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49

2010.08.09

우향우 집단기억의 상징 ‘야스쿠니 신사’

8·15 때마다 고위 정치인들 참배 논란…전몰자에 초점 맞추면 전쟁 정당화

  • 안병직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ahnbj@snu.ac.kr

    입력2010-08-09 15: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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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월 15일은 한국과 일본 모두 기리지만 그 의미는 극히 대조적인 기념일이다. 한국의 8·15 광복절(光復節)은 암흑에서 다시 빛을 찾는다는 표현 그대로 큰 국경일 가운데 하나다. 반면 일본에게 이날은 장장 15년에 걸친 아시아·태평양 전쟁에서 마침내 무릎을 꿇고 승전국 미군의 점령지로 전락한 쓰라린 역사를 기념하는 날이다.

    그런데 패전기념일 8월 15일이 돌아오면 일본 국내외의 시선이 쏠리는 곳이 있다. 야스쿠니(靖國) 신사가 바로 그곳이다. 야스쿠니 신사는 200만 명이 훨씬 넘는 전몰장병의 위령 신사로서 지난 세기 일본 군국주의 세력이 도발한 전쟁에 대한 일본 사회의 집단기억에서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특히 총리를 비롯한 일본 고위 정치가들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는 국제적으로 심각한 논란과 갈등의 대상이 돼왔다.

    야스쿠니 신사의 기원은 17세기 이래 지속된 쇼군의 막부체제가 무너지고 천황친정체제가 확립된 1860년대 말 메이지유신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867년 반(反)막부 반란을 승리로 이끈 존왕(尊王) 세력은 내란기에 전사한 반란 병사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도쿄 천황 궁 인근에 초혼사(招魂社)를 건립했다. 초혼사의 창건은 정교일치를 추구하며 신도(神道)를 국교로 부활시킨 유신정부가 망자의 위령을 중시하던 종교적 전통을 국가에 대한 충성과 국민 통합에 동원하고자 한 시도였다.

    초혼사의 발전 과정은 그것이 메이지정부와 얼마나 깊은 관련성을 지녔는지 잘 보여준다. 초혼사는 1872년부터 육군성과 해군성이 관장했으며, 1874년부터는 천황이 초혼사의 위령제례에 참석했다. 그리고 1875년에는 각 지방 신사에 분산 봉안됐던 전사자 영혼을 모두 도쿄의 초혼사에 합사했다. 이후 1879년 도쿄 초혼사는 야스쿠니 신사로 개칭했다. ‘평화로운 나라(靖國)’라는 새로운 이름은 봉안된 영혼들의 공적으로 국가가 평화와 안전을 누린다는 뜻이다.

    천황제 국가 위해 전사한 병사 기리려 건립



    야스쿠니 신사는 출발부터 국가권력과 밀접하게 관련된 기구였지만 메이지정부 초기에는 군국주의의 상징이라는 후대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19세기 말까지 이곳은 도쿄 시내 일급 광장이자 집회 장소였다. 시민들이 보고 즐기는 제례의식이 계절마다 거행됐고, 스모와 경마 등 각종 행사가 펼쳐졌으며, 특히 1872년에는 프랑스 서커스단의 공연도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말 청일전쟁을 시작으로 일본이 제국주의 전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면서 양상이 달라졌다. 내란이 아니라 대외전쟁의 전사자들이 제신(祭神)으로 봉안됨에 따라 내셔널리즘 요소가 강화됐으며, 근대 천황제 국가를 수호하는 군신(軍神)의 신사라는 군사적 성격이 부각됐다. 특히 1930년대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을 계기로 군부가 권력을 장악하면서 망자의 위령과 추모보다는 국가의식 고취가 신사의 주 기능이 됐다. 전장에 나가 전사하는 것이야말로 국민으로서 최고의 도덕적 행위이며, 순국 후 이른바 ‘호국 영령’으로 추앙돼 야스쿠니에 안치되는 것이 최고의 명예라는 선전·선동이 신문, 방송, 영화, 연극, 노래 등 온갖 미디어를 통해 공공연히 전개됐다.

    국민총동원체제가 발동한 1938년부터는 전몰자 합사제례 시 묵념이 전 국민의 의무가 됐고, 유족 배려의 일환으로 신사참배를 위한 철도 무임 혹은 할인 승차제가 도입됐다. 또 이때에 이르러 망자의 신앙이나 유가족의 의사를 고려하지 않은 신사 봉안에 대한 불교나 기독교 측의 비판과 반발도 사라졌다. 아울러 지방에 있는 초혼사 가운데 현(懸) 단위당 하나씩을 선별해 호국(護國)신사로 개칭하고, 이들로써 야스쿠니 신사를 정점으로 한 계서제(階序制) 조직을 구성했다.

