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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의 삶과 수행⑤ | 조계종 원로회의 의장 혜광종산(慧光宗山) 대종사

“세수하다 코 만지듯 ‘도’는 쉬운 것”

수십 년 정진하며 주요 선원 ‘입승’ 맡아… 조계종 법계 정리에도 큰 공헌

  • 유철주 불교 전문 자유기고가 jayu@buddhism.or.kr

“세수하다 코 만지듯 ‘도’는 쉬운 것”

“세수하다 코 만지듯 ‘도’는 쉬운 것”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은 대자대비(大慈大悲)의 마음으로 중생을 구제하고 제도하는 보살이다. 그래서 많은 불자가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을 염송하며 기도하곤 한다. 그만큼 관세음보살은 대중 가까이에 있다.

2004년부터 조계종 최고의결기구인 원로회의를 이끄는 혜광종산(慧光宗山) 대종사를 친견하러 아침 일찍 서울을 나섰다. 종산 스님은 청주 보살사에서 30여 년 전부터 주석하고 있다. 보살사(菩薩寺)라는 명칭은 관세음보살에서 따왔다. 보살사가 있는 산 이름 또한 관세음보살이 있다고 전해지는 보타낙가산이다.

보살사는 아담하다. 극락전과 명부전, 요사채가 전부다. 그래도 염불 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종산 스님은 87세로 다리가 조금 불편하지만 항상 또렷한 말씀과 생기 있는 표정으로 스님과 불자들을 만난다. 종산 스님은 1949년 고암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沙彌戒)를, 1954년 동산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 스님의 출가 인연이 궁금합니다.

“나라가 어렵던 시절 부모님을 잘 만나서 넉넉한 생활을 하며 의과대학에 다녔습니다. 대학시절 형제처럼 지내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폐병에 걸려 그만 세상을 일찍 떠났습니다. 마음이 많이 아팠고 힘들었습니다. 49재를 지내려고 강진 만덕선원에 갔는데 그곳에는 동산 스님과 전강 스님, 선월 스님, 도천 스님 등이 함께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전각에서 들려오는 스님들의 염불 소리가 천상의 소리처럼 아름다웠습니다. 마음이 정말 편해졌습니다. 마치 염불 소리에 제가 미친 것 같았습니다. 나중에 은사로 모신 도광 스님도 거기서 만났습니다. 도광 스님을 친견한 뒤 출가가 나의 길이라는 예감이 들었고, 그것이 불연(佛緣)의 시작이었습니다. 친구 49재 때문에 찾은 절에서 육신을 치료하는 의사보다 마음을 다스리는 불제자가 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의사가 되기를 원했던 부모의 상심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스님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은사인 도광 스님은 어떤 분이었나요?

“도광 스님은 용성 스님의 손상좌였습니다. 전쟁 전까지 금강산 마하연에서 정진하셨고, 전쟁이 일어나자 범어사로 내려와 원주(院主)로서 살림을 챙겼습니다. 탁발(托鉢)해서 100명이 넘는 대중을 먹여 살렸습니다. 또 도광 스님은 행(行)으로 도(道)를 닦으셨습니다. 도광 스님의 행(行)과 언(言) 하나하나가 인천지사(人天志師) 자체였습니다. 도광 스님의 수행은 성철 스님도 인정해 직접 해인사 주지로 도광 스님을 추전했을 정도입니다. 동산 스님도 도광 스님에게 범어사 주지를 맡기셨습니다. 저의 수행 역시 도광 스님의 영향이 컸습니다. 도광 스님은 율(律)을 이해하는 것에 그친 게 아니라 먼저 행하신 분입니다. 스님께서는 출타하실 때 늘 바랑을 메셨습니다. 하루는 제가 바랑에 무엇이 있느냐고 여쭈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손전등과 세면도구, 가사, 장삼, 우비를 가지고 다닌다며 바랑을 보여주셨습니다. 밤이 늦어 절에 돌아오지 못하면 다른 절에 가서 신세를 져야 하니 꼭 필요한 것을 늘 가지고 다니신 것입니다. 또 어디서든 어른 스님에게 예를 갖추기 위해 가사와 장삼도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도광 스님은 이렇게 말이나 글보다 몸으로 먼저 실천하신 분입니다.”

