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34

2010.05.04

우주의 언어 혹은 근원의 풍경?

이상남의 ‘Landscapic Algorithm(Two telescopes)’

  • 김지은 MBC 아나운서·‘예술가의 방’ 저자 artattack1@hanmail.net

    입력2010-04-26 15: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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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주의 언어 혹은 근원의 풍경?

    이상남, ‘Landscapic Algorithm(Two telescopes)’, 스테인리스스틸에 아크릴 우레탄, 46×5.5m, 2010

    전 세계 오래된 벽화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2만 년 전 프랑스 라스코 동굴에서 발견한 들소 떼, 1만5000년 전 스페인 알타미라 동굴과 프랑스 퐁드 공프 동굴에서 발견한 상처 입은 들소와 순록은 당장이라도 뒷다리로 땅을 박차고 먼지구름을 내며 달려 나올 것처럼 매우 생생히 묘사돼 있습니다. 이들 동굴벽화를 발견했을 당시 위작 논란이 있었던 것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정교한 사실성 때문이었습니다. 원시인들은 그들의 관찰 대상인 자연을 철저히 보이는 그대로 그려냈습니다.

    하지만 원시인의 생활방식이 사냥에서 농경으로 바뀌면서 벽화 형식은 크게 변했습니다. 농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개별적인 대상이나 자연 현상이 아니라 그것들의 공통점, 즉 ‘자연의 법칙’을 추출하는 것이었죠. 이렇게 추상적 사고가 가능해지면서 사람들은 이제 보이는 대로가 아니라 자신들이 발견한 개념에 따라 ‘아는 대로’ 벽화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언뜻 보면 어설픈 기하학적 그림이 실은 여러 사물이나 개념에서 공통적인 특징 또는 속성을 추출한 ‘추상’ 능력의 산물이라는 거죠.

    2010년 우리는 컴컴한 동굴 속이 아닌, 천창(天窓)에서 빛이 아름답게 쏟아지는 경기도미술관에서 최첨단 현대식 벽화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상남 작가가 66개의 철판에 자동차용 도료를 칠하고 갈아내기를 반복, 1mm의 오차도 없이 연결해 탄생시킨 46×5.5m 규모의 거대한 벽화가 그것이지요. 이 작품의 제목은 ‘풍경의 알고리즘(연산법)’. 그런데 그가 그린 풍경이 생소한가요.

    경기도미술관의 설계를 맡은 이탈리아 건축가 귀도 카날리는 인근 화랑호수의 수면을 가르는 배의 돛대 형상을 미술관 안으로 끌어들여 미술관 자체를 커다란 범선으로 만들고자 했어요. 하지만 매끄러운 반투명 유리판 너머로 그대로 노출되는 육중한 철제 파이프의 복잡한 구조와 둔탁함을 순화해줄 조치가 필요했죠. 이상남 작가는 카날리의 설계도면을 꺼내들어 상상을 시작했습니다. 이처럼 그의 작업은 자연의 물상에서 시작한 게 아니라 인간이 창조한 ‘형상-추상’의 과정을 거친 ‘형상-’을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추상을 다시 추상하는 작업, 이것이야말로 회화의 마지막 지점이자 최고의 예술가만이 펼칠 수 있는 고도의 유희가 아닐는지요.

    노출된 철제 파이프 맞은편 벽에는 자연의 재현이 되거나 무엇인가의 기호가 돼야 한다는 의무에서 벗어난 근원적 풍경이 끝없이 펼쳐집니다. 삶과 죽음을 상징하는 원과 직선은 스스로 나눗셈 기호가 돼 삶과 예술의 최대 약수를 구하기도 하고, 때로는 서로가 연결돼 아름다운 화성(和聲)의 파이프를 만듭니다. 피아노 건반보다 더 매끄러운 표면은 관객의 시선을 빛의 속도로 움직이며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우주의 어느 좌표로 순식간에 이동시킵니다. 작가 이상남의 집념 덕분에 거대한 범선에서 광속으로 움직이는 우주선으로 재탄생한 경기도미술관에 꼭 들러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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