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34

2010.05.04

인도 의원 여성할당제 하원서 좌절

국민회의당 표결 당일 돌연 법안 철회 … 남성 의원들 “내 선거구 잃을라” 큰 걱정

  • 델리=이지은 통신원 jieunlee333@hotmail.com

    입력2010-04-26 17: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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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도는 ‘할당제 천국’이라 부를 만큼 각 분야에서 할당제를 많이 시행한다. 인도공화국 헌법은 카스트 제도로 인해 전통적으로 차별을 받아온 사람들을 ‘지정 카스트’와 ‘지정 부족’이란 이름으로 따로 관리한다. 중앙 및 지방 의회 의석은 물론 고등교육기관 입학이나 공무원 선발 때도 일정 비율을 이들에게 배정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또 사회적으로 하위계층에게 발전의 기회를 줄 수 있도록 특별 배려를 해야 한다는 조항이 있어, 이들을 위한 할당제도 마련돼 있다.

    숨어 있는 반란표에 입법 무산 우려

    여성할당제 논의는 이런 맥락에서 출발했다. 인도 여성 전체를 전통적으로 억압받아온 하위계층으로 규정, 여성의 의회 진출을 늘림으로써 정치권 특히 입법부에서 여성의 목소리를 적극 반영해 양성평등 정책을 펼치도록 한다는 데 목적이 있다.

    사실 인도 정계에서 여성 정치인의 면면은 화려하다. 명목상 국가 원수지만 프라티바 파틸 현 대통령이 여성이고 제1여당인 국민회의당 당수, 하원의장, 야당 원내총무도 모두 여성이다. 지방 정치권에서도 최고위급에 자리한 여성의 파워는 실로 막강하다.

    하지만 일반 의원 또는 주 의원에서의 여성 진출 상황은 많이 다르다. 현재 중앙 하원에 진출한 여성 의원 수는 59명으로 하원 재적 545석의 10.8%에 불과하다. 그래서 여성할당제는 중앙과 각 주 하원 의석의 33%를 여성에게 할당, 더 많은 여성이 중요한 정책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여성할당제 법안은 1996년 처음 의회에 안건으로 등장했다. 이후 여성계 및 여성 의원들의 청원과 제안 등으로 의회에서 끊임없이 논의했다. 이를 위한 특별위원회도 여러 번 구성했다. 수많은 논의와 수정 끝에 2010년 3월 상정된 법안에는 ‘여성 할당 33% 내에 기존 할당제를 동일하게 실시한다’라는 내용이 담겼다. 지정 카스트와 지정 부족 여성에게까지 별도의 할당을 줄 것을 규정한 새 법안이 2010년 3월 9일 마침내 상원에서 통과되자 여성 정치사에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듯했다. 최대 정당인 국민회의당과 제1야당인 인도국민당, 좌파연합이 이 법안에 대한 합의를 이뤘기에 하원 통과도 무난하리라 예측했다. 언론들도 여성할당제 실시가 확정된 듯 보도했다.

    하지만 하원에서 여성할당제 법안이 표결에 부쳐지던 그날, 국민회의당이 돌연 법안을 철회했다. 당내 반란표가 많이 나와 입법이 무산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거대 정당들 사이에 합의가 이뤄진 상황이라 군소 정당이 아무리 반대를 해도 계산상으로는 입법이 가능했다. 하지만 표를 행사하는 남성 의원들이 결정적인 순간에 반대표를 던질 가능성을 여당 지도부는 간과할 수 없었던 것이다.

    대부분 남성 의원은 여성할당제 법안에 원칙적인 동의를 하면서도 찬성표를 던지는 일에는 난색을 표한다. 우선 33%라는 수치에 대한 압박감 때문이다. 현재 지정 부족과 지정 카스트에게 할당된 의석은 22.5%인데, 일반 의석 중 33%가 다시 여성에게 할당된다면 전체 의석의 절반에 육박하는 48% 이상이 할당제에 묶인다. 남성 의원들 처지에서는 본인의 선거구가 여성에게 돌아가면 의석을 잃을 수도 있다는 위기의식이 클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각 정당에 소속된 여성 의원들은 여성할당제의 합의를 이끌어내고자 남성 의원들을 상대로 활발한 로비를 벌여야 했다. 같은 정당 소속 의원이 이미 합의된 정책에 대해 동의를 구하는데 ‘나 몰라라’ 할 수도 없지만 자신의 자리를 생각하면 선뜻 찬성하기도 쉽지 않아 남성 의원들이 곤혹스러워했다는 후문이다.

    제1야당인 인도국민당의 고민은 더욱 깊었다. 인도국민당은 여당만큼 당의 중앙집권화가 이뤄지지 않아 지역에 기반을 둔 중견 의원의 힘이 상대적으로 강한데, 이들이 바로 여성할당제를 반대하는 세력이기 때문. 여성할당제에 따르면 선거 때마다 여성에게 할당을 주는 선거구를 바꾸도록 돼 있어 기존 의원들 처지에선 자신의 선거구도 언젠가 여성 할당 선거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도국민당은 과거 힌두 원리주의 정책 때문에 얻은 보수적이고 고루하다는 당 이미지를 개선해야 한다는 필요성에서 여성할당제를 지지할 수밖에 없었다.

    중산층 이상 힌두교 여성에게만 혜택?

    군소 정당은 조금 다른 이유에서 여성할당제를 반대했다. 대부분 지정 카스트, 하위계층에 지지기반을 둔 신생 정당으로, 여성할당제 원칙에는 찬성하나 지금과 다른 형태로 개정해야 한다는 견해에서다. 따라서 이들은 지금까지 선거에서 할당제 혜택을 보지 못한 하위계층은 물론 이슬람교도 같은 종교적 소수 집단에도 여성할당제 내에서 일정 의석을 지정해야 한다는 것. 만약 여성할당제 내에서 하위계층이나 종교적 소수 집단 등 열악한 집단을 위해 따로 할당하지 않으면, 결국 여성할당제가 상층 카스트와 중산층 이상 힌두교도 여성에게만 이익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하층 카스트 이슬람 여성은 가장 핍박받고 열악한 계층이라 혜택이 절실하다.

    하지만 군소 정당이 여성할당제를 반대한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출마 후보의 33%를 채울 여성 인재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지정 카스트나 하위계층을 배경으로 성장한 이들 정당은 당내 여성 인재를 개발하거나 영입할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해서라도 일단 법안을 부결하고, 이후 개정을 추진하는 게 유리하다.

    국민회의당은 여성할당제 법안을 하원에서 철회했지만, 이번 회기 내에 다시 표결에 부쳐 통과시키겠다고 강조했다. 그러면 다음 선거부터 여성들이 의회에 대거 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군소 정당의 하위계층 출신 정치지도자들은 여성할당 의석 내에 반드시 하위계층 지분이 들어가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한다. 이들은 법안 통과를 저지하는 것이 1차 목표지만, 만약 통과된다 해도 이를 통해 향후 일반 의석에서 하위계층 할당을 실시할 수 있는 교두보가 마련된다는 계산도 있다.

    여성할당제 법안은 이미 상원을 통과했지만, 의원 개개인의 이해와 직접적으로 맞물린 하원에선 더 큰 난관에 부딪혔다. 인도의 남성 의원들이 얼마나 이성적으로 공리를 위한 결단을 내릴지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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