▼혜광(慧光)이라는 법호를 금봉 스님에게서 받으셨지요.

“제방선원에 있다가 금봉 스님이 해인사에 계신다고 해서 그곳으로 갔습니다. 당시 해인사는 금봉 스님이 조실, 청담 스님이 주지로 계셨습니다. 1958년 어느 날, 얼마 전 입적한 법정 스님이 선원에 와서 조실 스님께서 찾으신다고 하더군요. 조실 스님은 저를 보시더니 ‘어디에서 왔느냐?’고 물으셔서 ‘선방에서 왔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금봉 스님은 ‘선(禪)! 선(禪)! 어떤 것이 선이냐?’고 외치더니 염주를 들어 보이셨습니다. 저는 ‘진심(眞心)이 선입니다’고 했습니다. 금봉 스님은 몇 가지 화두를 더 물으셨고, 저는 즉시 대답했습니다. 한참 대화를 했는데, 금봉 스님이 나중에 제게 ‘보장록’을 주시면서 ‘혜광(慧光)’이라는 법호를 내리셨습니다.”

금봉 스님은 근대 한국불교를 이끈 선사(禪師) 중 한 분으로 해인사 계곡에서 좌탈입망(座脫立亡) 했다. 스님은 생전에 “어렸을 때부터 생선을 많이 먹어, 죽을 때는 내 몸을 물고기에게 보시하겠다”는 말씀을 여러 차례 했다고 한다. 가볍게 넘길 수 있는 말이지만, 평소 말씀을 그대로 실천한 것이다.

▼스님이 공부하신 화두는 무엇입니까?

“‘여하시부모미생전 본래면목(如何是父母未生前 本來面目)’, 즉 ‘부모에게 나기 전에 어떤 것이 참나인가?’라는 화두를 챙깁니다. 이 화두는 중국의 위산영우 선사와 제자 향엄지한 선사 사이에서 벌어진 선문답에서 유래합니다. 하루는 위산 선사가 향엄에게 묻기를, 남에게 듣거나 경전에서 읽은 지식이 아닌, 그대가 태어나기 이전의 본래 모습이 무엇이냐고 했습니다. 향엄은 모든 지식을 동원해 답하려 했으나 할 수 없었습니다. 좌절한 향엄은 스승의 결을 떠나 초막에서 이 화두와 씨름했는데, 어느 날 기와조각이 대나무에 부딪히는 소리에 크게 깨칩니다.

“깨닫고자 하는 마음 있으면 모든 것이 즐거움”

“세수하다 코 만지듯 ‘도’는 쉬운 것”

1955년 동산 스님(가운데)을 모시고 목포 정혜원에서 보살계를 받던 모습. 맨 앞 안경을 쓴 이가 종산 스님이다.

화두는 ‘참나’를 찾아가는 길의 첫머리입니다. 그래서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합니다. 요즘 스님들 화두 공부 제대로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화두는 꼭 오랜 기간 정진을 해온 선지식에게 받아야 합니다. 정진을 계속해 화두의 맛을 느낀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화두를 준 스님들도 후학을 점검해줄 수 있습니다. 깨닫겠다는 마음만 있으면 공부가 안 될 리 없습니다. 깨닫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면 어떤 것도 고통이 아니라 즐거움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도(道)는 세수하다 코를 만지는 것보다 쉬운 것이라고 조사 스님들은 말씀하셨습니다.”

▼ 스님께서는 수십 년간 제방에서 정진하셨습니다. 많은 수행 일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대흥사, 만덕사, 보광사, 해인사, 범어사, 통도사 극락암, 동화사, 용주사, 천축사 무문관, 망월사 등의 선원에서 공부하며 전강 스님, 동산 스님, 금봉 스님, 경봉 스님, 춘성 스님 회상에서 지도를 받았습니다. 훌륭한 선지식을 만날 수 있었던 것 자체가 큰 영광이었습니다. 여러 선원에서 입승(立繩·선원에서 반장 노릇을 하며 기강을 세우는 일을 하는 스님) 소임도 보았습니다. 통도사 극락암에서 입승을 볼 때였습니다. 안거 해제를 일주일 앞두고 경봉 스님이 저를 부르더니 해제 법문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고는 선방에 가서 대중에게 ‘이번 해제 법문은 입승인 종산 스님이 할 것이니 공부하면서 생긴 의문은 그에게 물어보라’고 하시고 나가버리셨습니다. 저는 못한다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지만, 뜻을 바꾸시지 않아 어쩔 수 없이 해제 법문을 했습니다.”

