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간동아 로고

  • Magazine dongA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CULTURE

그랬구나, 재벌의 생생한 안방

드라마 ‘욕망의 불꽃’ 시청자 열광…재벌의 욕망 소비와 시기 이중심리 작용

  • 이설 기자 snow@donga.com

그랬구나, 재벌의 생생한 안방

그랬구나, 재벌의 생생한 안방

‘욕망의 불꽃’의 두 여주인공인 윤나영(신은경·왼쪽)과 백인기(서우).

대서양그룹은 손꼽히는 재벌이다. 빈털터리에 꿈만 큰 김태진 회장이 단신으로 일궜다. 김 회장은 3형제를 뒀는데, 첫째와 둘째·셋째의 어머니가 다르다. 밖에서 데려온 아들딸도 여럿이다. 3형제는 김 회장이 쓰러지자 기다렸다는 듯 서로에게 칼을 겨눈다. 출신 성분이 좋지 않은 형제는 애초부터 싸움 대상에서 배제된다. 동생에게 밀린 장자는 “영감탱이 두고 보자”며 이를 갈고, 친정아버지 ‘백’ 믿고 나대는 며느리는 시아버지에게 악다구니를 한다. 막 20대에 접어든 3세들도 후계자감과 문제아를 구분 짓고 살벌한 신경전을 벌인다.

“말도 안 된다” 욕하면서도 훅 빠져든다. 최근 인기몰이 중인 MBC 주말드라마 ‘욕망의 불꽃’ 이야기다. 대서양그룹의 뒤틀린 가족사와 인물들의 욕망이 빚는 파국이 주 내용이다. 이 드라마는 폭력, 강간, 거짓임신, 형제간 이전투구 등 자극적인 요소로 시청자의 정신을 홀린다. 물론 ‘막장’ 도마에도 올랐다.

이 드라마 전에도 재벌은 대중문화의 단골 소재였다. 영국에 윌리엄 왕자, 미국에 패리스 힐턴이 있다면 한국에는 재벌이 있었다. 재벌은 같되 또 다른 세상이었고, 무한대의 재력과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성역(聖域)이었다. 돈, 권력, 섹스 3가지를 맘껏 버무릴 무대로도 제격이었다.

사회 권력 재벌 메커니즘 조명

하지만 그것을 다루는 방식은 마이너리티 정서가 대부분이었다. 재벌과 소시민 남녀의 이뤄지거나 이룰 수 없는 사랑, 못된 재벌과 착한 소시민 간의 갈등, 재벌이 되고 싶어 하는 소시민들의 욕망으로 이야기를 풀어냈다. ‘욕망의 불꽃’은 그런 의미에서 재벌에 접근하는 새로운 시도다. 대중문화 평론가 이문원 씨는 “가족사, 경영권 다툼 등 재벌가 내부를 본격 조명한 첫 드라마라는 점에서 신선함을 준다”라고 평가했다.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과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삶을 다룬 드라마가 있었다. 하지만 그 작품은 대상을 공표하고 시작한 탓에 오히려 이야기를 단편적으로 풀어냈다. ‘욕망의 불꽃’은 그런 점에서 자유롭다. 특정 그룹을 상정하지 않고 암시만 하기에, 냉정하고 노골적으로 내부 메커니즘을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이다.”

영역을 한 뼘 넓힌 재벌 드라마의 등장이 던지는 메시지는 뭘까. 광복 후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재벌은 여러 변화를 겪었다. 3세대를 거치며 그 수가 5배 이상 불었고, 재력을 넘어선 사회 권력으로 성장했으며, 매체환경 변화로 노출 빈도가 잦아졌다. 재벌들의 정보를 분석하는 ‘재벌닷컴’ 정선섭 대표는 “재벌이 많아지면서 소비할 거리도 풍부해진 것을 보여주는 예”라고 풀이했다.

“1·2세대 재벌은 그 수가 많지 않았다. 삶의 패턴도 단순했다. 지금은 아니다. 3·4세대 재벌은 그들끼리 ‘이너서클’만으로 충분히 사회생활이 가능할 만큼 많아졌고, 라이프스타일도 다양해졌다. 단순한 부자가 아닌 새로운 사회계층으로 성장하면서, 그들을 해석할 여지가 넓어진 것이다.”

이문원 씨의 분석도 비슷하다. 그는 “재벌 1세대는 화전민, 쌀가게, 소금가게 하던 사람들이라 2세대까지는 미국식 ‘명문가’ 느낌이 없었다. 하지만 그 시간이 축적돼 이제는 ‘왕자티’를 내게 됐고, 그런 면이 일반의 호기심을 자극한다”라고 설명했다.

삼성과 현대 비교하는 재미 쏠쏠

‘욕망의 불꽃’의 최대 미덕은 디테일이다. 이를테면 먼 친척 관계인 시어머니와 첫째 며느리의 대화가 이런 식으로 전개된다.

“우리 엄마가 김 회장을 언니(시어머니)에게 소개해줬잖아. 아니면 이렇게 사모님 소리 들었겠어, 친구들이랑 쑥찜이나 하러 다녔지.”

“무슨, 그때 김 회장 망하고 볼 게 있었니.”

남편 덕에 면천한 몇몇 사모의 이름이 머릿속을 스친다. 그 정도로 노골적이고 생생하다. 이렇듯 드라마를 보다 보면 여러 차례 기시감을 느낀다. 군데군데서 특정 재벌의 모습을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허구지만 실재를 조합한 논픽션에 가까운 드라마. 한국종합예술학교 이동연 교수는 “대부분 베일에 싸인 재벌가 이야기를 사실적으로 다룬 점에서 시청자들은 매력을 느낀다”라고 말했다.

