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48

2010.08.02

샤넬 사모님은 희대의 사기꾼

5성급 호텔에 장기 투숙 청와대 비밀요원 사칭 … 뜯어낸 돈으로 호화생활

  • 박혜림 기자 yiyi@donga.com

    입력2010-08-02 13: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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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샤넬 사모님은 희대의 사기꾼

    김씨와 아들이 거주한 분당의 330m2 남짓한 고급 주택.

    “샤넬 사모님이 떴다!”

    “손가락 위에서 번쩍거리는 저 다이아몬드 좀 봐.”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에 자리한 5성급 호텔의 A동. 지난 2월부터 수개월 동안 특실에 투숙한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A동의 유명인사로 호텔 직원들 사이에서는 ‘샤넬 사모님’으로 통했다. 모자에서부터 재킷, 부츠, 가방 등에 이르기까지 온몸을 명품 브랜드 샤넬 제품으로 치장하고 다녔기 때문이다.

    통통한 체격에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성은 다른 사람의 눈에 띄는 패션 스타일을 선호했다. 그가 주로 착용한 패션 소품은 챙이 큰 모자와 무릎까지 오는 롱부츠였다. 모자는 고급 부티크 제품으로 큰 꽃 모양의 코르사주와 리본이 정교하게 달린 것이 특징. 검정, 분홍, 노랑 등 색상만 다른 비슷한 디자인의 모자가 수십 점에 이를 정도였다. 부츠 역시 튀긴 매한가지였다. 빨강, 하양 등 평범하지 않은 색상에 샤넬의 로고가 커다랗게 박혀 있거나 역시 명품 브랜드 루이비통의 고유 프린트로 만든 부츠를 즐겨 신었다. 액세서리와 화장도 과할 정도로 화려했다. 굵은 다이아몬드 반지에 형형색색 보석이 박힌 팔찌, 귀고리, 목걸이 등을 착용했고 화장은 짙은 편이라 무서운 인상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명품으로 치장 … 현금으로 숙박비 계산



    그가 묵은 객실 옷장에는 비슷한 모피 코트가 여러 벌, 같은 디자인의 명품 브랜드 재킷과 블라우스도 수두룩했다. 평균 수백만 원대의 루이비통 가방이 수납공간에 다 들어가지 않을 만큼 많았다. 널찍한 화장대에는 샤넬 화장품이 종류별로 빼곡히 놓여 있었다. 그는 사소한 담요, 슬리퍼까지 샤넬이나 루이비통 제품을 사용하는 진정한 명품 마니아였다.

    물 한 모금도 허투루 마시지 않았다. 일본의 빙하수로 만든다는 고급 생수만 골라 마셨다. 늘 데리고 다니던 애완견은 티베트 왕실에서 키웠다는 라사압소 종으로 닭가슴살과 고급 참치를 먹이며 애지중지 키웠다.

    샤넬 사모님은 아리송한 존재였다. 객실 안 책상 위에는 일본, 미국 등 외국에서 사온 듯한 과자와 잡지가 쌓여 있어 국내외를 오가는 일에 종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또 명문사립대 소식지와 학교 로고가 찍힌 수건이 놓여 있고, 늘 우아한 말투로 직원들을 대했기 때문에 ‘배운 여성’으로 인식됐다.

    그가 쓴 특실은 비과세 기준으로 1일 28만 원 정도. 주로 한 달치 숙박료를 현금으로 계산했는데 직원을 따로 불러 객실문 틈 사이로 돈을 전달하는 경우가 많아 직원들이 당혹스러워했다고 한다.

    샤넬 사모님으로 불린 이 여성은 7월 17일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에 의해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사기 혐의로 구속된 김모(59) 씨다. 경찰에 따르면 김씨는 아들 이모(35) 씨가 세 들어 살던 경기도 분당 고급 주택의 집주인 지모(41·무역업) 씨에게 청와대 비밀요원을 사칭해 1년 동안 10회에 걸쳐 약 8억4000만 원을 가로챘다.

    샤넬 사모님은 희대의 사기꾼

    김씨가 머문 호텔 특실 안. 명품 가방, 고급 모자와 모피코트가 명품 매장을 방불케 한다.

