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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천안함 사건은 인재(人災) 또 벌어지면 소송하겠다”

천안함 사건 3주기, 46용사 유족들 마르지 않은 눈물과 회한

  • 조성식 기자 mairso2@donga.com

“천안함 사건은 인재(人災) 또 벌어지면 소송하겠다”

“천안함 사건은 인재(人災) 또 벌어지면 소송하겠다”

기자와 인터뷰하는 이연화 천안함 46용사 유족협의회 총무.



“겪지 않은 사람은 몰라요, 자식 묘 앞에서 잡초 뽑는 심정이 어떤지. 정말 죽어요, 죽어.”

이연화(51) 씨의 눈이 젖어들었다. 단단하게 응축된 슬픔의 둑에 금이 간다. 예리한 면도날 같은 감정의 편린이 기자의 살갗을 파고든다. 생때같은 자식을 바다에 묻고 짐승처럼 울부짖었던 순간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3년이 지났다.

천안함 사건 3주기 추모행사는 3박4일 동안 진행됐다. 첫 행사는 3월 26일 국립대전현충원(현충원)에서 열린 추모식. 유족은 전날 대전에 미리 모여 하룻밤을 묵었다. 행사는 아침 8시 박근혜 대통령을 만나는 것으로 시작됐다. 여성 대통령 시대라고, 아버지들이 나섰던 1주기, 2주기 때와 달리 어머니들이 각 유족 대표로 대통령과 면담했다. ‘천안함 46용사 유족협의회’(유족협의회) 총무인 이씨도 그중 한 명이었다.

현충원 행사가 끝난 뒤 유족은 경기 평택에 있는 해군 2함대사령부로 이동했다. 천안함에서 참배하고 서해수호관을 둘러본 후 인천으로 향했다. 연안부두에 도착한 것은 해가 바다 너머로 자취를 감춘 뒤였다. 거기서 다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 날 아침 일찍 배를 타고 백령도로 향했다. 자식들의 마지막 자취를 살펴본다는 설렘과 그리움에 뱃길 4시간이 지루한 줄도 몰랐다. 백령도에 있는 천안함 46용사 위령탑은 사고현장이 내려다보이는 바닷가 언덕배기에 세워졌다. 위령탑 앞에서 유족은 동판에 새겨진 망자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오열했다. 바닷바람에 녹이 슨 부조를 하염없이 울면서 닦아냈다. 이어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 바다로 나가 해상 위령제를 지냈다. 유족의 사나운 심정을 헤아리기라도 하듯 파도가 길길이 날뛰어 배는 사고현장 가까이 가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 서울로 돌아오는 것으로 3년째 되풀이되는 추모행사는 막을 내렸다.



“대전에는 유해가 안장돼 있고, 평택에는 마지막을 보냈던 천안함이 있고, 백령도에는 사고해역이 있어요. 어딜 가도 내 새끼 흔적은 있는데, 모습은 볼 수 없는 거예요. 울며 웃으며 3박4일을 보냈지요. 우리끼리는 웃는 게 이해돼요. 너무 허탈해 웃는 거지요. 다들 울다가 어느 순간 한 명이 웃으면 따라 웃어요.”

천안함 유족은 1년에 6차례 정기적으로 모인다. 처음엔 서로 잘 몰라 서먹서먹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웬만큼 알고 지낸다. 살아온 길이 다르고 환경이 다르고 성격이 다르지만, 아들을 나라에 바쳤다는 마음만은 같다.

“당신이 아들 죽였다”

“천안함 사건은 인재(人災) 또 벌어지면 소송하겠다”

3월 27일 인천 옹진군 백령도 ‘천안함 46용사 위령탑’ 앞에서 3주기 추모식이 열렸다.

이씨는 “원통한 마음은 좀 가셨느냐”는 질문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가실 리가 있나요. 일하다가도 불쑥 애 생각나면 감정이 북받쳐 아무것도 못해요. 아직도 군에 가 있는 것만 같아요.”

