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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 남도길 대장정 희망을 걷다 03

전설이 숨쉬는 겨울 바다 한번 보면 반할 낍니더~

부산의 전설 ‘이기대 해안길’

전설이 숨쉬는 겨울 바다 한번 보면 반할 낍니더~

전설이 숨쉬는 겨울 바다 한번 보면 반할 낍니더~
이기대(二妓臺). 이모 씨네 둘째아들 이름이 아니다. 한국 제2의 도시 부산의 절경으로 꼽히는 명소다. 걷기 바람이 유행처럼 번지면서 최근에는 해안길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부산시 남구 용호동 장지산 동쪽 해안가를 잇는 약 2km 길로, 기기묘묘한 암반이 즐비하다. 암반이 바다와 접해 있어 낚시터로도 유명하다.

기기묘묘한 암반 즐비 … 낚시터로도 각광

“산에 가시게예? 진정한 한국인이십니더.”

한 겹, 두 겹, 세 겹…. 모두 7겹을 껴입었다. 걷기로 한 1월 16일 부산에는 96년 만의 강추위가 닥쳤다. 오전 최저기온이 영하 12.8℃. 그러나 춥다 해도 따뜻한 남쪽나라였다. 이날 서울 오전 최저기온은 영하 17.8℃를 기록했다. 출발하기 전 간식거리를 사러 슈퍼마켓에 들렀다. 슈퍼 주인의 ‘진정한 한국인’이라는 말에 나는 말끝을 흐렸다. “이렇게 추운 날….”

이기대를 즐기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취향에 따라 길을 골라 걸을 수 있다. 선택지는 크게 3가지. 이기대 도로로 걷는 이면도로길, 중간 장지산을 따라 걷는 산길, 그리고 이기대 해안가를 잇는 이기대 해안길이다. 오늘 걷는 길은 이기대 해안길. 섶자리에서 출발해 오륙도를 종점으로 하는 코스다. 용호동 LG메트로씨티 아파트 단지 옆으로 난 출입구에서 이기대와 첫인사를 튼다.



강추위에 다들 집에서 웅크리고 있는 걸까. 평소 인파로 북적거린다는 해안길. 오늘만큼은 휑하다. 이기대라는 이름에는 두 가지 설이 전해진다. 하나는 1850년 좌수영 역사와 지리를 적은 ‘동래영지’에 따른 것으로, 근방에 ‘2명의 기생(二妓)’ 무덤이 있어 이기대라 부른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향토사학자 최한복의 주장으로 그는 생전에 ‘이기대’가 아닌 ‘의기대(義妓臺)’가 올바른 호칭이라고 했다. 임진왜란 때 수영성을 함락시킨 왜장을 의기가 술에 취하게 한 뒤 이곳에서 끌어안고 함께 죽은 곳이라는 것이다.

출발지인 섶자리에 서서 가만히 주변을 둘러봤다. 바닷바람에 코끝이 시리고 귀와 볼이 따가웠다. 하지만 이런 풍경을 마음에 담을 수 있다면 추위쯤은 아무래도 좋다. 입구부터 바다가 넘실댔다. 그것도 코앞에서 넘실댔다. 먼발치가 아닌 발아래서 출렁이는 바다를 보는 감상이 색달랐다. 저 멀리 광안리와 해운대도 보였다. 광안리부터 해운대로 이어지는 해안가가 한눈에 잡히는 뷰포인트는 흔치 않다. 경품 행사에 당첨된 듯 행복함이 밀려들었다.

분위기를 익힌 뒤 걸음을 옮겼다. 섶자리에서 출발하는 길은 미끈했다. 나무데크로 걷기 쉽게 길을 만들어뒀다. 잘 짜인 계단을 올랐다. 10분쯤 걸었을까. 아래를 내려다보니 낭떠러지였다. 깎아지르는 절벽 사이로 파도가 요동쳤다. ‘부서지는 성난 파도’라는 진부한 표현이 꼭 들어맞는 광경이었다.

이기대 해안길은 험준하다. 동굴도 있고 절벽도 가파르다. 이런 지형이 해안을 따라 오륙도까지 이어진다. 지형이 험한 탓에 이곳은 1993년에야 외지인의 출입을 허락했다. 이렇게 개방되기 전까지는 군사작전지역으로 통제됐다. 그래서 자연보존 상태가 좋다. 산자락에는 희귀한 식물과 곤충도 많이 산다.

지금의 산책길은 2005년 완성됐다. 부산시가 ‘이기대 해안산책로 조성사업’을 하면서 걷기 좋은 나무계단과 구름다리가 들어섰다. 그 전까지는 산 중턱으로 난 산책길이나 산 위쪽으로 뚫린 이면도로로 사람들이 오갔다. 걷다 보니 광안대교가 전신을 드러냈다. 어둠이 내리고 대교가 불을 켜면 멋진 야경이 펼쳐질 것이다.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고급 아파트들이 들어선 해운대 마린시티 단지가 자리하고 있었다. 최근 화재사건으로 유명해진 빌딩도 마린시티에 있다.

