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34

2014.04.21

생각이 술술 글자로 그림으로 ‘흑심’발동했네

연필 탐닉

  • 김용섭 날카로운상상력연구소장 trendhitchhiking@gmail.com

    입력2014-04-21 10:36: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우리가 태어나 가장 먼저 잡는 필기구는 뭘까. 대부분 연필 아니었을까. 연필로 뭔가를 쓰고 지우개로 지우기도 하며 글씨와 그림을 배운다. 그러다 나이가 들면서 연필을 버리고 볼펜으로 넘어간다. 그래도 그림을 그리거나 디자인, 건축 분야에서 일하는 이에게 연필은 결코 버릴 수 없는 도구다. 글을 쓰는 작가에게도 그렇고, 학자 중에도 연필 애호가가 많다.

    어느 집에든 굴러다니는 연필 몇 자루씩은 다 있다. 흔하고 싸고, 그래서 귀한 줄 모르는 게 연필이기도 하다. 누구나 써본, 그리고 누구나 가지고 있는, 그렇지만 결코 사치라고 여겨본 적 없는 대상이 바로 연필일 것이다.

    나는 연필 마니아다. 연필 수집도 하고, 평소에 연필로 필기도 많이 한다. 책상 위 연필꽂이마다 연필이 100자루 이상 빼곡히 꽂혀 있다. 평생 써도 다 못 쓸 텐데, 보관 중인 연필을 꺼내면 훨씬 더 많다. 그럼에도 여전히 어딜 가나 연필을 산다. 세계 유명 미술관이나 도서관, 전시관, 기념관 등에서 사온 연필부터 쓰는 용도에 따라 다양한 강도와 굵기를 가진 연필, 특이하게 생기거나 독특한 이야기가 담긴 것 등을 주로 선택한다.

    연필에 대한 나의 탐닉을 아는 지인도 연필 선물을 자주 한다. 그래서 연필만큼은 부자다. 연필 친구인 연필깎이도 좋아한다. 특히 기차모양 ‘샤파’라는 게 있다. 어릴 적 기억을 더듬으면 다들 이런 연필깎이 하나쯤 가져봤을 텐데, 나는 여전히 그 녀석을 가까이 두고 며칠에 한 번씩 연필을 깎는다. 연필이 깎이는 소리도, 깎인 연필이 보여주는 날카로움도 매력적인 순간이다.

    다양한 연필 그리고 연필깎이



    미국 뉴욕의 만화가이자 연필 깎기 장인이라 부르는 데이비드 리스가 쓴 ‘연필 깎기의 정석’이란 책도 좋아한다. 부제는 ‘장인의 혼이 담긴 연필 깎기의 이론과 실제’다. 연필을 깎는 다양한 방법과 철학이 담겼다. 연필 깎는 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책 한 권 분량으로 쓸 이야기가 있을까 싶겠지만 꽤 쉽고 유쾌하게 읽을 수 있다. 저자도 나처럼 연필 애호가인데, 그는 연필을 통해 심도 깊은 철학까지 담아냈다.

    냉정히 얘기하면 ‘정말 쓸데없는 짓 한다’고 할 수도 있다. 그냥 연필만 깎으면 되지 싶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사소한 일에 혼을 담는 건 대단한 일이다. 큰 것보다 작은 것에 더 흥미로운 인생 즐거움이 녹아 있는 것도 작은 사치와 맥락이 닿는다.

    필요하지 않을 물건, 이미 충분히 많이 갖고 있어 더 없어도 되는 물건, 어디에 쓸 것인지 고민해보지 않은 물건 등 필요하지 않은 것에 관심을 두는 일도 사치다. 내게 연필은 이 중 두 번째에 해당한다. 대부분 이런 것이 하나씩은 있을 것이다. 이미 충분히 가졌는데도 계속 탐하는 것, 대개 수집이나 탐닉이란 이름으로 부르는 것 말이다. 당신에게 필요 없어도 갖고 싶은 물건에 어떤 것이 있을까. 그것이 무엇이든, 그 물건은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설명하는 좋은 단서가 될 것이다.