스님은 범어사 동산 스님 회상에서 있었던 일도 회고했다. 몇몇 도반과 마주 보고 정진하면서 상대가 졸면 죽비로 경책하기로 했는데 생각과 달리 정진보다 때리는 것에 생각이 팔렸다. 그래서 대중이 의논해, 판때기에 못을 1cm 정도 박아 각자 이마 앞에 두고 정진하기로 했다. 앉아 있다가 졸면 못에 이마가 찍히기 때문에 수행에만 집중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날 마주 앉은 스님이 피를 흘리는 걸 보고 스님은 대신심(大信心), 대분심(大忿心), 대의심(大疑心)을 일으켰다.

“저렇게 상대 스님은 피를 흘리면서 정진하는데 나도 더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때는 정말 어느 조실 스님이 지도해주신 것 못지않은 성과를 봤습니다. 법문을 듣고 책을 보는 것보다 피 흘리는 모습을 보고는 티끌만큼의 허튼 생각도 할 수 없었습니다.”

▼ 스님께서는 많은 체험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공부를 하면서 세 번의 체험이 있었습니다. 방금 말씀드린 범어사에서 정진하면서 ‘편안함’을 느낀 적이 있습니다. 그때 세상에는 나보다 못난 사람이 없었습니다.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두 번째는 태고사에서였습니다. 장좌불와는 물론 용맹정진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범어사에서보다 몸과 마음이 더 편안해졌습니다. 천축사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공부를 했더니 세 번째 경험이 왔습니다. 정말 ‘크게 편안’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 참선 공부가 어렵다고 합니다.

“어려운 것은 없습니다. 방법을 잘 알아야 합니다. 화두를 받고 선원에 앉아 있다고 해서 저절로 공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대신심, 대분심, 대의심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알면 쉽고, 하면 할수록 편안함 속에서 행복과 자유를 느낄 수 있습니다. 화두를 받았을 때는 굶은 고양이가 쥐를 잡듯, 노모가 집 나간 외아들을 찾듯, 알을 품은 닭이 병아리를 기다리듯, 그렇게 공부하면 됩니다.”

스님은 지난 2007년 재가자가 마음 놓고 공부할 수 있게 보살사 근처에 공간을 마련해 직지보림선원(直指寶林禪院)을 열었다. 언제든 와서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정진할 수 있도록 선원의 문을 열어놓고 있다. 스님은 계율에도 철저하다. 젊은 시절 일화를 보면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해인사로 금봉 스님을 만나러 갈 때의 일이다. 아침 공양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대구까지 왔다.

“때가 지났는지 배가 고팠습니다. 그래서 칼국숫집을 찾다가 음식점 골목에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불고기 냄새’가 코를 자극하는 것이었습니다. 평생 율문(律文)을 제대로 보지는 않았어도 계율을 지키려는 마음으로 살았는데 그날따라 그 냄새가 얼마나 좋던지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세수하다 코 만지듯 ‘도’는 쉬운 것”

1 직지보림선원 전경. 2 자리를 같이한 원로회의 의원들의 모습. 3 원로회의 의장으로 회의를 주재하는 종산 스님.



스님은 그 자리에 서서 자문자답(自問自答)했다.

“평소 네가 그런 생각을 일으키지 않고 정진했는데 오늘따라 고기 냄새가 좋으냐. 만약 고기를 준다면 먹겠느냐?”

“….”

내면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안 먹겠다는 소리가 나오지 않은 것이다. 먹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래서 다시 묻고 또 물었다. 스님은 그렇게 몇 번의 자문자답 뒤에야 ‘불고기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었다. 스님은 해인사에 도착하자마자 밤새 참회했다.

▼ 1999년 원로의원 선출, 2004년 원로의장으로 추대되셨습니다. 원로회의를 이끌면서 느낀 점이라면.

