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73

2013.01.28

자신의 자궁 믿고 더 큰 세상으로 돌진

가믄장아기

  • 정여울 문학평론가 suburbs@daum.net

    입력2013-01-28 11: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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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의 자궁 믿고 더 큰 세상으로 돌진
    아이들에게 ‘최고 환경’을 제공하는 것은 과연 최상의 교육방법일까. 교육환경 문제는 늘 논란거리이지만, 지금처럼 육아 부담이 극도의 스트레스가 된 사회에서는 더 첨예한 이슈가 된다. 사교육에 아낌없이 투자하는 부모나, 대안학교를 고민하며 인성교육을 중시하는 부모나 공통된 합의점이 있다. 바로 ‘아이가 행복하면 된다’는 것이다. 바로 그 행복 기준이 문제다. 끊임없이 기쁨만 제공하는 교육이 좋은 것일까. 제주 신화 ‘가믄장아기’는 아이들에게 ‘좋은 것, 예쁜 것, 대단한 것’만 제공하는 것이 최고의 교육방법은 아님을 흥미롭게 보여준다.

    윗마을 사내 거지 강이영성과 아랫마을 여자 거지 홍은소천은 사랑에 빠졌고, 이후 얻어먹기를 그만두고 품팔이에 나서며 살림을 합친다. 첫딸이 태어나자 거지 생활을 접고 열심히 살려고 애쓰는 이 부부에게 동네 사람들이 감동해 육아를 돕기 시작한다. 정성을 다해 ‘은그릇’에 죽을 쑤어다 먹여 키웠다 해서 첫딸 이름은 ‘은장아기’다. 둘째 딸이 태어나자 이번에도 동네 사람들이 돕긴 했지만, 처음만큼 성의를 보이진 않는다. 이번엔 ‘놋그릇’에 음식을 담아줬다고 해서 둘째 딸 이름은 ‘놋장아기’다. 이윽고 셋째 딸이 태어나자 동네 사람들의 관심은 시들해져 ‘나무바가지’에 밥을 담아줘 키웠는데, 이 셋째 딸 이름이 ‘가믄장아기’다. 그런데 가믄장아기가 태어난 후 신기하게도 거지 부부에게 전답이 생기고 마소가 우글대며, 고래 등 같은 기와집에 풍경을 달고 살았다. 이후 부부는 품팔이하던 시절의 고생 따윈 생각지 않는 오만한 사람이 돼버리고 만다.

    거지 부부의 셋째 딸

    어느 날 부부는 딸들을 차례대로 불러 시험했다. “너는 누구 덕에 먹고 입고 행우발신(行爲發身)하느냐?” 첫딸이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하늘님도 덕이외다. 지애(地下)님도 덕이외다. 아바님도 덕이외다. 어머님도 덕이외다.” 첫딸의 대답에 흡족해진 부부는 둘째 딸에게도 같은 질문을 하고 같은 대답을 듣는다. 그들은 ‘너희가 잘 먹고 잘 사는 덕은 바로 부모 덕’이라 가르치고 싶었던 것이다. 이어 셋째 딸 가믄장아기를 부른다. 그러자 그녀 입에서 놀라운 대답이 술술 흘러나온다. “내 배또롱(배꼽) 아래 선그믓(배꼽에서부터 음부 쪽으로 내리그어진 선) 덕으로 먹고 입고 행우발신합니다.” 풀이하자면, 내가 잘 먹고 잘 사는 이유는 내 자궁 덕분이라는 것. 그러니 내 행복은 내가 만들어간다는 것이었다. 부모 덕을 칭송할 줄 알았던 부부는 노발대발하며 셋째 딸을 쫓아내버린다. 가믄장아기는 검은 암소 한 마리와 옷 보따리만 챙겨 집을 나온다.

    그날 이후 뒤늦게 후회한 부모는 가믄장아기를 걱정하다 결국 눈이 멀고, 그 많던 재산을 다 날린 채 다시 거지가 된다. 가믄장아기는 정처 없이 떠돌다 아들 셋을 키우는 노부부 집에 묵는다. 3형제가 마를 캐서 그것으로 연명하는 집이었다. 첫째와 둘째는 가믄장아기와 검은 암소를 본 순간 영 반갑지 않은 기색이었다. 어려운 살림에 객식구가 하나 더 늘었다며 투덜댔다. 그런데 셋째의 태도는 사뭇 달랐다. “하, 이거 우리 집에 난데없이 검은 암소여, 사람이여 모두 들어와 어느 하늘에서 돕는 일이나 아닌가?” 셋째는 낯선 사람을 조건 없이 환대하는 법을 아는 남자였다. 어느새 가믄장아기는 세 사람의 됨됨이를 저울질하며 그들의 행동거지를 유심히 살피기 시작한다. 첫째와 둘째 아들은 마를 캐내 가장 맛있는 부분은 자기네가 홀랑 먹고, 꼬리 부분만 끊어 부모에게 넘겨준다. 셋째 아들은 마를 삶아 가장 맛있는 부분을 부모에게 드리면서도 이보다 더 잘해드리지 못해 미안해하기까지 한다. “설운 어머님, 아바님. 우리 낳아서 키우려고 한 것이 얼매나 공이 들고, 이제 살면 몇 해나 더 사시겠습니까?” 가믄장아기는 ‘쓸 만한 사람은 작은 마퉁이(마를 캐서 살아가는 사람)밖에 없구나’ 생각하고, 그를 신랑감으로 점찍는다.