    연필 수집은 참 경제적이다. 비싸지 않고 공간도 많이 차지하지 않는다. 그래서 내 연필 수집은 아내도 좋아한다. 그는 외국으로 출장을 갈 때면 나를 위해 연필 한두 자루씩을 사온다. 어떤 때는 호텔 연필을 공짜로 가져다줄 때도 있다. 돈이 안 들거나, 들어도 몇 달러 안 하는 게 연필이다. 하지만 나는 늘 연필 선물에 만족한다. 그러니 이렇게 경제적인 선물이 없다.

    생각이 술술 글자로 그림으로 ‘흑심’발동했네
    물론 싼 것만 있는 건 아니다. 연필 회사 중 가장 유명하고 오래되기도 한 그라프 폰 파버카스텔에서 만든 ‘퍼펙트 펜슬(Perfect Pencil)’은 한 자루에 50만 원 정도 한다. 화려하게 디자인한 리필 가능한 지우개가 탈부착되고, 연필 촉 부분과 지우개 부분을 보호하는 백금 도금 캡까지 각각 있어 연필에서 추구할 사치가 다 담겼다고 할 수 있다. 장식도구를 다 뺀 나무로만 된 연필은 리필 가능한데, 이것도 1만5000원쯤 한다.

    이런 연필을 쓴다고 대단한 그림이 막 그려진다거나, 생각이 술술 글로 만들어지는 건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연필 하나 가졌다는 뿌듯함이 아니라, 흔하지 않은 특별한 연필을 하나 가졌다는 만족감이 생길 거다. 남에게 보여주려고 이 연필을 샀다면 과시적 사치겠지만, 자신을 위해 샀다면 이는 자기위안적 사치, 즉 작은 사치다.

    나는 새롭거나 중요한 일의 시작은 꼭 손으로 한다. 컨설팅이건 강연이건 각종 비즈니스 프로젝트건 집필이건, 모든 시작은 연필로 백지 위에 쓰고 그리는 것부터다. 우리 생각은 글자와 그림으로 막 쏟아져 나오는데 그걸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옮겨내는 것이 손이다. 연필을 잡고 있으면 머리가 더 잘 굴러가는 듯한 느낌도 든다. 손과 뇌가 맞닿아 있다는 이야기도 연필을 잡고 있으면 더 그럴싸하게 들린다.

    연필에 대한 탐닉은 곧 필기류에 대한 탐닉으로 이어진다. 대표적인 게 만년필이다. 연필이 순수한 품격을 가졌다면, 만년필에는 우아함과 멋스러움이 있다. 유리로 된 잉크병에 만년필 촉을 담그고 잉크를 넣던 기억도 있지만, 요즘엔 간단하게 카트리지를 넣어 쓰기도 한다. 아날로그는 기억 속에만 머물고 점점 디지털이 세상을 지배하지만 여전히 만년필은 잘 팔린다.

    내 몸은 아날로그 손맛 기억

    대표적인 만년필 브랜드인 몽블랑은 매년 성장세를 지속하고 있다. 여전히 만년필은 세상을 바꾼 역사적 순간이나 엄청난 기회를 만들어낸 계약에서 화룡점정을 찍는다. 요즘 만년필은 중년 남성의 애장품에만 머물지 않는다. 2030세대, 특히 젊은 여성 사이에서 만년필에 대한 사랑이 뜨겁다. 대표적인 게 라미라는 브랜드의 캐주얼한 만년필이다.

    아날로그 세대에겐 만년필이 과거 추억이자 향수라면, 디지털 세대에겐 만년필이 아날로그적 감성을 받아들일 새로움이다. 연필이나 만년필이나 손끝을 자극하는 매력이 있다. 지금 이 순간 연필이든 만년필이든, 필기를 통해 오랜만에 추억 속 손맛을 되살려보면 어떨까. 아직 우리 몸은 아날로그 손맛을 기억하고 있으니까.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