1993년 개방 자연 보존 상태 양호

걷다 보니 동생말 전망대가 나왔다. 전망대 위 커다란 알림판이 앞으로 갈 길을 안내했다. 해안길 구름다리, 자연동굴, 공룡발자국, 어울마당, 농바위, 오륙도 해맞이 공원…. 사진 속 개성 있는 풍광들이 호기심을 재촉했고, 기대에 발걸음은 흥을 더했다.

땅을 내려다보니 어느덧 나무데크 길이 흙길로 변했다. 이곳부터는 한숨에 내달리기 아까운 길이다. 동서남북 풍경이 모두 다르다. 동으로는 숲길, 서로는 바다, 남으로는 깎아지른 절벽과 파도, 북으로는 끝이 보이지 않는 오솔길…. 그중 으뜸은 단연 바다다. 짙푸른 남색과 에메랄드 연록 빛으로 시시각각 색을 달리하는 황홀경에 기분이 붕 뜬다. “빨리 갑시다.” 오솔길인지라 앞길이 막힌 뒷사람이 걸음을 재촉했다. 환상에서 현실로 돌아온 심정으로 다시 길을 밟았다.

솨아아아. 파도가 턱밑까지 차오를 기세로 덤벼들었다. 여름이면 물장구치며 소풍 나오기 좋을 해안가. 모래사장이 아닌 바위 지대라 광안리·해운대와 또 다른 매력을 뿜어냈다. 다시 계단을 따라 산길로 올라갔다. 왼편으로 가시 돋친 철책이 보였다. 얼룩덜룩해진 녹물 자국이 그간의 세월을 설명하는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각 잡힌’ 모양새의 푯말이 건조하게 이곳을 설명한다.

‘군사용 해안경계 철책 : 이곳은 과거 군부대에서 간첩침투 예방을 위해 설치한 해안경계용 철책으로서 우리나라의 분단 현실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아픈 역사의 흔적입니다.’ 이곳부터 민간인 출입이 통제됐었는데 1997년 군사보호지역 해제 조치 이후 드나듦이 자유로워졌다. 그 전까지 이기대 곳곳을 휘감아 돌던 철책은 ‘이기대 해안산책로 조성사업’으로 대부분 사라졌다. 다만 일부 구간만 관광용으로 남아 과거를 증명하고 있다.

30분쯤 걷자 하늘만큼 긴 다리가 나왔다. 이기대 구름다리다. 난간에 손을 얹고 발을 동동 굴러보니 다리가 흔들흔들. 눈앞 광경도 어지럽게 흔들거렸다. 저 멀리 서로 등을 밀치며 장난을 치는 꼬마들이 보였다. 그 기세가 이곳까지 전해져 다시 한 번 아찔함을 느꼈다.

다시 해안가로 이어지는 길. 울퉁불퉁 바다 바위 밭이 펼쳐졌다. 콩콩, 다리를 벌려 띄엄띄엄 떨어진 바위를 건너뛰며 징검다리 놀이를 해봤다. 갯바위에서는 추운 날씨에도 낚시가 한창이었다. 산만 한 바위 뒤편에서는 껄껄, 웃음소리가 바람에 실려왔다. 낚싯대를 한쪽에 제쳐두고 바위를 방패막이 삼아 소주 한잔 하는 패거리였다. 그 광경이 한 폭의 풍경화 같았다. 제목은 ‘겨울바다와 소주, 그리고 중년 사내들.’

단단하게 무장한 커플은 사진 찍기에 바빴다. 중간 중간 자리한 쉼터마다 찰칵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당연했다. 점 하나 없이 새파란 바다는 그 자체로 그림 같은 배경이었으니. 새파란 바다 위로 샛노란 점이 지나갔다. 너무 멀어 개미처럼 보이지만, 오륙도를 도는 유람선이다. 가까이 다가온 유람선 꽁무니를 물거품이 쫓았다. 유람선은 타는 재미뿐 아니라 보는 재미도 있구나, 새로운 발견 하나를 보태며 자리를 옮겼다.

‘해운대’ 영화 찍은 어울마당

전설이 숨쉬는 겨울 바다 한번 보면 반할 낍니더~

지금은 폐광된 구리광산. 관광용 미니 동굴로 꾸몄다.

오른편 암벽엔 구멍이 숭숭 나 있었다. 자그마한 미니 동굴. 이 일대는 구리광산으로도 유명하다. 일제강점기부터 순도 99.9% 구리를 채광했다. 갱도는 모두 다섯 군데. 1호 갱도는 이기대 입구 섶자리 근처 우물로 사용하고 있으며, 나머지는 해안길 중간 중간에 있다. 지금은 모두 폐광된 상태. 더 가면 희한한 모양의 암벽이 나오는데, 백악기 시대 공룡 발자국이다. 9000만 년 전에 살았다는 대형 초식 공룡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동글동글한 돌멩이 밭을 지나 산길로 올라가니 아담한 집이 보였다. 돌로 비뚤비뚤 쌓아올린 해녀 막사. 해녀들이 잠수복을 갈아입고, 물질을 하다 지치면 잠시 쉬어 가던 곳이다. 40년 전에 만든 것을 2005년 정비해 새롭게 복원했다. 어머니의 어머니들이 차가운 바닷물에 담금질하던 몸을 이곳에 잠시 뉘었을 것이다. 지금도 간간이 해녀들이 해삼, 전복, 성게, 미역 등을 채취한다.

