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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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최초로 불 피운 시기, 40만 년 전으로 앞당겨졌다

[이종림의 사이언스 랩] 영국 바넘 유적서 확인… 기존 프랑스 네안데르탈인보다 35만 년 당겨져

  • 이종림 과학전문기자

    입력2025-12-24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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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 연구진이 최근 학술지 ‘네이처’를 통해 40만 년 전 인류가 의도적으로 불을 피운 흔적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사진은 영국 바넘 유적. 뉴시스

    영국 연구진이 최근 학술지 ‘네이처’를 통해 40만 년 전 인류가 의도적으로 불을 피운 흔적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사진은 영국 바넘 유적. 뉴시스

    인류는 언제부터 불을 ‘만들어’ 쓸 수 있었을까. 그리스 신화의 프로메테우스는 신에게서 불을 훔쳐 인간에게 전해줬다. 다른 문화권에서도 불은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우연히 얻어 간신히 지켜낸 대상으로 그려진다. 그만큼 불을 만들어내는 능력은 특별하게 여겨졌다. 

    그런데 그 능력을 인류가 생각보다 훨씬 일찍 가지게 됐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최근 학술지 ‘네이처’에 발표된 논문에 따르면 약 40만 년 전 유적에서 인류가 도구를 사용해 불을 만들어 쓴 물증이 확인됐다. 기존에 알려진 가장 오래된 증거보다 약 35만 년 앞당겨진 것이다.

    퇴적층에 남은 불을 ‘만든’ 증거 

    인류가 화재로 생겨난 불을 이용한 시기는 약 100만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케냐 쿠비 포라, 남아프리카공화국 원더워크 동굴, 이스라엘 게셰르 베노트 야아코브 유적 등에서 그을린 뼈와 토양, 탄화 흔적이 확인됐다. 다만 이 불을 인간이 직접 피운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학계에서는 이런 사례들을 ‘불의 이용(use of fire)’으로 분류한다. 이번 연구 전까지 인간이 도구를 사용해 의도적으로 불을 만들어낸 비교적 확실한 증거는 약 5만 년 전 프랑스 북부 네안데르탈인 유적에서 나왔다.

    그 시점을 약 40만 년 전으로 앞당긴 이번 연구의 무대는 영국 잉글랜드 동부 바넘이다. 대영박물관이 이끄는 국제 연구팀이 이 지역 유적을 정밀 분석한 결과 불 관련 흔적이 다수 확인됐다. 열을 받아 구조가 변한 점토, 고온 충격으로 갈라진 석기 등이 같은 시기 퇴적층에서 함께 발견됐다. 결정적인 것은 황철석이다. 이 광물은 부싯돌과 부딪치면 불꽃이 튀는 성질이 있어 선사시대에 주로 점화 도구로 쓰였다. 그러나 바넘 일대에서는 황철석이 자연적으로 거의 나오지 않는다. 연구진이 주변 26개 유적에서 돌 약 12만 개를 조사했지만, 황철석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런 광물이 화덕 바로 옆에서 발견됐다는 것은 누군가 일부러 가져왔다는 뜻이다. 연구진은 이것이 40만 년 전 인류가 불 피우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는 가장 직접적인 증거라고 본다.

    그렇다면 바넘에서 불을 피운 이는 누구였을까. 호모사피엔스가 처음 등장한 것은 약 30만 년 전이며, 아프리카를 떠나 유라시아로 확산된 것은 약 10만 년 전으로 알려져 있다. 이 점을 고려하면 약 40만 년 전 영국 바넘 유적의 주인공은 호모사피엔스가 아니라 네안데르탈인 계열 인류였을 개연성이 크다. 네안데르탈인은 호모사피엔스에 가장 가까운 멸종 인류로, 약 40만~4만 년 전 유럽과 서아시아에 살았다.



    연구진은 네안데르탈인보다 앞선 고인류인 호모하이델베르겐시스(Homo heidelbergensis)일 개연성도 함께 제시한다. 이 종은 이후 유럽에서는 네안데르탈인으로, 아프리카에서는 호모사피엔스로 진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영국 바넘 유적의 약 40만 년 전 화덕 주변에서 출토한 열에 변형된 부싯돌 손도끼(a)와 황철석 조각(b·c). 네이처 제공

    영국 바넘 유적의 약 40만 년 전 화덕 주변에서 출토한 열에 변형된 부싯돌 손도끼(a)와 황철석 조각(b·c). 네이처 제공

    불의 발견이 인류 뇌 용량 키워 

    연구진은 이번 연구를 통해 인류가 불을 통제하게 된 것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고 강조한다. 불은 포식자를 막고 인간에게 빛과 열을 제공했을 뿐 아니라, 농업과 금속 제련 등 기술 발전 토대를 마련하는 데도 기여했다. 또한 불을 피울 수 있는 능력은 생물학적 진화는 물론, 언어 같은 사회적 진화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본다. 초기 인류가 추운 지역으로 서식지를 넓힐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불 사용 능력 덕분이라는 게 과학자들 설명이다.

    약 40만 년 전 일부 고인류 종은 뇌 크기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불이 이러한 변화에 기여했을 개연성이 있다. 뇌 중량은 사람 무게의 2%에 불과하지만 전체 에너지 중 약 20%를 소비한다. 음식을 익혀 먹으면 소화가 쉽고 영양 흡수 효율도 높아지기에 불로 조리한 음식이 뇌 성장에 필요한 에너지를 제공했을 공산이 크다.

    물론 이번 발견이 학계에서 완전한 합의를 이룬 것은 아니다. 일부 학자는 황철석이 점화 도구로 쓰인 사실을 보여주는 직접적인 흔적이 부족하다며 이를 ‘정황 증거’에 가깝다고 봤다. 불 피우는 기술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는 과정을 반복했을 것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그럼에도 이번 발견의 의미는 크다. 네안데르탈인은 한때 호모사피엔스에 비해 원시적인 종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최근 연구들은 그 인식을 뒤집고 있다. 2018년 스페인 라파시에가 동굴을 비롯한 3곳에서 발견된 벽화는 약 6만5000년 전에 그려진 것으로 확인됐는데, 이 시기는 호모사피엔스가 유럽에 도착하기 약 2만 년 전이다. 당시 네안데르탈인이 추상적 사고와 상징 표현 능력을 갖추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안료로 몸을 장식하고, 조개껍데기로 장신구를 만들며, 죽은 사람을 특정 방식으로 매장한 흔적도 발견된다. 불을 직접 만들어 썼다는 이번 발견은 네안데르탈인의 인지 능력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증거다.

    이번 연구의 공동 저자인 대영박물관 고고학자 크리스 애슈턴 박사는 “약 40만 년 전 인류가 부싯돌과 황철석, 불쏘시개 성질을 이해하고 이를 조합해 불을 만들어냈다는 점은 상당한 수준의 기술적 지식과 계획 능력을 갖추고 있었음을 시사한다”며 “이는 초기 인류의 행동적·인지적 능력을 다시 평가하게 만드는 중요한 발견”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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