처럼 촌놈에게도 익숙한 영상매체 쪽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신방과에 들어갔는데 온통 이론적 얘기뿐이라 적성에 안 맞더라고요. 그러다 국립극장에서 객석 안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공연이란 것에 처음 눈을 뜨게 됐죠. 눈요깃거리 풍성한 뮤지컬 같은 공연에 빠져 막연히 공연계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했지만 수줍음이 많아 연극반 문도 못 두드려봤어요. 그러다 한태숙 선생님의 조연출로 있던 선배 누나(오김수희)의 연출 데뷔작(‘맹목’)을 보러 갔다 한 선생님 연출부 합류 제안을 받았어요. 공연 쪽 일을 못 해보면 평생 미련이 생길 것 같아 일단 도전해보고, 아니다 싶으면 냅다 도망치자는 심정으로 뛰어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1년을 보내고 깊은 회의가 엄습했다고 한다. 조연출로 승진해 가까이서 지켜봐도 도저히 자신이 범접할 수 없는 예술장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아는 사람만 아는 모호한 추상성을 지닌 장르’라는 것이 잠정적 결론이었다. 

    그래서 조연출로 두 작품을 끝낸 뒤 잠수를 타고 있을 때 한태숙 연출가가 안부 e메일을 보내왔다. 그는 ‘내 아까운 젊음을 다 바칠 만큼 연극을 잘해낼 자신이 없다’는 장문의 답장을 보냈다. 그때 이런 답장이 돌아왔다고 한다. ‘연극은 네 것을 다 바치지 않을 거면 하면 안 되는 게 맞다. 그렇지만 그런 판단을 하기엔 1년이란 세월은 너무 짧지 않을까.’ 

    다시 조연출로 돌아온 그는 2010년 한태숙 연출가의 대표작 ‘레이디 맥베스’ 10주년 기념공연에 참여했다 연극의 본질에 접신하는 첫 경험을 하게 된다. 

    “선생님의 대표작이라 속으로는 ‘나를 송두리째 연극으로 끌고 들어갈 작품이겠다’는 기대를 품고 참여했는데 솔직히 준비하거나 연습할 때는 잘 모르겠더라고요. 첫 공연이 싱가포르 아트 페스티벌 초청공연이었는데, 극장 끝에서 자막 오퍼레이팅 작업을 하며 무대를 봤어요. 레이디 맥베스 역의 서주희 선배님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 맥베스로 빙의된 순간을 연기하려고 고개를 탁 들었는데, 그 눈빛을 보면서부터는 제가 존재하지 않고 다 놔버린 느낌이 들더라고요. 그 순간 이후로는 연극의 힘이나 연극성에 대해 더는 의심하지 않게 됐습니다.”

    2015년 겨울의 시련

    김정 연출가의 작품들. 왼쪽부터 ‘손님들’과 ‘임영준 햄릿’. [사진 제공 · 프로젝트 내친김에]

    김정 연출가의 작품들. 왼쪽부터 ‘손님들’과 ‘임영준 햄릿’. [사진 제공 · 프로젝트 내친김에]

    김정은 그렇게 한태숙 연출가의 조연출로 6년의 세월을 보내고 2015년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으로 연출가 데뷔를 했다. 스페인 극작가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의 원작을 진정성 넘치는 연극언어로 풀어낸 한태숙 제자다운 작품이었다. 하지만 그해 10월 예술로서 연극에 모든 것을 걸기로 했던 김정의 예술관을 바꾸는 일대 사건이 터진다. 

    당시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의 일환으로 공연장이 아닌 장소에서 깜짝 무료공연 ‘팝업씨어터’가 준비돼 있었다. 그런데 그가 연출한 20분짜리 단막공연 ‘이 아이’가 팝업씨어터에 오르게 돼 있었는데 주최 측인 한국문화예술위원회(예술위) 측의 방해로 무산된 것. 프랑스 극작가 조엘 폼므라의 원작 중 일부를 발췌해 공연하다 ‘캠핑’을 ‘수학여행’으로 바꾸고 한국 청소년이 즐겨 입는 ‘노스페이스’를 삽입해 ‘세월호 사건’을 떠올리게 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 사태는 팝업씨어터 후속 작품에 대한 검열 문제로 비화했고, 박근혜 정부가 행한 예술 탄압의 주요 사례 가운데 하나가 됐다. 

    “그 일로 동료 연극인들과 대학로예술극장 앞 길거리에서 두 달 넘게 피케팅을 했는데, 3년이 지난 지금 예술위에서 관련자에 대한 징계 없이 넘어가려 해 다시 피켓을 들고 나선 만큼 감회가 남다른 게 사실입니다. 예술위는 창작자의 목줄을 쥐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그런 기관을 상대로 저항하고 반항아로 낙인찍힌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죠. 하지만 동시에 ‘내가 이런 것도 얘기 못 한다면 더는 연극을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딱 얻어맞고 나니까 그동안 보이지 않던 게 보이더군요. 주변에 얼마나 많은 연극인이 그것 때문에 고통받고 있었는지, 연극을 한다는 것이 단순히 연극을 좋아하고 향유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만큼 사회적, 정치적 책임을 수반하는 일이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죠. 무엇보다 제 또래 연극인들이 누가 있고, 어떤 고민을 하는지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자꾸 못 할 말이 생기면 그때는 연극을 그만둬야 한다는 각오로 연극을 만드는 계기가 됐습니다.” 

    그렇게 길 위에서 알을 깨고 나오는 김정의 모습을 보면서 고연옥 작가는 ‘길 위의 존재’를 담은 ‘손님들’을 써 그의 손에 안겨줬다. 그 전에 두 번째 연출작이던 ‘광장의 왕’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20세기 초 러시아 시극을 무대화하면서 시로 이뤄진 대사가 관객의 귀에 쉽게 다가설 수 없다는 고민 끝에 마임이스트 고재경 씨를 초빙해 이를 ‘몸의 언어’로 풀기 시작한 것이 ‘김정 연극’의 출발점이 됐다고 했다. 

    “한태숙 선생님으로부터 연극의 진정성을 배웠고, 고연옥 작가로부터 연극적 양심의 실천을 배웠다면 고재경 선생님을 만나면서 연극성의 본질로서 시간, 공간, 인간에 대한 생각을 새롭게 정립하게 됐습니다. 연극은 살아 있는 사람으로서 배우와 살아 있는 사람으로서 관객이 특정한 시간과 특별한 공간에서 만나 벌이는 의미심장한 사건이 돼야 합니다. 따라서 거기엔 예측할 수 없는 긴장감과 신비로움이 깃들어야 한다는 믿음을 굳히게 됐습니다. 저처럼 연극 문외한이던 사람도 새롭고 낯설고 생생한 그 무언가를 느낄 수 있도록 배우, 스태프들과 더불어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게 제가 믿는 연극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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