“‘해운대’ 찍은 곳이네?”

어울마당에 다다랐다. 운동장 반만 한 널찍한 공간이 펼쳐진다. 해맞이 단골 장소. 올해 첫날에도 이곳은 발 디딜 틈 없이 인파로 빼곡 찼을 것이다. 얼마 전에는 이력 하나를 더했다. 영화 ‘해운대’의 촬영 장소로 쓰여 명성을 더한 것. 부산 토박이인 총각이 서울 아가씨와 데이트하며 초청한 곳이 바로 이 어울마당이다. 해맞이 행사를 비롯한 각종 공연이 종종 열린다.

어울마당에서 걸어나오니 저 멀리 재미있는 광경이 보였다. 깎아지른 절벽에 꼿꼿이 몸을 세우고 선 조각상 하나. 일명 농바위로, 갓 쓴 선비처럼 생긴 기벽(奇癖)이다. 몸통, 얼굴, 갓. 3개의 육중한 돌덩이가 차곡차곡 얹혀 있다. 위태위태해 보이는데, 용케 거친 바닷바람을 견뎌냈다. 천년만년 바다를 바라보고 선 선비의 뚝심과 인내가 전해졌다.

2시간쯤 걷자 제법 가파른 길이 이어졌다. 쌕쌕. 등에서 땀이 배어나오고 숨이 차기 시작했다. 장갑으로 동여맨 손도 열이 나 간질간질했다. 모자, 장갑, 목도리 등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떼어내고 다시 뒤꿈치에 힘을 실었다. 20분쯤 올랐을까. 오랜만에 작동한 근육들로 아려오는 허벅지를 탈탈 털어내며 아래로 시선을 던졌다. 아찔했다. 소복한 나뭇잎이 시각적으로 안정감을 주는 숲길과 달리, 깎아지른 절벽에 머리가 띵했다. 고소공포증 환자들은 이 길은 피하는 게 좋겠다.

계단을 한참 오르니 좁다란 오솔길이 이어졌다. 중간 중간 낭떠러지에는 동아줄이 쳐져 있었다. 기분에 취해 소주 한잔 걸치고 비뚤비뚤 걷다간 사고 나기 십상이겠다. 나뭇가지 헤치며 흙길을 한참 걸으니 광활한 잔디밭이 펼쳐졌다. 황홀하게 어른거리는 주홍빛이 동이 질 때가 됐음을 알렸다. 저 멀리 오륙도를 바라보며 조금 더 걷자 이윽고 오륙도 해맞이 공원. 종점에 다다랐다.

이기대 해안길은 정신없이 바다로 빠져드는 길이었다. 걷는 내내 발 옆으로, 눈앞으로, 바위 사이로 바다가 너울거리거나 파도가 솟구쳤다. 부산에서 20년을 살았어도, 이토록 가까이 바다가 다가온 적이 없었다. 이토록 살아 펄떡이는 바다를 만난 적이 없었다. 3시간 동안 이기대를 보고, 듣고, 만지며 부산 바다의 역사를 새롭게 썼다. 웅웅, 걷는 내내 귓가에 따라붙던 파도소리가 벌써 그립다.

전설이 숨쉬는 겨울 바다 한번 보면 반할 낍니더~

오륙도 해맞이 공원에 다다르면, 오륙도가 손에 잡힐 듯 가까워진다.

[ Basic info. ]

☞ 교통편

버스 | 김해공항 출발 - 307번(좌석) 버스 승차 → (구)부산백화점 하차 → 131-1번(일반) 버스로 환승 → 용호동 하차(34.1km)

부산역 출발 - 134번(일반) 버스 승차 → 부산박물관 정류소 하차(9.9km)

노포동 종합버스터미널 출발 - 50번(일반) 버스 승차 → 동래전화국 하차 → 51-2번(일반) 버스로 환승 → 시립박물관 하차(거리 : 20.9km)

서부 시외버스터미널 출발 - 31번(일반) 버스 승차 → 개금사거리 하차 → 68번(일반) 버스로 환승 → 유엔 기념공원에서 하차

자동차 | 경부고속도로 → 번영로 대연램프 → 남구

☞ 코스

섶자리(이기대 입구) → 나무데크 길 → 동생말 → 어울마당 → 농바위 → 구리광산 → 공룡 발자국 → 오륙도 앞

문의 | 부산 남구청 문화관광과 051-607-4062



주간동아 2011.01.31 773호 (p24~27)

  • 이설 기자 snow@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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