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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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꽃’이 피었습니다

강의실에만 머물다 거리와 사람들 사이로

  • 이설 기자 snow@donga.com journalog.net/tianmimi 구희언 기자 hawkeye@donga.com journalog.net/kooo

    입력2011-03-14 09: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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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문학 꽃’이 피었습니다
    #제1막 | 2005년 즈음, 인문학 열풍이 감지되기 시작했다. 바람은 두 곳으로부터 불어왔다. 하나는 대학 강단 인문학과 대별되는 대안 인문 공간이고, 다른 하나는 경제·경영계였다. 연구에 매몰된 채 대중과 괴리된 인문학을 비판하며 상아탑 밖으로 독립한 대안 인문 공간. 그리고 경쟁 격화 등 환경 변화에 대응하려고 인간을 연구하기 시작한 경제·경영계. 지향점은 달랐지만 이들로 인해 한국 사회에서 ‘인문학’이 ‘핫 키워드’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제2막 |2011년, 유행처럼 번진 인문학 열풍은 다시금 묘한 기류 변화를 맞고 있다. ‘꼭대기에서 이따금 불던 살랑바람’이 ‘위아래를 아우르며 매일같이 몰아치는 강풍’으로 바뀐 것이다. 서울대를 시작으로 속속 개설된 인문학 위주 최고위과정, 인문학도를 선호하는 취업 트렌드, 5년 사이 2배로 불어난 대안 인문 공간, 교양 과정을 강화하는 대학 등이 그 예다. 현재 인문학은 크게 강단 인문학, 강단 밖의 재야 인문학, 경제·경영계 등의 제3 인문학으로 나뉜다. 발아기를 지나 부흥기를 맞은 인문학 현장 곳곳을 취재한 뒤 인문학의 새판짜기를 살펴봤다.

    경제·경영-CEO에서 말단 직원까지

    “올해 신입사원 10~15%가 인문·사회계열 전공자다. 신입사원 교육 과정도 인문학 중심으로 바뀌었다. 그 전까지는 인문학도를 거의 뽑지 않았다.”(현대건설 홍보실 박원철 과장)

    취업 시즌이 되면 경제·경영 전공 대학생의 주가는 오르곤 했다. 다른 학문을 전공하는 대학생이 경제·경영을 제2 전공 혹은 복수 전공하는 것도 이런 분위기와 무관치 않다. 외환위기 이후 대학생의 취업이 힘들어지면서 이런 열기는 더해갔다. “아이들이 공부를 열심히 하기에 철학이 부흥하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알고 보니 좋은 학점을 받아 전과하려는 게 목적이었다”는 한 사립대 철학교수의 말이 당시 분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당연히 인문·사회계열 졸업생은 찬밥 신세였다. 영어영문학·중어중문학 등 ‘쓸모 있는’ 외국어문학 전공자는 그나마 사정이 괜찮았지만, 비인기 외국어문학·철학·사학 전공자는 ‘취포자’(취업포기자) 취급을 받았다. 부모 세대는 “문·사·철을 모르면 되나”라고 혀를 차면서도 자녀의 취업 성공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하지만 최근 기업의 분위기가 조금씩 바뀌는 추세다. 2010년 현대건설 관리·사무파트 신입사원 30명 중 15명, 2011년 43명 중 13명이 순수 인문계열 전공자다. 원래는 경제·경영·법학과 출신이 100%였다. 현대건설은 올해에도 신입사원 10~15%를 인문·사회계열에서 뽑았다. 현대건설의 이런 채용 풍토 변화는 김중겸 사장에게서 비롯한다. 다음은 박원철 과장의 설명.

    “사장이 인문학에 관심이 많아, 경영자를 위해 서울대·고려대 등이 개설한 인문학 과정을 대부분 들었다. 이런 경험을 토대로 직원들의 인문학적 소양을 길러주려고 노력한다. 이따금 직원들과 뮤지컬 보고 미술관에 함께 간다. 이는 건설사 업무가 단순 시공에서 포괄적이고 다양한 쪽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인문학 꽃’이 피었습니다
    대안 인문 공간-다양화·세분화로 체질 개선

    현대건설 외에도 기업문화에 인문학이 자리한 기업이 상당수다. 롯데백화점 홍보팀 이경수 대리에 따르면 롯데백화점은 지난해부터 서울대 인문대와 협의해 임원 대상으로 단체 인문학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최근에는 인터넷 교보문고와 연계해 직원들에게 연 12만 원씩 책을 구입할 수 있게 혜택을 주기 시작했다. ‘책읽기 운동’으로 유명한 우림건설은 매달 2, 3번 인문학 강의인 ‘우림 목요특강’을 실시하는데, 외부인에게도 강의를 개방한다.

