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85

2011.05.02

열정의 페이스북 소셜 웹 미래를 열다

마크 주커버그

  • 정지훈 관동대 명지병원 IT융합연구소 교수 @niconcep

    입력2011-05-02 13: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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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임’지는 페이스북을 창업한 마크 주커버그를 2010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선정했다. 27세에 불과한 이 청년은 ‘포브스’에서 선정한 400명의 갑부에도 이름을 올리며 세계 최연소 억만장자로 인정받았다. 6년 전 팔로알토에 나타났을 때만 해도 그는 집은 물론 차도, 직장도 없는 가난한 청년에 불과했다.

    그는 컴퓨터에 미쳐 독학으로 프로그래밍을 배웠다. 훗날 페이스북에서 최고경영기술자(CTO)로 일하게 되는 애덤 단젤로(Adam D’Angelo)와 함께 윈앰프(Winamp)의 ‘플러그인’을 제작하면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그들이 만든 플러그인을 보고, AOL과 마이크로소프트사에서 일자리를 제안했지만 그는 과감히 대학에 진학했다.

    하버드대에 들어간 주커버그는 페이스북의 전신이 된 인맥 사이트를 만들면서 일약 기숙사의 스타가 됐다. 하버드대는 다른 학교와 달리 학생의 기본 정보와 사진이 들어 있는 디렉토리(이를 보통 페이스북이라고 한다)를 제공하지 않았다. 이에 주커버그는 대학 측에 페이스북을 만들겠다고 말했지만, 대학 측에선 사생활 정보를 모으는 것을 반대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대담하게도 하버드대의 전산시스템을 해킹해 학생들의 기록을 빼냈다. 이를 바탕으로 페이스매시(Facemash)라는 간단한 사이트를 제작, 학부생의 사진을 쌍으로 올리면서 어느 쪽이 더 마음에 드는지를 고르게 했다. 4시간 만에 450명이 이 사이트를 방문했고, 사진이 2만2000번이나 사람들에게 노출됐다. 하버드대는 뒤늦게 사태를 파악하고, 주커버그의 인터넷 접속을 차단했다.

    그는 학교당국과 동료 학생들에게 정중히 사과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자신이 잘못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고 믿었다. 특히 하버드대 측의 학생 정보 비공개 정책을 어떤 방식으로든 깨고 싶었다. 그의 정보 공개에 대한 열정과 해커 정신이 녹아든 작품이 바로 페이스북이다. 페이스북은 2004년 2월 공식 오픈한 뒤, 하버드대의 인맥을 중심으로 그 세를 급속히 넓혔다. 1년 뒤 실리콘밸리에 입성하고 거침없는 성장을 이어갔다.



    2007년 말 테크크런치(TechCrunch)는 야후가 페이스북을 평가한 자료를 공개했다. 자료에 따르면, 야후는 페이스북이 2010년 매출 9억7000만 달러를 달성하고 4800만 명의 사용자를 가질 것으로 예상했다(실제 매출 규모는 비슷했지만, 사용자 수는 10배 이상이었다. 현재 페이스북 회원은 전 세계 6억 명이 넘는다). 이를 바탕으로 야후는 페이스북을 10억 달러에 매수하겠다고 제안 했다.

    이렇게 엄청난 제안을 주커버그는 일언지하 거절했다. 물론 현재 페이스북의 모습을 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의 결정은 비즈니스 관점에서 쉽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자신만이 추구하는 남다른 비전이 있었기에 그런 엄청난 제안을 거절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열정의 페이스북 소셜 웹 미래를 열다
    그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뛰어난 인재를 데려오는 데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런 열정이 있기에 많은 인재가 페이스북으로 몰려드는 것이다. 페이스북이 세계 최대의 소셜 웹서비스 회사로 성장하고, 현재보다 미래가 더 기대되는 이유는 바로 주커버그 같은 젊은 혁신가가 있기 때문이다.

    * 정지훈 교수는 의사이면서 IT 전문가라는 이색 경력을 지니고 있다. 현재 관동대 의과대 명지병원 융합의학과 교수이자 IT융합연구소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거의 모든 IT의 역사’ 저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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