“기존 재벌가의 이야기는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 삼성그룹 사건, 태광그룹 사건, 재벌 3세 스캔들 등 불가피한 상황에서 제한적으로 속살을 드러냈다. ‘욕망의 불꽃’은 재벌가의 이면을 토대로 만든 이야기다. 시청자들은 드라마라는 장르를 통해 궁금한 부분을 해소하는 쾌감을 얻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욕하면서도 재벌 이야기에 열광하는 것일까. 손석한 연세신경정신과 원장은 “자본주의 시대에 신분상승을 욕망하면서도 그들을 깎아내리는 드라마를 보면서 2중적인 쾌감을 느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선이 아닌 악으로 그려지는 재벌을 보면서 바꿀 수 없는 현실을 자위한다는 것. 이동연 교수는 “권력과 욕망이 선명하게 나타나는 재벌가 이야기에서 대리만족을 얻는다”라고 말했다. 왕권 다툼을 다룬 사극처럼, 동시대를 사는 이들의 권력 이야기에 자신의 욕망을 투영한다는 설명이다.

이리저리 꼬인 드라마를 두고 우리는 ‘막장’이라 손가락질한다. 하지만 실제 삶은 핑크빛보다 잿빛에 가깝다. 막장은 경찰서가 아닌 세상 도처에 널려 있다. 권력층의 삶은 수천 년간 비슷한 정도로 부패하고 방만한 패턴을 이어왔으니, 재벌가의 삶은 더 그럴지 모른다. 하지만 재벌가 내부에서 충돌하는 욕망들을 날것으로 그릴 일만은 아니다. 드라마는 현실을 반영하지만 동시에 현실에 영향을 주기 때문. 이문원 씨는 “‘대부’가 마피아를 로마제국 왕조처럼 그린 이후 마피아 사회가 바뀌었다. 문제의식을 갖고 재벌가를 비판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드라마와 현실 사이

왕자의 난…왕따 며느리 닮았네


그랬구나, 재벌의 생생한 안방
저돌적인 카리스마로 유명한 모 회장, 경영권을 둘러싼 형제간 이전투구, 다른 며느리들에게 따돌림당한 평범한 며느리…. 이리저리 뒤섞어 ‘표적수사’ 의혹에서 비껴났지만, ‘욕망의 불꽃’에는 특정 그룹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 수두룩하다. 최근 현대그룹과 현대차가 벌인 현대건설 인수전쟁을 보면, 실제는 드라마보다 더하다는 생각도 든다. 드라마 속 재벌과 현실은 얼마나 같고 다를까. 대기업 관련 정보를 분석하는 ‘재벌닷컴’ 정선섭 대표의 도움으로 ‘욕망의 불꽃’의 허와 실을 짚어봤다.

#SCENE 1

철공소집 둘째딸 윤나영(신은경 분)의 꿈은 부잣집 며느리가 되는 것. 대학도 팽개치고 버스회사 경리로 일하며 사장 아들과 연애하지만 실패. 비상한 잔머리와 각고의 노력 끝에 대서양그룹 셋째 며느리로 입성한다. 하지만 집안 식구들은 철공소집 딸이라는 이유로 그를 은근히 무시한다. 한편 둘째 며느리 남애리는 정계에서 영향력 있는 아버지를 믿고 그룹 일에 건건이 훈수를 놓으며 차기를 노린다.

→대가족인 A그룹은 며느리의 면면도 다양하다. 평범한 집안에서 나고 자란 며느리도 있고, 경리 출신에 두뇌회전 빠르다는 평을 받는 며느리도 있다. 먼저 평범한 집안 출신의 B씨는 소박하고 조용한 내조로 좋은 평을 받았으나 남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고, 상당 시간이 흘렀음에도 남편 C회장은 아내가 없는 허전함을 달래며 일에만 몰두하고 있다고 한다. 과거 A그룹에서 경리로 일하던 D씨는 아버지 회사에 놀러 간 E회장에게 ‘찜’당해 결혼에 골인했다. 이렇듯 윤나영의 캐릭터는 여러 며느리의 특징을 혼합한 것으로 보인다. 남애리는 남편이 죽은 뒤 경영권을 지켜낸 F회장을 떠올리게 한다.

#SCENE 2

대서양그룹 3형제는 김태진 회장(이순재 분)이 노환으로 쓰러지자 곧장 경영권 승계다툼 모드에 들어간다. 다소 투박하지만 능구렁이 같은 첫째, 냉철하지만 고집 센 둘째, 지적이고 유약한 성격의 셋째. 현재로선 둘째의 입지가 가장 단단하지만 김 회장은 내심 똑똑하고 합리적인 셋째를 염두에 두고 있다. 3형제 내외는 아버지에게 “영감, 노망난 노인네”라고 악담하며 1인자가 되기 위해 발악한다.

→‘왕자의 난’에서 자유로운 재벌은 없다. 기업은 비민주적 조직이다. 1인자가 아닌 다른 모두는 비운의 왕자로 남게 된다. 특히 장자 승계를 하지 않거나 이복형제들이 맞서면 100% 다툼이 생긴다. 친형제라도 가신들이 싸움을 일으키게 돼 있다. 인사전쟁, 지분전쟁, 검찰 고발 등 전면 전쟁을 벌인다. G그룹은 1년 넘게 그룹 경영권을 두고 싸웠고, H그룹은 그런 다툼 끝에 당사자의 자살이라는 비극을 낳았다.




주간동아 2010.11.08 761호 (p68~69)

이설 기자 snow@donga.com
다른호 더보기 목록 닫기
1218

제 1218호

2019.12.13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