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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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지 않은 청춘이 어디 있으랴

트란 안 훙 감독의 ‘상실의 시대’

  • 정지욱 영화평론가, 한일문화연구소 학예연구관 nadesiko@unitel.co.kr

    입력2011-05-02 11: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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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프지 않은 청춘이 어디 있으랴
    1970년대 이후 젊은 시절을 보낸 도시인이라면 누구나 ‘하루키 병’을 앓지 않았을까. 젊은 시절 한 번쯤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읽었고 그가 내보이는 청춘의 자화상에 자신이 겪은 젊음의 열병을 투영시키며 아파하고 스스로를 대견스레 돌아보며 성장했을 것이다.

    하루키가 1987년 발표한 장편소설 ‘상실의 시대’(원제-노르웨이의 숲)는 전 세계 36개국에서 번역돼 1100만 부가 팔린 베스트셀러로, 2009년에는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일본소설에 선정되기도 했다. 이 소설이 트란 안 훙 감독의 손에서 영화화돼 우리 곁을 찾아왔다.

    1967년 열일곱 살 고등학생인 주인공 나, 와타나베(마츠야마 켄이치 분). 와타나베는 유일한 친구인 기즈키와 그의 연인 나오코(키쿠치 린코 분)와 어울려 다닌다. 어느 날 기즈키는 차고에서 자동차 배기가스로 자살하고, 와타나베는 삶이 공허해지자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고자 한다.

    안보투쟁이 한창이던 1969년 도쿄, 대학생이 된 와타나베는 마치 일시 정지된 화면처럼, 읽고 있던 책의 여백처럼 텅 빈 생활을 한다. 레코드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밤새 독서하다 늦잠을 자고, 이따금 수영을 하는 그는 기숙사에서 함께 지내는 나가사와 선배의 자유분방함과 세련되면서도 속물적인 근성을 부러워한다.

    어느 날 와타나베는 홀연히 다시 나타난 나오코와 숲 속을 걷게 된다. 이후 매주 일요일에 함께 산책하며 나오코와 서서히 가까워진 그는 나오코의 스무 번째 생일을 축하해준다. 창밖엔 비가 내리는데, 울먹이는 나오코의 이야기를 듣노라면 와타나베는 물론 모든 관객은 가슴이 먹먹해져 복받쳐 오르는 설움에 눈물 흘리게 된다. 이토록 아픈 사랑을 대체 누가 거절할 수 있을까.



    서투른 사랑을 나눈 뒤 와타나베처럼 미성숙한 남자들은 멍청한 질문을 던지고 이내 후회하지만 소용없다. 결국 나오코는 떠나고 와타나베는 한참이 지나서야 그가 요양원에 있다는 편지를 받는다. 여름이 지나면서 생기발랄하고 도발적인 미도리(미즈하라 키코 분)가 새롭게 와타나베의 삶에 잦아든다. 두 여자 사이에서 그는 조금씩 흔들린다.

    와타나베가 그들과 함께 할 때마다 등장하는 햇빛에 반짝이는 싱그러운 초록과 바람, 그리고 이곳저곳에서 흘러나오는 조니 그린우드의 감미로운 기타 연주는 트란 안 훙 감독의 전작 ‘씨클로’를 떠올리게 한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인물들이 갈등을 겪을 때 초록이 사라지고 감정의 충돌이 극에 치달을 때 눈이 내린다. 눈 내린 산야는 깊고 음울한 배경 음악처럼 감정의 깊은 골, 끝도 없이 나락으로 추락하는 젊음의 생채기를 표현한다. 하지만 흰 눈은 새살의 돋움과 새로운 기다림을 예견하기도 한다.

    영화 속 백미 중 하나는 비틀즈의 음악이다. 요양원에서 와타나베와 나오코 곁에서 레이코 여사가 ‘노르웨이의 숲’을 어쿠스틱 기타로 연주하는 장면은 이들이 서로의 상처를 이해하고 보듬어준다는 것을 표현한다. 엔딩 크리딧과 함께 흐르는 비틀즈의 원곡은 어느 순간 성장해버린 젊은 시절 내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영화는 원작 소설과 달리 중년이 된 와나타베가 회상하는 장면을 과감히 덜어냈다. 또한 다른 등장인물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주인공 나, 와타나베의 시선만을 고집했다. 모든 것을 제외한 ‘나만의 시선’이 가장 ‘보편적 시선’이라는 사실을 영화를 통해 들려주고 싶었던 것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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