유족협의회 집행부 임기는 2년. 2010년 7월 총무를 맡은 이씨는 지난해 재추대돼 연임 중이다. 이씨는 총무를 맡은 것에 대해 “우리 애가 내게 정신줄 놓지 말라고 준 선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씨의 장남인 고(故) 박정훈(1988년생) 상병이 해군에 들어간 것은 2009년 2월. 2년제 대학을 졸업한 후 해상병 553기로 입대했다. 정훈이 해군을 지원한 데는 해군병 출신인 아버지 박대석 씨의 영향이 컸다. 큰아버지도 해군 가족이었다. 이순신 장군을 가장 존경했던 정훈은 애초 장교가 되려고 해군사관학교 시험에 응시했다가 탈락한 아픔을 안고 있었다.

정훈이 입대하는 날 온 가족이 경남 진해로 따라가 축하해줬다. 이씨는 “내 아들도 드디어 나라를 지킨다는 생각에 뿌듯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그 자랑스러움은 1년 뒤 천추의 한으로 바뀌었다. 이씨는 “당신이 아들을 죽였다”고 남편에게 원망을 퍼부었고, “새끼를 사지로 몰아넣었다”는 자책감에 빠진 남편 박씨는 심한 우울증과 고혈압에 시달렸다.

모자(母子)가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사고 나기 두 달 전이었다. 설 명절을 맞아 휴가를 나왔던 정훈을 가족이 평택까지 차로 데려다줬다. 헤어질 때 정훈이 휴대전화를 놓고 가는 바람에 서울로 향하던 차를 돌렸다. 평택터미널 앞에서 다시 만나 휴대전화를 건네준 게 마지막 손길이었다.

사고가 일어난 것은 정훈이 막 상병 계급장을 달았을 때였다. 성격이 명랑하고 붙임성이 좋아 평소 어머니와 온갖 얘기를 주고받던 아들은 집으로 전화를 걸어 진급을 자랑했다. 이씨는 “우리 아들 장하다. 이제 1년 남았다”며 격려했다.

3월 26일 밤. TV 뉴스를 보다가 설핏 잠이 든 이씨는 어느 순간 꽝 하는 굉음에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일종의 환청이었는데 벌렁거리는 가슴이 도무지 진정되지 않았다. 잠시 후 TV에 뉴스속보가 떴다. 백령도에서 해군 함정인 초계함이 침몰하고 있다고 했다. 그때부터 정신이 나갔다. 남편은 “천안함이 얼마나 큰데 가라앉겠느냐. 다른 작은 배겠지”라고 아내를 안심시키려 했지만, 헛된 바람이었다. 남의 일만 같던 엄청난 재앙이 닥치는 순간이었다.

막을 수 있었던 사고

그날 밤을 뜬눈으로 지새운 이씨 부부는 다음 날 아침 일찍 평택으로 달려갔다. 그날부터 5월 8일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단 하루도 제대로 잔 날이 없었다. 아들의 시신은 4월 15일 20일 만에 발견됐다. 함미 기관부 침실이었다. 그날 밤 12시부터 이튿날 새벽 4시까지 당직근무여서 사고 당시 자고 있었던 것이다.

자식의 시신을 본 어미들은 하나같이 실신했다.

“남편은 시신이 올라올 때 머리카락만 보고 정훈이라는 걸 알았대요. 온몸이 기름과 뻘투성이였대요. 저는 기절할까 봐 못 보게 해서 나중에 염할 때야 봤는데, 얼굴은 깨끗하더라고요. 피부도 살아 있는 것처럼 매끄럽고.”

이씨는 “해군이 원망스럽지 않느냐”는 질문에 “해군보다 합참(합동참모본부)이 더 원망스럽다”고 했다. 그러면서 천안함 사고를 ‘인재(人災)’라고 규정했다.

“나중에 밝혀졌지만, 그날 합참에 북한 잠수정이 수상하게 움직인다는 첩보가 들어왔대요. 마땅히 2함대에 연락해 대비태세를 갖추게 했어야지요. 그때 적절한 조치를 취했다면 사고를 막을 수 있었을 거예요. 피격 전후 지휘체계도 엉망이었지요. 합참 관계자들은 다 자리를 비운 상태였고. 그런데도 누구 하나 문책을 받지 않았어요. 힘없는 해군 지휘관들만 징계를 받고.”