    기업의 인문학 도입은 경영자가 바람을 일으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는 삼성경제연구소(SERI)로 대표되는 CEO 대상 인문학 강연 기관이 최근 5년 사이 폭증한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2007년 서울대 인문대의 ‘인문대 최고지도자 과정(AFP)’과 고려대 박물관의 ‘문화예술 최고위과정(APCA)’, 2008년 성공회대 인문학습원의 ‘CEO를 위한 인문학 과정’, 2010년 국립극장과 서울과학종합대학원(aSSIST)이 연계한 ‘전통예술 최고경영자 과정’ 등이 잇따라 개설됐다. 한 AFP 졸업생은 “AFP는 6개월에 수강료가 1000만 원이 넘지만 경쟁률이 3대 1이 넘는다. CEO의 인문학 공부는 이미 트렌드가 됐다. 이들은 본인이 접한 인문학을 기업에 전파하거나 경영에 활용할 방법을 고민한다”라고 귀띔했다.

    “대학 인문학은 배움을 등한시하고 연구에만 치중하는 성격이 강했다. 그에 대한 비판에서 대안 인문 공간이 생겨나기 시작했다.”(철학아카데미 김진영 상임위원)

    10여 년 전 대학 인문학이 위기에 빠졌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상아탑 밖에서는 일종의 ‘재야’ 인문학이 싹을 틔웠다. 인문학 본연의 인간 중심 비판정신을 잃어버린 강단 인문학에 회의를 느낀 젊은 인문학자들이 독립체를 꾸린 것이다. 2000년 ‘철학아카데미’를 시작으로 ‘수유+너머’와 ‘문예아카데미’ 등이 차례로 문을 열었다.

    대안 인문 공간은 학문 연구와 강의를 병행하며 대중 인문학에 긍정적인 영향을 줬다. 비싼 학비와 높은 문턱으로 인문학을 접하기 힘들었던 대중이 속속 대안 공간의 문을 두드렸다. 학문의 세분화·전문화 경향과 대학 정치에 염증을 느낀 학자들도 이곳에 둥지를 텄다. 경희대 도정일 명예교수는 “30년 전부터 시작된 전문화 경향으로 대학의 인문학 정신이 흐려졌다. 오늘날 ‘재야 인문학 운동’은 그에 대한 불만에서 출발한다”라고 말했다. 다음은 그의 설명.

    “과거 인문대 교수는 공공지식인의 역할을 했다. 인문학자로 철학·문학을 공부하면서 사회·대중 교육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한데 연구영역이 세분화되면서 공공지식을 아우르는 교육자가 사라졌다. 자기 전공 전문분야에만 몰두하니 대중 교육을 할 능력이 없고, 그럴 필요도 못 느낀다.”

    그 나름의 영역을 개척해온 대안 인문 공간은 지난 5년 사이 급격히 늘어났다. ‘철학아카데미’ ‘수유+너머’ ‘문지문화원 사이’ ‘다중지성의 정원’ ‘KT·G 상상마당’ ‘독서대학 르네21’ ‘한겨레교육문화센터’ ‘아트앤스터디 인문숲’ ‘시민예술학교’ ‘예술의전당 예술아카데미’ 등 주요 인문 공간만 10여 군데. 각종 세미나 클럽과 지역 공간도 활발히 활동 중이다.

    대학·지방자치단체-눈높이 낮춰 친근하게

    ‘인문학 꽃’이 피었습니다
    각 공간은 개성이 다르다. 인문학자들에 따르면 ‘철학아카데미’는 다양한 전공을 넘나드는 철학 강의를 선보인다. ‘수유+너머’는 자생적 연구 공간으로 대안 인문 공간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아트앤스터디 인문숲’은 온·오프라인에서 풍부한 문화 강의를 제공하고, ‘KT·G 상상마당’은 인문학 강의뿐 아니라 미술, 음악 등 실용 강의도 제공한다.

    대안 공간이 늘어난 배경에 대해서는 2가지 시각이 공존한다. 한 인문학자는 “다양한 전공의 공급자(강사)와 다른 취향의 수용자(대중)가 만나 대안 공간의 커리큘럼이 날로 풍부해졌다. 인문학에 대한 대중 인식이 일반화하면서 생긴 현상”이라고 말했다.

