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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CIETY

‘쪽방촌’에 서성이던 봄이 지나간다

재개발 예정 가리봉洞 달동네 역사 속으로 … 하나 둘 떠난 자리엔 한숨만 남아

  • 김유림 기자 rim@donga.com

‘쪽방촌’에 서성이던 봄이 지나간다

담장 넘어 가지를 뻗은 목련이 한 잎 두 잎 아롱아롱 떨어지자, 그 위에 위태롭게 걸어놓은 빨래가 하늘하늘 흔들렸다. 벽을 따라 다닥다닥 붙은 문 사이사이에 겨우 조각볕이 들었다. 찌그러진 냄비를 들고 어두운 방에서 나온 노인은 새파란 하늘을 볼 수 없어 눈을 감았다. 4월 20일 찾은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 125번지 일대 쪽방촌(벌집촌)은 온몸으로 봄을 맞고 있었다.

‘디지털 비즈니스시티’로 환골탈태

‘쪽방촌’에 서성이던 봄이 지나간다

봄을 맞은 가리봉동 125번지 일대에는 ‘월세방 있음’이란 벽보가 곳곳에 붙어있다.

“그럼 이거 대신 라면 4개만 주세요.”

125번지 정중앙에 있는 슈퍼마켓이 소란하다. 사려던 물건 값보다 가져온 돈이 적은지 라면 몇 개를 놓고 실랑이하던 아주머니가 몸을 돌려 가게를 나왔다. 왼쪽다리를 절뚝이는 게 한눈에 들어왔다. 목발 대신 등산용 지팡이로 한 걸음 한 걸음 지탱하며 걸었다.

최정순(52) 씨는 남편(55)과 함께 가리봉동을 17년째 지키고 있다. 전남 완도 출신으로 그곳에서 결혼해 서른다섯이 되던 해 서울로 올라와 가리봉동에 뿌리내렸다. 2000년 초까지 주위 공단 모피공장에서 일했으나 공장 규모가 줄어들면서 일을 그만뒀다. 나이가 들다 보니 퇴행성관절염이 와 걷기도 힘들다. 하지만 치료는 엄두도 못 내고 그저 진통제 먹고 파스 붙이며 하루하루를 견딘다. 남편은 부천의 인쇄공장에서 일하지만 여전히 가리봉동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보증금 100만 원에 월세 15만 원. 두 사람 사는 데 서울에서 이만한 곳 찾을 수 있남?”

비록 볼품없는 방 한 칸, 부엌 겸 화장실 하나 딸린 쪽방이지만 타향에 제 손으로 마련한 소중한 보금자리라 최씨는 정을 붙이고 살았다. 하수구에 물이 넘치면 주인 부르기 전에 직접 손을 봤고, 깔끔하게 도배도 했다. 길 쪽으로 난 창문에 방한 테이프를 붙인 것도 최씨 본인이다. 주민등록을 옮기고 사정이 괜찮아지면 이쪽에 전세방도 얻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내년에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뒤 모든 의지를 접었다.

“어차피 돈 한 푼 못 받고 쫓겨날 텐데 뭐. 여긴 내 집도 아니잖아.”

최씨가 20년 가까이 지낸 이곳을 떠나야 하는 이유는 2011년 예정된 재건축 때문이다. 서울시는 지난 1월 “가리봉동 125번지 일대에 53층 규모의 복합비즈니스센터와 주상복합건물을 세워, 5430가구가 거주하는 단지를 만들겠다”고 밝혔다. 그동안 구로구에는 구로디지털단지가 있었지만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생활권은 강남이었다. 구로구는 지역의 소규모 경제를 살리기 위해 재개발을 통해 전용면적 60㎡(18.15평) 이하의 소형 주택을 많이 공급할 계획이다. IT 전문기업에 다니는 젊은이들이 생활, 창업, 마케팅, 비즈니스까지 원스톱으로 처리할 수 있는 첨단업무 복합도시로 만들겠다는 포부다. 구로‘공단’이 ‘디지털단지’로 변모한 데 이어 1, 2평 좁은 방이 다닥다닥 붙은 쪽방촌마저 ‘디지털 비즈니스시티’로 환골탈태하게 됐다.

