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65

2012.12.03

“세금 못 내” 독일도 탈세 몸살

독-스위스 조세협정 상원에서 부결… 부유층뿐 아니라 서민층도 ‘탈세 불감증’

  • 박성윤 브레멘 통신원 bijoumay@daum.net

    입력2012-12-03 10: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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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동안 관심을 끌었던 독일과 스위스의 조세협정 비준안이 결국 부결됐다. 11월 23일 독일 연방상원에서 사회민주당과 녹색당 의원들이 반대표를 던진 것. 이로써 2011년 10월 독일 연방하원이 통과시킨 독일과 스위스의 조세협정이 폐기될 위기에 처했다.

    조세협정을 주도한 쇼이블레 독일 연방 재무부 장관은 “추징금 100억 유로(한화 약 15조 원)가 날아갔고, 세금도피 문제도 해결하지 못했다”며 야당 의원들에게 책임을 전가했다. 반면 야당 의원들은 조세협정 비준 불가 처지에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여당이 고작 100억 유로로 해결을 보려 한 것은 납세 의무를 성실히 이행해온 국민을 배반하는 행위”라고 맞섰다. 스위스에 은닉된 독일 자금은 최대 2000억 유로(2011년 ‘쥐트도이체 차이퉁’ 보도, 한화 약 300조 원)로 추산된다.

    조세협정의 발단은 한 장의 CD였다. 2010년 초 부퍼탈 시에 위치한 세무조사단에 스위스 은행 고객 1500명의 정보가 담긴 CD 한 장을 250만 유로에 넘기겠다는 익명의 제안이 들어왔다. CD 안에 탈세로 추정되는 독일인의 자산 정보가 들어 있다는 것. 부퍼탈 시를 관할하는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린센 재무부 장관(기독교민주당), 쇼이블레 연방 재무부 장관은 주정부들과 비용을 분담해 이 CD를 구매했다. 이것이 소위 ‘세금 CD’다. 어떤 경로로 세금 CD를 건네받았는지는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 다만, 연방정부는 모든 법적 검토를 거쳤다는 점과 ‘탈세 의혹을 추적하는 것이 국가의 최우선 의무’라는 조세형법을 근거로 국가가 CD 정보를 탈세 사실의 증거물로 사용하는 일은 합법이라고 강조했다. 세무조사단은 곧장 이들 탈세자들, 정확히 말해 납세신고서에 자산을 축소 기입해 세금을 덜 내고 그 남은 돈을 스위스 은행에 넣은 뒤 이자세도 내지 않은 세금도피자들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다.

    스위스 비밀계좌 폭로한 ‘세금 CD’

    하지만 두 달도 안 돼 쇼이블레 장관에게 복병이 나타났다. 독일에서 가장 많은 유권자가 사는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집권당이 사회민주당으로 바뀌었지만 크라프트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총리와 발터보르얀스 재무부 장관은 세금 CD 구매를 멈추지 않았다. 이들이 구매한 CD는 지금까지 총 여섯 장으로 알려졌는데 율리우스 배어, UBS, 메릴린치 스위스 등 대형 은행, 증권사 등과 이들과 거래한 독일 고객의 정보가 들어 있었다. 첫 번째 CD에는 단순히 고객명단과 계좌정보만 있었으나 이후 정보 수위가 높아졌다. CD에는 은행 직원이 고객에게 제3국에 차명으로 재단법인을 세우고 그 자금을 스위스에 유치해 세금을 피하는 편법을 알려주는 동영상과 함께 은행 직원 교육용 내부 문서까지 담겼다.



    스위스 정부는 자국의 은행비밀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발터보르얀스 장관을 고소하는 등 독일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발터보르얀스 장관은 압력에 굴하지 않고 탈세자 명단 확보와 확인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그 와중에 스위스 은행 비밀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내부인밖에 없으며, 이들이 정보를 빼내 CD에 저장하거나 아예 정보가 담긴 CD를 훔쳐 독일에 팔아넘긴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CD 매입을 두고 논란이 벌어졌다. 여당인 사회민주당은 국가가 장물을 획득하는 것은 부도덕한 행위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연방헌법재판소는 “정보 절도의 책임은 독일에 있지 않다”는 판결을 내렸다. 독일 법은 정보를 물건으로 취급하지 않으므로 장물로 보기 힘들다는 해석이 함께 내려졌다.