    반면 경희대 영어학부 민승기 겸임교수는 “경영이 어려워지면서 새로운 시도 차원에서 소규모 공간이 증가한 것”이라고 밝혔다. 7, 8년 전까지만 해도 대학생·대학원생 수요가 많아 대형 강의가 가능했는데, 인문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이 감소하면서 수강생이 줄었다는 설명이다.

    “인문 정신의 핵심은 4가지다. 인간에 대한, 사회에 대한, 역사에 대한, 문명에 대한 인간의 책임이 그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대학 인문학은 인문 정신을 놓은 지 오래다. 하지만 최근 대안 인문 공간과 경제·경영계 열풍에 이어 대학가에도 뒤늦게 인문학을 되살리자는 목소리가 퍼지고 있다.”

    3월 9일 오후 경희대에서 만난 도정일 명예교수가 나지막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책상 위에는 ‘후마니타스’ 관련 책과 자료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경희대는 올해 교양학사 학위를 주는 ‘후마니타스 칼리지’를 개설했다. 모든 재학생의 필수 이수 교양강좌도 강화했다. 도 교수가 보여준 필수과목 교재 ‘인간의 가치 탐색’ 목차는 ‘삶의 의미와 무의미’ ‘우리의 초상’ ‘문명의 문법’ 등 묵직한 주제로 가득했다.

    경희대뿐 아니다. 지난해 대학가의 최대 화두는 ‘학부 교양교육 강화’였다. 1970년대 이후 대학은 교육보다 연구 실적에 치중했다. 대학 순위에 직접적 영향을 주는 건 눈에 보이는 실적이었기 때문이다. 정부 지원도 교육보다 연구 쪽으로 쏠렸다. 하지만 최근 대학 역할에 대한 반성이 일면서 교양교육 강화를 위한 움직임이 일고 있다. 2010년 교육과학기술부의 ‘학부교육선진화 선도대학’ 지원 사업도 이를 부채질했다.

    ‘풀뿌리 인문학’ 열기도 거세다. ‘풀뿌리 인문학’은 시민을 대상으로 하는 지방자치단체(이하 지자체) 강의나 노숙인을 돕는 강의 등을 아우르는 말로, 지난 5년간 급격한 성장세를 보였다. 인문학 트렌드를 발 빠르게 포착한 서울 강남구부터 시작해 지금은 거의 모든 기초자치단체가 상시 인문학 강좌를 개설한다.

    “2009년부터 마포구평생학습센터에서 하는 ‘마포열린강좌’에서 꾸준히 강의를 듣고 있다. 예술, 철학 분야의 다양한 강의가 구비돼 있다.”

    서울 마포구 신수동의 주부 김옥순(54) 씨. 그는 음악과 책을 사랑하는 문학소녀였지만, 가족 뒷바라지에 치여 ‘영혼과 관련된 취미생활’은 잊고 살았다. 한데 ‘마포열린강좌’를 안 뒤에는 생활이 180도 달라졌다. 그는 “남편과 고등학교 2학년 아들 아침밥을 챙겨 먹이고 나서 듣는 강의는 꿀맛”이라며 “지자체 강의는 거리가 가깝고 가격이 저렴해 부담이 없다”라고 말했다.

    ‘풀뿌리 인문학’은 대학과 지자체 등이 연계해 무섭게 바람을 일으켰다. 서울 관악구는 서울대, 마포구는 ‘문지문화원 사이’와 손잡고 강사와 커리큘럼을 수급한다. 직접 인기 강사를 초빙하는 강남구의 ‘상상너머 창조의 수요 인문학’ 특강은 고정 수강생만 100명이 넘는다.

    지금의 인문학 바람을 바라보는 인문학자들의 속내는 복잡하다. 관심과 수요가 늘어난 것은 환영할 일이지만, 주객이 전도돼 인문학이 트렌디한 것으로 변질될까 걱정스럽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 사회가 변화의 지점에 다다랐다는 점이다. 도정일 교수는 “영혼도 보살피면서 살아야 한다는 공감대가 퍼지고 있다. 아울러 인문학이 사고력, 판단력, 창의력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되며, 궁극적으로 국격을 높이는 지름길이라는 인식도 생기기 시작했다. 이 여세를 몰아 적극적으로 인문학을 부흥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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