구로공단이 1970년대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정책 속에서 국가 수출의 10%를 책임지며 잘나가던 때, 이곳 쪽방촌도 호황을 누렸다. 공단에서 일하던 여공이 많이 거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00년 이후 공단이 사라지면서 이곳은 조선족, 막일꾼 등 갈 곳 없는 이들이 싼 월세로 거주하는 주거지로 변해갔다. 그마저도 올해가 마지막 봄이다.

옛 가리봉동의 향수를 잊지 못하는 이는 최씨만이 아니다. 골목 모퉁이에 허름한 식탁의자를 내놓고 앉아 볕을 쬐던 강한운(76) 씨는 30년 전 쪽방촌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고 한다.

“그땐 한 방에 3, 4명씩 살고 그랬지. 좁아터지면 어때. 들어와서 눈만 붙였다 가는 걸.”

요즘 가리봉동 인구의 상당수는 중국동포다. 통계청이 발표한 외국인 인구 등록현황에 따르면 서울에서 가장 많은 외국인이 거주하는 동은 가리봉동(7638명, 2009년 기준)이다. 그중에서도 중국 출신이 많아 동네 곳곳에 중국어로 쓴 ‘쓰레기 버리지 말라’는 표지판이 붙어 있다. 동네에서 어색한 한국말이나 중국말을 듣는 것도 어렵지 않다. 5년 넘게 ‘컴퓨터세탁소’를 운영하는 남모 씨는 “다들 잠만 자고 나가니까 시끄러운 것도 없다. 중국 사람들 모여 산다고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 편견이 더 문제”라고 말했다.

여공 대신 가리봉 지킨 중국동포

서울에서 가장 저렴한 거주지, 가리봉동이 사라지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어디로 갈까? 금천경찰서의 한 경찰은 “중국동포는 이미 2호선 라인을 타고 이동 중”이라고 전했다. 이주 초반에는 가리봉동, 대림동 등에 많이 살았는데 재건축 때문에 다들 봉천, 낙성대, 광진, 구의로 이동한다는 것. 최근 강남 고시촌을 점령한 것도 중국동포라고 한다. 2호선 라인이 붐비는 건 교통이 좋아 출퇴근하기 쉽고 전월세가 비교적 싸기 때문이다. 곧 가리봉동의 ‘조선족 거주지역’ 특수는 사라진다.

이사를 떠나는 사람은 많아도 새롭게 가리봉동을 찾는 이는 많지 않다. 집집마다 ‘월세방 있음’이란 종이가 붙어 있다. ‘큰 욕실, 화장실 구비’라고 덧붙인 곳도 있다. 지난해 가을까지 살던 세입자가 나간 뒤 6개월 넘게 방을 비워둬 큰일이라는 배명옥(63) 씨는 “단돈 10여만 원이라도 들어와야 나도 먹고살 텐데”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쪽방촌의 성수기는 겨울. 날씨가 추울 땐 무리해서라도 쪽방촌을 찾았던 일용직 노동자, 노숙자들이 따뜻해지면서 빠져나가 봄에는 사람이 많지 않다. 배씨의 비워둔 방도 언제 나갈지 기약이 없다.

반면 가리봉동의 변화를 기다리는 사람도 있다. 125번지에서 슈퍼마켓을 운영하는 한모(45) 씨는 새로운 거주타운이 들어서면 아파트에 입주할 예정이다. 가장 기대하는 사람은 한씨의 아이들. 가리봉동에서만 20년 살아 정도 많이 들었지만 이젠 이 골목을 떠나고 싶단다.

“동네에 늘 먼지가 날리고 지저분했어요. 혼자 사는 사람이 많으니 술 취해서 행패를 부리는 일도 잦고, 이웃 간 왕래도 없었어요. 이젠 깔끔한 아파트에서 아이들을 기르고 싶습니다.”

하지만 모든 재개발이 그렇듯 기한대로 이뤄질지는 미지수다. 계획대로라면 내년 하반기에 공사가 시작되는데, 실제 언제가 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 복잡한 영어 이름의 오피스텔 사무실 사이에 외딴섬처럼 자리한 가리봉동 125번지. 열심히 공장 기계를 돌리던 그네들이 하룻밤 몸을 뉘던 그 작은 방들이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주간동아 2010.05.03 735호 (p60~61)

김유림 기자 r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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