    ‘납세자들의 로빈 후드’라는 별명을 얻은 발터보르얀스 장관은 “탈세범을 잡을 유일한 증거물을 입수하는 일과 조세협정이라는 싼값으로 탈세를 회수하는 일 가운데 무엇이 진짜 장물아비 짓인가”라고 일갈했다. 11월 12일부터는 검찰, 경찰, 세무조사단의 합동 수색을 전국으로 확대해 탈세 의혹을 받는 사람의 가택과 사무실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마음은 왼쪽, 돈지갑은 오른쪽

    조세협정은 오랫동안 골머리를 썩여온 탈세 도피 문제를 일단락 지으며 스위스 은행에 있는 독일 자금을 합법화해 세금을 매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조세협정을 지지하는 사람은 ‘지붕 위에 있는 비둘기보다 내 손 안에 있는 참새가 낫다’는 독일 속담을 들며 추징금 100억 유로의 가치를 강조한다. 이번에 통과됐으면 내년 1월 1일 발효 예정이었던 조세협정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첫째, 탈세 행위를 10년 전까지 소급 적용해 총자금액의 21~41%를 일괄 추징하고 이로써 기존 탈세를 모두 면죄한다. 둘째, 이 과정에서 스위스 은행은 독일 측이 요청하면 탈세 의혹 인물의 정보를 제공하고 추징금을 걷어 독일에 이체하며 계좌는 익명을 보장한다. 셋째, 자금은 일단 모두 합법화하고 이자세와 기타 상속세는 독일세율 26.5%를 똑같이 적용해 과세한다.

    그러나 조세협정에 반대하는 사람은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든다. 첫째, 추징금에 적용하는 세율은 실제로 26%선에서 최소한으로 적용될 개연성이 높고, 그렇지 않다 해도 협정 후 추징금 액수가 협정 전 자진신고자 납세액의 1/3 수준으로 너무 낮으며, 단 한 번의 추징금으로 그간의 범죄를 사면해주는 것은 정의에 어긋난다. 둘째, 그 과정에서 스위스 은행은 다양한 수법으로 추징금을 축소할 것이며, 익명을 보장해주는 것은 국가가 범죄자를 비호하는 반윤리적 행위다. 셋째, 협정이 발효되면 앞으로 비슷한 탈세범죄가 일어나도 아무런 제재를 취할 수 없다. 무엇보다 독일 세무조사단은 탈세 혐의자에 대해 2년에 1만3000명까지만 스위스 측에 정보를 요청할 수 있도록 돼 있어 추징금 회수의 실효성이 의심된다.

    조세협정 논란이 벌어지자 탈세자들의 자진신고가 줄을 잇고 있다. 2010년 1월~2012년 8월 독일 전역에서 신고 건수가 2만9000건을 넘었다. 자진신고를 하면 미납 세금과 연체료 6%만 내고 형사처벌은 면죄받기 때문이다. 그 덕에 세무사들이 때 아닌 호황을 맞았다. 세무사 클라우스 올빙은 “자진신고자의 자산 규모는 1명당 평균 15만 유로(2억3000만 원)에서 30만 유로(4억5000만 원) 사이”라고 말했다. 즉, 거액 탈세자들은 자진신고를 하지 않고 여전히 빠져나간다는 뜻이다. 오히려 그는 불편한 진실을 말한다.

    “상담하러 오는 사람 가운데 사회민주당, 녹색당, 좌파당 지지자가 얼마나 많은지 깜짝 놀랐습니다. 마음은 왼쪽에 있는데 돈지갑은 오른쪽에 있는 거죠. 너도나도 다 탈세를 하고 있어요. 독일 사회에 대한 반항 심리랄까요.”

    어쨌거나 꼬박꼬박 세금을 내는 임금생활자들에게 부유층의 탈세는 용서받지 못할 일이다. 부자들 세금으로 가난한 사람이 혜택을 누린다는 복지국가 독일에 대한 믿음도 흔들리고 있다. 사회민주당은 이런 상황을 이용해 정치적 부활을 노린다. 9월 사회민주당 총리 후보로 선출된 슈타인브뤼크는 “조세협정은 여당의 정치력 실패”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2009년 미국이 자국 내 스위스 은행을 봉쇄하겠다고 협박하며 미국인의 계좌정보를 직접 넘겨받는 등 스위스와의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었던 것과 비교하면 독일이 너무 물러 터졌다는 것이다. 그는 “탈세 은닉 문제를 유럽연합(EU) 차원으로 확대해 EU 안에서 통일된 규정을 마련하겠다”면서 “여러 나라와 연대해 스위스 비밀은행 빗장을 풀겠다”고 말했다.

    조세협정이 살아날 마지막 기회가 남아 있긴 하다. 올해 안에 연방 상하원중재위원회에서 반대파를 설득하면 가능하다. 연방정부는 조세협정안 좌초를 예상하고 사전에 달콤한 제안을 내놓았다. ‘추징금 100억 유로 가운데 연방 몫 30%를 포기하고 주정부들에게 전부 할애하겠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이 돈이면 형편이 어려운 주들은 부채를 삭감하거나 인프라시설을 개선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제안도 국회 동의를 돈으로 매수하려는 태도라는 거센 비난과 함께 일찌감치 거부당했다. 내년 9월 총리 선거를 위한 도덕적 포석이 이렇게 하나 둘 깔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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