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75

2011.02.21

난, 결코 엄마처럼 살지 않을래!

레베카 밀러 감독의 ‘피파 리의 특별한 로맨스’

  • 강유정 영화평론가·국문학 박사 noxkang@hanmail.net

    입력2011-02-21 12: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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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결코 엄마처럼 살지 않을래!
    우연히도 비슷한 작품 두 편이 비슷한 시기에 개봉했다. 내용은 한 줄로 요약하면 꽤 부유한 집안의, 아이들도 제법 자랑스럽게 키워낸 여성이 뒤늦게 자아를 발견한다는 것이다. 세상엔 자아를 찾아 집을 떠나는 여성이 생각보다 많다. ‘인형의 집’을 뛰쳐나간 ‘노라’야 기념비적 인물로 대접받았지만 그 후 모든 여성이 그런 대우를 받는 것은 아니다. 영화 ‘아이 엠 러브’와 ‘피파 리의 특별한 로맨스’는 약속이나 한 듯이 다른 삶에 눈뜨는 여성을 그리고 있다.

    주인공들은 중년이란 호칭이 어울릴 법한 여성들이다. 우리는 흔히 그런 여성을 아줌마라고 부른다. 아들이 로스쿨에 다니고, 손자까지 볼 정도니 할머니라고 봐도 될 정도다. ‘아이 엠 러브’의 주인공 엠마는 이탈리아의 부호와 결혼한 러시아 출신 여성이다. 엠마라고 불리지만 이 이름은 남편이 붙여준 것일 뿐, 그녀는 본명을 잊고 산다. 그녀는 자신의 진짜 이름을 찾아, 처음 그녀가 이곳에 발 디뎠을 때처럼 허름한 추리닝 차림으로 떠난다.

    ‘피파 리의 특별한 로맨스’ 역시 엠마의 사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피파는 집을 떠나 바닥도 알 수 없는 추락을 거듭하던 중, 부유한 작가 허브를 만나 제2의 인생을 맞는다. 피파는 댄스 강습소에서 하나씩 포즈를 배우듯이 아름답고 지적인 아내, 엄마의 역할을 학습해나간다. 어느새 피파는 자신을 잊은 채 리의 아내로만 살아간다.

    흥미로운 것 중 하나는 두 영화가 모두 저녁식사 장면으로 시작한다는 사실이다. ‘아이 엠 러브’의 엠마는 시아버지의 생일파티를 위해 좌석 배치표까지 작성할 정도로 치밀하고, 피파 리 역시 새로운 곳에 이사 왔음에도 무서울 정도의 적응력을 보인다. 두 사람은 데칼코마니처럼 저녁식사 테이블과 부엌 사이를 오간다. 인생에서 중요한 시험을 치르듯 그렇게 그녀들은 전전긍긍한다.

    두 작품 모두 여성의 다른 길 찾기라는 뻔한 주제를 새로운 방식으로 다뤘다는 점에서 눈에 띄지만, ‘피파 리의 특별한 로맨스’는 좀 더 다른 국면을 건드린다는 점에서 독특해 보인다. 피파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영향을 끼친 인물은 엄마다. 피파의 엄마는 완벽한 엄마이자 훌륭한 아내처럼 보였지만 실은 약물중독자였다. 문제는 가족 중 누구도 이 사실을 인정하지도, 언급하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엄마의 태엽이 조금씩 풀리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사람은 피파밖에 없다. 그녀는 조금이라도 엄마에게 도움이 되고자 하지만 중독은 쉽게 떨쳐지지 않는다.



    엄마의 중독은 묘하게도 피파의 가슴속에 죄책감을 심어준다. 모든 게 다 자신 탓만 같다고 여긴 피파는 마침내 엄마를 증오하고 거부하게 된다. 집을 버리고 떠난 피파는 결코 엄마 같은 여자가 되지 않으리라 마음먹는다. 하지만 어느새 피파는 자신이 그토록 거부하고 싶었던 엄마와 닮은 자신을 발견한다. 꼭 피파 그녀처럼 엄마를 싫어하는 딸도 똑같다.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을 침범한 몽유병은 고장 난 줄도 모른 채 살아왔던 피파의 자아에 신호를 전해준다. 당신의 엔진은 너무 과열돼 있다고, 이제는 잠시 ‘엄마와 아내’라는 기계의 작동을 멈추고 하고 싶은 대로 원하는 대로 살아도 된다라고 말이다.

    이런 순간들은, 실은 경고처럼 삶에 종종 찾아온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이런 계시를 애써 무시하고 살아간다. 마침내 완전히 방전이 된다 한들 피파처럼 뒤늦게라도 다른 궤도를 찾는 일도 쉽지는 않다. 삶의 관성 역시 지독한 중독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피파 리와 엠마의 선택이 환상적이면서도 대단하게 여겨진다. 영화에서처럼 누구나 다 그렇게 오래 묵은 삶의 관성에서 벗어날 수는 없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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