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양회성 기자]
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 특보(사진)는 동아일보사 부설 화정평화재단·21세기평화연구소(이사장 남시욱)가 5월 24일 개최한 제11회 화정 국가대전략 월례강좌 ‘판문점 선언과 한반도 평화체제’ 주제강연에서 북한 비핵화가 북한 내부에서도 간단치 않다고 진단했다.
그는 또 “평화조약이 체결되고 북한 비핵화가 이뤄져 북·미 간 국교정상화가 가시화된다면 한미동맹과 주한미군 위상 등에 대한 논의가 한미에서 동시에 제기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다음은 문 특보 강연의 주요 내용이다.
지난해 한반도는 전쟁과 평화의 교차로에 서 있었다. 김정은의 핵 야망과 무모한 군사 도발, 도널드 트럼프의 공세적 수사와 군사 행보, 한국 내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를 둘러싼 중국의 강경 기조, 여기에 안보문제를 둘러싼 한국 사회의 양극화까지 겹치면서 상황은 매우 위중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평창동계올림픽을 계기로 새로운 국면을 맞았고, 4월 27일 3차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하고 판문점선언을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6월 12일에는 북·미 정상회담도 있을 예정이다.
판문점선언 이행 구조적 어려움
5월 10일 취임 1주년을 맞은 문재인 대통령은 “평화가 일상이었으면 좋겠다”는 소회를 밝혔다. 그런 평화 상태를 가져오려면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종전선언으로 정전협정을 종료하는 동시에 평화를 제도화할 수 있는 평화협정, 더 나아가 평화체제가 마련돼야 한다.이번 판문점 정상회담을 통해 그러한 가능성이 열렸는가. 먼저 평화의 개념을 보자. 평화는 일반적으로 전쟁의 구조적 원인 자체를 제거하고 항구적 평화를 구축하는 적극적 평화와 분쟁 발발을 억제하고 평화의 가능성을 열어가는 소극적 평화로 구분된다. 평화를 관리하는 데는 세 가지 단계적 접근이 있다. 평화 유지, 평화 만들기와 정착, 평화 구축이 그것이다. ‘평화’ 다음으로는 ‘체제’다. 일부에서는 평화 ‘시스템’이라고 하지만 ‘체제’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 일반적이다. 평화체제는 ‘평화를 유지하고 만들며 구축하는 일련의 원칙, 규범, 규칙, 절차’로 정의할 수 있다.
‘4·27 판문점선언’은 한반도 평화 구축과 관련해 어떤 의미를 가질까. 판문점 정상회담은 여러 면에서 돋보인다. 무엇보다 정상회담이 내거는 목표가 담대하고 파격적이다. 70년 묵은 전쟁을 금년 안에 종식하고 새로운 평화의 역사를 만들겠다는 두 정상의 의기투합은 주목할 만한 발상의 전환이다.
과거 남한은 구체적 합의를 원한 반면, 북한은 원론을 바탕으로 포괄적 합의만 강조했다. 이번 판문점선언은 이 두 시각을 절묘하게 절충했다. 남측은 기능주의와 ‘쉬운 것부터 먼저, 어려운 것은 나중에’라는 원칙에 의거해 경제나 사회·문화 부문의 협력을 주장한 반면, 북한은 정치, 군사 문제가 풀리면 다른 모든 게 풀린다는 ‘톱다운’ 방식의 일괄타결을 고집해왔다. ‘완전한 비핵화’를 명문화한 것도 획기적이다. 과거 북한은 핵은 오로지 미국과 북한 간 문제이기 때문에 남측이 낄 여지가 없다고 일관되게 주장해왔다. 양국 정상이 이번 합의 사항들을 성실히 이행해가기로 약속한 점에서 이전보다 훨씬 강력한 구속력을 가질 것으로 보인다. 이번 판문점선언은 ‘선언’이라는 합의 유형을 띠고 있으나 지향점은 종전선언, 평화조약, 평화체제를 총괄한다. 그러나 선언의 이행이 북한 비핵화 여부에 달렸다는 점에서 구조적 한계가 있다.