    김씨는 “나는 전직 대통령이나 일제가 지하에 숨겨놓은 재산을 국고로 귀속하는 일을 한 후, 찾아낸 금액의 15% 상당의 수수료를 받고 있다. 당신이 운반 경비를 투자하면 2~3개월 안에 투자액의 2배를 돌려주겠다”며 지씨를 유혹했다. 사실 김씨는 지방 고등학교를 중퇴한 평범한 여성이다. 지씨는 어떻게 김씨의 사기에 휘말리게 됐을까.

    피해자 지씨가 김씨를 만난 것은 2005년 9월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세입자였던 김씨는 330m2 남짓한 규모의 집을 계약하면서 총 계약기간인 2년치 월세 1억2000만 원을 현금으로 건넸다. 다이아몬드 반지와 명품 시계, 가방으로 치장한 김씨는 영어로 만든 가짜 이름을 말하며 “나는 프랑스 국적의 한국인으로 경제학 박사”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차분하고 우아하게 말하는 그는 학식 있는 재력가로 보였다. 김씨는 자신은 한국 국적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아들의 이름으로 집을 계약했다.

    본격적인 사기 행각은 임대차 계약이 끝난 뒤인 2007년 10월부터 시작됐다. 지씨가 재계약 여부를 묻자 김씨는 지씨를 집으로 불러 청와대 문양이 새겨진 보자기에서 인삼을 꺼내 대접하고, 청와대 경호실 로고가 박힌 넥타이핀 등을 선물했다. 자신은 명문사립대 운영위원이자 조부모에게서 3조 원가량의 재산을 상속받은 자산가라고 말하며 다시 한 번 학식 있는 재력가임을 강조했다. 이어 지씨에게 위조수표 뭉치, 금괴가 촬영된 동영상 등을 보여주며 투자를 권유했다.

    김씨는 자연스럽고 치밀했다. 그는 지씨가 2008년 10월까지 현금으로 투자액을 10차례 건네는 동안 스위스은행에서 발행된 백금증명서(위조), 1kg의 골드바 등을 보여주며 피해자를 안심시켰고, 일본인 동원경비는 ‘JPN# 비용’으로, 1억 원은 ‘one eight’로 지칭하는 등 특수 용어를 사용해 자신이 특수 임무를 수행하는 것처럼 꾸몄다.

    체포 순간에도 모자와 부츠 골라

    무엇보다 김씨의 사치스러운 생활과 우아한 말투가 지씨의 의심을 잠재웠다. 김씨가 살던 분당 집은 화려한 문양과 튀는 디자인의 수입 가구로 채워져 있었고, 아들은 특별한 일거리가 없음에도 고급 승용차와 오토바이를 소유하고 있었다. 김씨는 지씨와 만날 때 분당의 고급 이탈리아 레스토랑이나 일식집에서 약속을 잡기도 했다.

    투자금은 반드시 현금으로 요구했고, 커다란 샤넬 가방을 가져와 자연스럽게 돈을 쓸어 담았다. 김씨는 지씨와 차를 타고 가다가 다른 사람의 집을 가리키며 전직 대통령이 거주하는 안가라고 귀띔하기도 했다.

    김씨 특유의 우아한 말투와 당당한 태도는 사기 혐의로 체포된 뒤에도 여전했다. 그는 경찰이 호텔에 들이닥쳐 긴급 체포하는 순간에도 모자와 부츠를 고심해서 고를 정도로 여유만만했다. 심지어 경찰 조사 내내 모자를 한 차례도 벗지 않았고, 자신보다 애완견의 거취를 더 걱정해 경찰이 혀를 내둘렀다는 후문이다.

    김씨는 피해자 지씨에게서 돈을 빼돌린 것은 인정하지만 청와대 비밀요원을 사칭한 부분, 위조지폐와 동영상의 출처 등에 대해서는 모른다며 발뺌하고 있다. 김씨는 이전에도 사기 혐의로 형사처벌을 받은 적이 있다. 김씨를 구속한 경찰은 치밀한 범행 수법을 볼 때 다른 피해자가 있을 것으로 보고 추가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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