    가믄장아기는 손님이면서도 마치 주인인 양 집안 분위기를 주도하기 시작한다. 늘 마죽만 먹던 이 집안에서 자신이 직접 지은 쌀밥으로 한상 차려 세 남자의 ‘먹는 모습’을 보기로 한 것이다. 첫째와 둘째 아들은 “조상대에도 아니 먹었던 이런 벌레 밥 아니 먹겠다”며 가믄장아기의 정성 가득한 상차림을 거부한다. 셋째 아들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쌀밥을 푹푹 떠서 맛있게 떠먹음으로써 가믄장아기를 기쁘게 한다.

    이제 가믄장아기는 더 놀라운 도전을 시도한다. 혼자 자는 것이 못내 섭섭하던 그녀는 “나하고 누울 아들이나 하나 보내십사”라고 노부부에게 부탁한 것이다. 노부부는 당연히 첫째 아들부터 등 떼밀었지만 첫째와 둘째 아들은 그것을 거부했고, 셋째 아들은 뛸 듯이 기뻐하면서 가믄장아기와 “꽃을 본 나비처럼” 열정적인 하룻밤을 보낸다. 가믄장아기가 그를 목욕시키고, 새 옷을 갈아입혀 갓과 망건을 씌워 놓으니 절세미남이 따로 없다.

    자신의 자궁 믿고 더 큰 세상으로 돌진
    현대인보다 더 창조적

    이튿날 아침 몰라보게 말쑥해진 셋째 모습을 보고 나서야 첫째와 둘째는 후회막급이었지만, 이미 게임은 끝났다. 두 사람은 암소 한 마리를 밑천 삼아 열심히 농사지어 큰 부자가 됐고, 살림이 좋아지면서 부모 생각이 간절해지자 ‘거지 대잔치’를 벌인다. 자기를 버린 부모가 맹인 거지가 됐음을 가믄장아기는 직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부부는 딸이 연 잔치에서 딸과 상봉하고 눈물로 죄를 뉘우치며 행복한 결말을 맞는다.

    서양 동화가 대부분 금지옥엽으로 키운 공주의 배필을 찾으려고 ‘임금님’이 나서 각종 어려운 시험을 치르는 것과 달리, 가믄장아기는 스스로 시험 기준을 마련하고 남편감을 적극적으로 골랐을 뿐 아니라, 노부부의 아들 가운데 한 명과 자고 싶다는 의사까지 분명히 표현한다. 고전소설을 읽다 보면 현대 여성보다 훨씬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옛 여성 모습에 감동받곤 한다. 가믄장아기는 그녀 말대로 ‘자신의 자궁’으로 자기 운명을 스스로 바꾼 것이다. 여기서 ‘자궁’은 수많은 상징을 내포한다. 그것은 육체적 여성성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여성이 창조할 수 있는 모든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이기도 하다.

    가믄장아기는 암소 한 마리와 함께 정처 없이 길을 떠나 결국 자기 힘으로 반려자를 골라냈고, 마침내 자신을 버린 부모마저 품는다. 현대 사회의 부모는 ‘자식이 나보다 더 나은 환경에서, 나보다 더 나은 인간’이 되는 것을 교육목표로 삼는다. 그러는 동안 아이 스스로 고뇌하고 진통하는 능력은 점점 퇴화돼간다. 위험 부담을 줄여주는 것만이 최고 환경은 아니다. 자기 힘을 일찍 깨닫고 더 큰 세상을 향해 돌진하는 가믄장아기의 적극성은 고통 앞에서도 부모 뒤에 숨지 않는 그녀만의 용기에서 우러나왔다. 고뇌하고 진통하는 능력은 시대에 뒤처진 것이 아니다. 더 많이 아파할 줄 아는 사람, 아픔에서 매번 뭔가를 배우려는 사람만이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르는 미래조차 두 팔 벌려 환영할 수 있는 최고 인재가 아닐까.

    그림 제공·봄봄출판사 ‘가믄장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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