특히 김정은이 핵 시설 및 물질, 핵탄두를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완전한 방식으로 폐기할 의향이 진짜 있는가 하는 점이다. 회의론자들은 그가 ‘행동 대 행동’ 원칙을 기반으로 해 점진적이고 동시적인 교환 방식을 강조하면서 과거 같은 ‘살라미 전술’을 취할 수도 있다고 우려한다. 이는 북한 내부의 불확실성 때문이다. 김정은이 군부를 통제하고 있다고 해도 ‘완전한 비핵화’라는 합의 이행을 군부가 순순히 수용하기 어려울 수 있다. 따라서 북한이 과거처럼 비핵화 초기 단계에서 실리만 챙기고 다시 협상을 파국으로 몰아갈 수 있다는 우려가 대두된다.
한미는 북한의 살라미 전술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북한이 그런 전술을 추구한다면 이번 합의 전체가 위험에 빠지고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과거 패턴을 피하기 어렵다. 이는 군사 행동과 전쟁 가능성을 키우면서 또 다른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
이제 공은 미국으로 넘어갔다. 6월 12일 열릴 예정인 북·미 정상회담에서 트럼프는 김정은과 비핵화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협의할 것이다. 미국의 포괄적 원샷 딜과 북한의 점진적이고 동시적인 접근 사이에 절충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남북연합이 평화를 이루는 길
[동아일보 양회성 기자]
이번 판문점선언은 한반도 평화체제로 가는 구체적 경로를 보여주고 있다. 먼저 북한의 비핵화를 가장 중요한 목표로 설정하고 이를 종전선언, 평화조약과 연동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과거 북한 비핵화를 일방적으로 주장하던 것과 달리 이를 종전선언, 평화체제와 연결하고 있는 것이다.
올해 안에 종전선언을 완결하겠다는 합의도 주목할 만하다. 사실 정전협정이 사실상 사문화돼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종전선언을 통한 정전협정 종료는 당연한 수순이다. 정부가 3자 또는 4자의 의미를 분명히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개인적 생각으로는 정전협정의 법적 당사자인 북한, 미국, 중국과 실질적 당사자인 한국의 정상이 유엔총회 같은 자리에 모여 종전선언을 하면 될 것이라고 본다. 남북정상이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미국과 중국이 이를 담보해주는 캠프 데이비드 식 방식도 고려해볼 만하다. 하지만 이 역시 북한 비핵화 없이는 불가능하다.
기존 불가침합의를 재확인하고 군사적 긴장 완화와 신뢰 구축, 단계적 군축을 명시화한 것도 성과다. 특히 비무장지대를 평화지대로 만들고 북방한계선(NLL) 수역을 평화수역으로 전환하겠다는 것은 한반도 평화를 위해 바람직한 현상이다. 남북한 군사적 긴장 완화와 신뢰 구축 조치는 비핵화 여부와 무관하게 진전을 봐야 할 것이다.
이번 판문점선언은 한반도 평화체제를 완성한 것이 아니라 항구적 평화로 가는 긴 여정의 서막이다. 한 가지 분명히 하고 싶은 것은 형식 논리에 매달리지 말고 쉬운 데서 길을 찾아야 한다는 점이다. 서로 신뢰를 쌓고 평화를 ‘과정’으로 인식해 꾸준히 노력할 때 진정한 ‘평화 만들기’가 가능해진다. 남북 간 교류·협력이 활성화되고 긴장 완화 및 평화 공존이 이뤄져 사람과 물자가 자유롭게 오갈 때 비로소 진정한 평화가 가능하리라 본다.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를 이루는 길은 바로 남북연합이라는 이야기다.
천신만고 끝에 찾아온 ‘한반도 평화의 봄’의 역사적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다 함께 핵무기 없는 평화롭고 풍요로운 한반도를 만드는 데 동참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