“산중에 살며 계정혜 삼학(三學)을 지키면서 사는 것이 저의 본분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종단의 어떤 소임도 맡지 않고 조용히 수행만 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중생과 출가수행자는 자신이 처한 현실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출가수행자는 내적으로는 깨달음을 구하는 것과 함께 밖으로는 중생을 교화하는 포교자, 전법자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이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원로회의 의장에 나선 것은 몇 번 고사에도 동료 원로회의 의원 스님들과 도반 스님들, 종단의 소임자 스님들이 종단을 위해 직접 나서야 한다고 요청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시간 고민을 했고, 의장을 맡은 후로는 종단의 위계질서를 세워 승풍을 진작시키고 건강한 종단을 만드는 데 힘을 보태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종산 스님은 2004년 5월 원로의장을 맡자마자 조계종의 법계(法階)를 정립했다. 종정 법전 대종사를 비롯한 모든 원로의원 스님에게 대종사(大宗師) 법계를 품서해 승가의 위의(威儀)를 확립한 것이다.

오전에 시작한 인터뷰가 점심시간을 훌쩍 넘겨 계속됐다. 스님은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다며 다시 운을 뗐다.

재가자 위한 직지보림선원 문 활짝

“조계종은 한국불교의 정통 종단입니다. 그런데 요즘 들어 유사한 이름을 가진 종단이 수십 개에 이르렀습니다. 조계종이라는 이름을 가진 종단의 스님들이 공부도 하지 않고 제멋대로 생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로잡아야 합니다. 이렇게 된 것은 우리 종단 스님들이 잘 살지 못한 데에도 책임이 있습니다. 이럴수록 좀 더 열심히 정진하면서 국민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종단의 대종사이자 사회의 원로로서 스님은 불교 안팎의 여러 문제에 대한 생각을 거침없이 피력했다. 관음실을 나와 낙가산을 다시 보니, 여름의 신록이 더 짙어 보인다. 관세음보살이 중생의 아픔을 보듬었듯이 종산 스님 역시 불자와 국민의 마음이 더 편안해지기를 바라며 자비의 미소를 전하고 있다.

보살사 창건 설화

의신 스님이 만난 관세음보살 “나 이곳에 늘 머무를 것”


“세수하다 코 만지듯 ‘도’는 쉬운 것”

보살사 전경.

보은 법주사를 창건했던 의신조사(義信祖師)는 중생을 교화할 새로운 도량을 찾고자 했다. 그래서 지극한 마음으로 기도를 시작했는데 마침내 회향을 앞둔 어느 날 기도하던 중 비몽사몽 간에 선인(仙人)이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선인은 “그대의 기도가 지극하니, 좋은 인연이 있을 것이다. 지금 대문을 나가보면 한 노파가 있을 테니 가서 물어보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선인의 말에 놀란 의신 스님이 밖으로 나가보니 실제로 한 노파가 가고 있었다. 스님은 노파를 부르며 쫓아갔지만 노파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계속 걸어갔다. 한참 후 멈춰 선 노파에게 다가가 얼굴을 보니 관세음보살이었다.

깜짝 놀란 의신 스님은 환희에 젖어 무릎을 꿇고 예배하며 새로운 도량을 일러달라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관세음보살은 “그대가 찾는 성지가 바로 이곳”이라고 일러주었다. 의신 스님은 어렵게 친견한 관세음보살이 발길을 돌리려 하자 조바심에 “보살님께서는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물었다. 관세음보살은 스님의 마음을 아는 듯 “나 또한 이곳에 늘 머무르고 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에 의신 스님은 그 자리에 절을 짓고 관세음보살이 일러준 곳이라 하여 ‘보살사’라 이름 짓고, 산은 관세음보살이 늘 머무르는 곳이라 해서 ‘보타낙가산’이라 불렀다. 이때가 신라 진흥왕 28년(567)이다. 우리나라에서 낙가산은 단 두 곳뿐이다. 기도 성지로 유명한 강화 보문사가 있는 산과 보살사가 자리한 산이 그곳이다. 두 사찰은 전국에서 기도하러 오는 불자로 항상 붐빈다.




주간동아 2010.08.09 749호 (p5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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