여론조사에 따르면, 아직도 우리 국민의 20~30%는 천안함 사고 원인에 대한 정부 발표를 믿지 않는다. 이들은 천안함이 기뢰나 좌초, 혹은 피로파괴 현상으로 침몰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이 얘기를 꺼내자 이씨가 분노했다.

“그런 얘기하는 사람들, 2함대에 가서 천안함을 보라고 말하고 싶어요. 보고도 그런 얘기가 나오는지. 철선이 끊어져 너덜너덜한 모습을 보라고. 엉뚱한 의혹을 제기하는 게 부끄러워질 거예요.”

이씨는 정부와 군 당국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했다.

“천안함 사건은 인재(人災) 또 벌어지면 소송하겠다”

2009년 휴가를 나온 故 박정훈 상병. 왼쪽부터 아버지, 남동생, 박 상병, 어머니.

“사고 이후에도 함정 환경이 개선되지 않은 게 안타까워요. 소나(수중음탐장비) 성능은 여전히 안 좋아요. 국민을 사지에 몰아넣을 때는 그만한 안전장치를 마련해야지요. 지금도 해군 장병은 심각한 위험에 노출돼 있어요. 위치수신 재킷 등 최소한의 보호장비도 없어요. 정부는 지금이라도 해군에 대한 투자를 늘려야 합니다. 똑같은 일이 또 발생한다면 대한민국 정부는 정말 바보지요. 그때는 제가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할 겁니다.”

천안함 생존 장병은 58명. 사고 직후 유족은 그들을 보는 게 너무 고통스러웠다. 이씨는 “솔직히 야속하고 원망스러웠다”고 털어놓았다.

“내 새끼도 저 자리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지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그들을 고마워하게 됐어요. 그 어려웠던 상황에서 내 아이와 마지막까지 함께했던 사람들이라는 생각에. 저들도 내 자식처럼 가슴에 품고 가야 하지 않겠느냐고….”

마지막 가는 날까지…

“천안함 사건은 인재(人災) 또 벌어지면 소송하겠다”

아들의 유치원, 대학 시절 사진을 지갑에 넣고 다니는 이연화 씨.

가족 중 꿈에서 정훈을 가장 먼저 만난 사람은 여섯 살 아래인 남동생이었다. 남달리 우애가 좋은 형제였다. 꿈에 나타난 형은 평소처럼 동생과 축구, 컴퓨터 게임을 하고나서 “나 대신 부모님께 효도하라”는 말을 남기고 떠나갔다.

“가족끼리 여행을 참 자주 했어요. 지금은 그게 더 힘들게 해요. 곳곳에 정훈이와의 추억이 서려 있거든요. 자주 들르던 음식점에 들어가려다 발길을 돌려요. 애 아빠에게 ‘나 거기 못 들어간다’고…. 정훈이와 같이 갔던 여행지에서는 차를 못 세워요. ‘그냥 가자’고….”

이씨의 눈자위가 벌게졌다.

“자식은 가슴에 묻는다고 하잖아요. 그 말뜻을 몰랐어요. 겪고 보니 알겠더라고요. 죽어서도 늘, 하루 24시간 함께 있는 거예요. 어떨 땐 나도 모르게 정훈이 이름을 부르며 말을 걸어요.”

지난 3년간 이씨 가족은 거의 주말마다 현충원을 찾았다. 서울 집(동대문구 답십리)에서 두 시간 걸리는 거리라 기름값도 만만치 않지만 앞으로도 계속 다닐 생각이다. 이씨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들 때문에 인생공부를 다시 하게 됐어요. 2010년 3월 26일 전후로 세상이 바뀌었지요. 그전엔 세상이 참 재미있었어요. 하지만 사건 이후 삶의 지표가 달라졌어요. 다른 유족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기자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이제는 좀 잊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이씨가 천천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눈물이 마르지 않아요. 아마도 마지막 가는 날까지 잊지 못할 거예요. 3년이 지나니 숨은 좀 쉴 것 같아요. 그전엔 가슴이 막혀 숨도 제대로 못 쉬었거든요. 10년쯤 지나면 무뎌지려나 생각했는데, 제2연평해전(2002년 발생) 유족을 만나보니 그것도 아니더라고요. 10년이 지났는데도 똑같더라고요.”



주간동아 2013.04.08 882호 (p34~36)

조성식 기자 mairso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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