    우향우 집단기억의 상징 ‘야스쿠니 신사’

    일본군의 약점을 간파해 ‘개구리 뛰기 전술’이라는 역발상 전법으로 태평양전쟁을 승리로 이끈 맥아더(오른쪽에서 두 번째).

    이처럼 야스쿠니 신사는 천황, 군과 깊이 결부됐으며 국가가 후원하는 종교단체의 최상위 기구였기에 1945년 패전과 전후 개혁으로 일대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종전 후 야스쿠니 신사는 점령군 미군이 주도하는 탈(脫)군국주의, 민주화 개혁의 주 표적이었다. 연합국총사령부는 포고령을 통해 정교분리 원칙을 선포하고 야스쿠니 신사에 대한 국가의 지원을 금지했다. 국가의 후원을 받기 위해 비종교 시설로 전환하는 문제가 논의됐으나, 선택은 종교법인으로 존속하는 길이었다. 종교시설로서 야스쿠니는 종전 후에도 전몰자들의 합사의례를 수행하는 기능을 계속했지만 영령숭배가 아니라 순수한 위령이 목적이었다.

    이러한 변화는 물론 군사적 선전활동을 금지한 점령군의 강요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종전 후 대두한 반전 평화 이념의 영향 아래 자체적으로 개혁에 호응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1946년 야스쿠니 신사는 신사규칙을 제정하면서 ‘유족’과 ‘평화’를 존립의 목적으로 천명했다. 이에 따라 과거와 달리 합사제례 시 유족의 참관이 허용됐으며, 합사 기준도 전사 군인 외 전몰 군속과 간호사 등으로 확대됐다. 전후 평화주의에 부응하려는 야스쿠니 신사의 변화는 외부 인식에도 반영됐다. 1950년대 초 사회당이나 노동조합 등 진보정당과 사회단체가 야스쿠니 경내에서 집회를 개최할 정도였다.

    그러나 야스쿠니 신사의 변신에는 한계가 있었다. 1960년대에 접어들자 전몰자 합사에 필요한 조사와 비용 때문에 국가 후원 문제가 다시 거론되기 시작했다. 야스쿠니 신사에 대한 국가 후원은 정교분리를 규정한 헌법 조항에 따라 위헌 소지가 있어 민간모금운동이 전개됐으나 큰 성과가 없었다. 또 야스쿠니 신사와는 별도의 국립 전몰자 추도시설의 건립이 추진됐으나 야스쿠니를 대체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전몰자 유족단체와 집권 자민당 등 보수 세력이 중심이 돼 야스쿠니 신사에 대한 국가 후원을 입법화하려는 시도가 나타났다. ‘야스쿠니 신사 법안’을 두고 1960년대 말에서 70년대 중엽까지 의회 안팎에서 치열한 찬반 공방이 벌어졌지만 법안 제정은 결국 무산됐다. 그러나 야스쿠니를 둘러싼 논란과 갈등은 끝나지 않았다.

    1960년대 이후 보수화 바람…내셔널리즘 중심

    야스쿠니 신사 국가지원법안 운동이 좌절되자 패전기념일인 8월 15일에 맞춰 천황과 총리의 공식 참배를 시행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총리의 공식 신사참배에 대해 국내외에서 소송과 항의가 빗발쳤지만 1970년대 중엽부터 80년대 중엽에 이르기까지 역대 일본 정부는 대부분 이를 강행했다. 이후 총리의 신사참배는 한동안 중단됐다가 90년대 중엽 하시모토, 2000년 이후 고이즈미 총리가 개인 자격으로 혹은 8월 15일을 피해 참배하는 등의 편법을 동원해 명맥을 이어왔다.

    전후 잠시 평화주의 이념을 표방한 야스쿠니 신사가 1960년대 이후 다시 내셔널리즘 경향을 띠며 갈등과 대립의 중심에 서게 된 데는 아시아·태평양 전쟁 전몰자에 대한 기억의 문제가 깔려 있다. 보수화 경향이 뚜렷했던 1960년대 이후 일본사회에는 유족을 중심으로 전몰자를 새롭게 추모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즉 잘못된 전쟁에 동원돼 무의미하게 죽은 희생자가 아니라 국가와 민족을 위해 값진 희생을 치른 순국자로 기억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망자의 죽음에 특별한 의미를 두려는 것이 비단 유족뿐 아니라 망자를 추모하는 이들에게는 인지상정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전쟁에 대한 기억이 전쟁 자체가 아니라 전몰자에 초점을 맞출 경우 결국 전쟁을 정당화하고 미화할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보면, 야스쿠니 신사 문제는 과거를 ‘역사’의 비판적 ‘이성’이 아니라 ‘집단기억’의 무비판적 ‘정서’로 접근할 경우 불가피하게 부딪히는 폐해를 보여주는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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